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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아 6:3-6 말씀, 하나님을 힘써 알자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면서 시작했던 것,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는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40여연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깨달음의 여정이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끊임없이 질문했던 것,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박국이 끊임없이 질문했던 것, 과연 이 시대에 나타난 부조리, 불합리,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성행하는 것, 도대체 하나님은 왜 잠잠하신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질문과 그 분께서 주시는 답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은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말씀을 통해 응답하십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는 첫째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요, 둘째가 선포된 말씀인 설교요, 셋째가 말씀 자체,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성육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오신 것이요, 말씀을 통해서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라 할때의 알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하라는 말입니다.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전인적인, 삶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흔히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많이 듣던 말이 "그냥 믿어! 믿으면 알아..."라는 소리였습니다. 이런 신앙을 이른바 신앙주의라고 합니다. 

이해가지 않아도 무조건 믿으라는 주의입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않고 납득되지 않고 무조건 믿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맹신입니다. 


그래서 이런 맹신적인 신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신앙을 반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가 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곳곳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론하는 장면, 유대인들과 예수님 및 그 제자들이 변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학의 발달은 질문하는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아는 것에 근거해야 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통해야 합니다. 다른 왕도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호세아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은 절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알고 믿으라고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제사도 번제도 다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의식이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 생각은 않고, 주일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한 주간의 신앙을 떼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고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덮어두고 자기 소신껏 예배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신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에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예배할 대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경험한 하나님, 자기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듭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황금송아지, 우상입니다. 

처음부터 우상숭배하러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떠나 자기식대로 신앙생활하다가 만든 것이 다름아닌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이나 무속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미신이나 무속은 그 대상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신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빌면 됩니다. 나무에 기도하면서 그 나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무슨 나무인지, 그것을 알면서 치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그 나무에 가서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더라...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소원이 이루어지는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치성만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소원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미신이고 우상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소원 이전에 내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하며, 살기를 바라시는지를 알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기호, 판단, 생각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과거 미신 믿던 버릇이 남아있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치성만 드리려고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도 미신스럽게 믿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 드린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을 내 심령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 미신 섬기던 그 가락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믿어’, ‘신앙은 원래 무식하게 믿는거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알고 기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속신앙입니다. 다른 데는 관심이 없고 내 소원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면 무당도 찾고, 점집도 찾고 자기 소원을 이루는 곳은 어디든 찾아갑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왕이었지만 점보는 데를 찾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도 바알과 앗세라를 동시에 섬겼습니다. 자기 소원에 목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목적은 아닙니다. 미신이나 무속은 자기 소원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성경을 통해 깨달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다른 은혜는 중요치 않습니다. 

무화가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 마르지 않는 영생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우리의 소원은 일시적입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자꾸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다 생각했다가도 그것이 이루어지면 금방 목마르고 다른 소원으로 갈급해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복무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경을 모르기에 자기 소원에 매달립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만큼 신앙합니다. 모르는 만큼 못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덮어 놓고는 못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기 대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 느낌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뢰입니다. 신뢰는 상대를 알아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신뢰가 생깁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결단하게 됩니다.

호세아 4장 6절 말씀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배한다고는 하는데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앙생활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한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느낌대로,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히 성경을 보며 성경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합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가 승리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까 이제부터 기도 하지 말고 성경만 보리라 하시는 분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안읽은 것 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강조하면 성령을 무시하게 된다. 말씀을 안읽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쳤으니 얼마나 잘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자꾸 딴소리 하며 어긋나며 전혀 능력이 없었습니다. 성령 받은 후에 그들은 비로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깨달았고 능력으로 그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말씀 안에 성령도, 기도도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쇄가 발견되기 이전 성경은 오직 손으로 쓴 필사를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이 필사의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들이 손으로 쓰면서 내용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수도원 등지에서 성경을 필사하기 위해 정해놓은 규칙을 보면, 그리고 수천년을 통해 전해내려온 성경의 내용을 비교 대조해 보면 이 성경의 필사가 얼마나 정확히 그 본문을 전해왔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도원에 있어서 필사하는 수도사는 우선 몇주간의 성결과정을 거쳐서 죄를 회개하고 죄된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합니다. 

그리고 나서 골방에 들어가 방해 받지 않고 성경을 필사하는데 한장에 한 오타가 나와도 그 장은 소각되어지고 만약 하루에 오타가 세번이상 반복되면 그 날에 쓴 모든 필사는 소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멈추고 필사자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목욕통에 들어가 다시 몸을 씻고 정결케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필사할 수 있는 분량도 너무 과하지 않도록 엄격히 제한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필사본은 대 수도원장에게 전해져서 꼼꼼하게 삺펴본 후 오류나 오타가 발견되면 그 사람의 필사 자격은 박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하는데에 실수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원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두 필사한 사본에 근거하고 있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성경을 없애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이 필사한 성경마저도 기독교 박해가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이 소각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이 조작되었다는 말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조작설을 뒤덮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947년 사해지역에서 한 목동이 양을 치다가 앞벽 사이로 달아난 양을 찾다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동굴 속에서 여러개의 두루마리 문서조각이 들어있는 깨진 항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른바 사해 사본의 발견입니다. 이 후로 1956년까지 11회에 걸쳐서 발굴단이 이 일대를 발굴하여 구약의 거의 모든 부분과 외경으로 알려진 문서를 다 발견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사본의 추정된 기록연대는 예수님 탄생 이전 까지로 올라가 에세네파 그룹의 작품들로서 추정되는데 그 기록의 내용과 문자가 수도원을 거쳐 내려 왔던 성경의 문자들과 거의 동일하여 얼마나 오랜기간 동안 필사를 통해 전해내려왔던 성경이 정확하게 보존되고 전해내려왔는지 성경의 정확성을 확증하는 증거물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이번 주부터 우리는 새롭게 영성학교 성경공부를 시작할 것이고, 사순절 부터는 전교인이 이 성경 필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 성경필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손수 쓰면서 말씀이 내 몸과 삶에 새겨지는 역사, 그리고 각 그룹으로 말씀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서로 나누는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압시다. 

하나님을 모르므로 망합니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로고스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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