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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모해야 할 것 (고린도전서 12장 20-31절) 


아기가 태어나서 1년이 되면 돌잔치를 합니다. 돌잔치의 하일라이트 하면 바로 돌잡이 입니다. 

먹을 것을 다 치우고 나서 상이나 테이블 위에 여러가지 것을 올려 놓습니다. 

연필, 책, 청진기, 돈, 쌀, 활, 붓, 실, 

요즘은 직업들이 늘어서 골프공, 스케이트, 축구공, 컴퓨터 마우스 같은 것도 올려놓는다고 합니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잡느냐에 부모들은 은근히 기대를 하면서 아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돌 때 무엇을 잡았는지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적 있습니까? 

자기 자녀가 무엇을 잡았는지 기억하시나요? 


성경에서 보면 우리 크리스찬은 두 번 태어납니다. 

한번은 부모의 배속에서부터 육체적으로 처음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납니다. 이른바 회심, 중생의 사건입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 돌잡이와 같은 것을 해보면 어떨까요? 

이른바 영적인 돌잡이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어떻게 커 나갈 수 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이른바 은사장이라고 불립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때 신령한 것으로 번역한 구절은 영어 성경에서 보니까 Spiritual Gift입니다. 이른바 은사입니다. 


이 은사를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앞에 성령의 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을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그리고 방언을 통역함을 펼쳐 놓고 여러분앞에 고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8-10절) 

들어보니 나한테는 별로 쓸데 없는 것이네...하며 아무 것도 안고르시겠습니까? 


바울은 뭐라고 말하냐면 너희에게 영적인 선물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가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말 못하는 우상이 하라는 대로 끌려 다니며 살았는데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 은사를 통해 너희가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런 성령의 은사를 주신 이유는 7절에 보면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유익하게 한다는 말의 영어 번역을 보니까 이 은사는 "the common good" 곧 공공의 이익을 위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공공의 이익은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유익한 자, 쓸모있는 자가 되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읽은 본문 28절부터는 어떻게 표현했냐면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것은 첫째 사도요, 둘째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행하는 자요,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읽으면서 아 교회에서는 사도가 제일 높고, 그다음은 선지자, 교사,,,,방언 말하는 자는 꼴애비구나 하지만 이것은 서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등하게 은사, 혹은 직분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쓸모있는 자인가? 내가 이 교회에 쓸모있는 자인가?라는 것은 바로 나에게 어떤 은사가 있는가? 

내가 어떤 은사를 바라고 있는가? 그리고 이것을 잘 사용하고 있는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런 은사들은 목사님들이나 믿음 좋고 열심인 특별한 몇몇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지 대다수의 평신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시대는 선택받은 몇몇의 소수, 제사장이라든자 레위인들에게만 이런 은사가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은 몇몇의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했고 그들이 필요한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의 종교체계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의 머리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자에게 성령이, 성령의 은사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를 가리켜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모든 성도가 제사장 이라는 표제 앞에 모든 성도가 함께 참여하는 사역을 했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교회는 다시 구약의 시대의 예배로 돌아간 느낌을 받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서비스 하고 서로 서로에게 서비스를 하러 모인 곳이 교회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주신 것인 영적인 선물, 바로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자신의 이익에 앞서 공공의 이익,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인격, 성품, 특기를 개발하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타인의 시선에 자기를 맞추는 데에 익숙합니다. 

요즘 가장 시끄러운 이슈 하나가 역사 교과서 이야기 아닙니까? 

지금은 각 출판사에서 나온 교과서를 국가가 공인하면 각 학교마다 선택해서 가르치도록 만드는데 이것을 아얘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역사를 아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수나 진보에 상관없이 이것을 그토록 반대합니까?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출애굽 사건이지만 그 내용에 따라 출애굽,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로 따로 나누어서 기록하고 각자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구약에 담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각자가 가진 고유한 모습, 고유한 은사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금요일날 열두 제자 설교를 통해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이 택하신 열두 제자들 하나 하나가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들의 말과 행동과 삶이 얼마나 다르고 특별합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의 고유성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참 나" "참 자아" " 참 내 인격" 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외식, 누룩을 제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모습 그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일단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저도, 성도인 여러분도 서로 중보하고 격려하고 함께 신앙생활 할 적에 내 중심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연합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 저 사람처럼 안될까? 저 사람은 왜 나처럼 안할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함과 그 사람의 고유함이 함께 어우러져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또한 수많은 교단으로 이루어진 우리 개신교 전체를 보아서도 서로의 고유성과 다른 강조점을 가지면서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내는 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천년 동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따르는 삶의 모습은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그 분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치유의 능력을 사모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분의 말씀 전파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어떤 분은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을 본받기 위해 애씁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의 기도를 본받으려 합니다. 

은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 인간에게 조금씩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 

우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 그 형상은 각자마다 다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그 형상을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함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하는, 연합하게 하는 가장 큰 은사, 더욱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질중의 본질, 그리스도의 삶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다양한 은사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가 힘써야할 가장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은사장 12장은 13장 사랑장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평신도와 더불어 세운 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떠나고 난 후 그들 평신도들이 성령을 받아 교회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경제적인 힘도 있었고 학식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에 열심이어서 각종 은사가 어느 교회보다 뚜렷하고 활발하게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리한 조건과 상황이 오히려 교회를 분열의 길로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은사를 받으니까 질서가 없어집니다. 

바울이 성에 차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그가 사도가 아니다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도바울의 외모를 가지고도 트집을 잡습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후 10:7)"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못생긴 사람에게도 성령이 있을수 있느냐고까지 바울을 모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도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성령받은 사람이 질병하나 못고치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말주변이 없음을 가지고 흠을 잡기 시작합니다. 그의 말에는 박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에는 졸하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바울자신도 언변이 없는 것에 솔직히 시인을 하면서 나는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을 가지고도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사람구실 못한다는 것이지요.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서 바울은 자신에게 가하는 이런 여러가지 인신 공격에 때로는 서움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화도 내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떠나간 후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고린도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행 18:24; 19:1).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행 18:24 표준 새번역)습니다. 아볼로는 그의 웅변과 학식으로 바울의 시원치 않은 설교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고린도교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아볼로의 설교가 끝나면 가슴이 다 후련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성서 연구가들은 사도권, 은사, 바울에 대한 비교...) 사람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고 나서 바울에게로 피신오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서 한편으로 그들의 신앙을 붙잡아 주고 아볼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다시 고린도 교회로 보내려고 하지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전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그래서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바울이 생각하니까 디모데를 보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디모데가 그 곳에서 잘 견딜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지요. 

[고전 16:10-11]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그들은 사로 자기들의 취향과 신앙의 연륜에 따라 스스로를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라고 나뉘어서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어느 지도자도 그 가운데서 거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렇게 은사는 뛰어나지만 결코 하나되어 화합하지 못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들이 방언을 하고 지혜의 말씀을 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다. 

예언과 믿음이 있어도, 자기 재산을 다 하나님께 바쳐도 그 중심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nothing,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함께 말씀을 나눈 적이 있지만 가장 유심히 봐야 할 구절은 바로 3절입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처음에 읽을 때에는 "아, 구제를 하더라도 사랑없이 자기를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위선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열정을 다해 헌신을 해도 중심이 바르지 못하면, 그 안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을수도 있겠구나.." 

뭐 이런 저런 주석을 찾아봐도 이런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몇 번 더 읽어보니까 걸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냥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가 아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입니다. 내 몸을 그냥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입니다. 위선으로 자기 것의 얼마정도는 구제하고 헌신 할 수 있지요. 내 몸의 일부분을 가지고 남에게 잘 보이듯 헌신 할 수 있지만 내몸을 불사른다는 것은 순교한다는 것입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헌신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위선으로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습니까?"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그러니까 청년이 뭐라하냐면 "제가 어려서부터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날 따르라"하시죠. 그러니까 청년이 근심하여 돌아갔더라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 이건 위선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열정으로 봉사할 수 있지요. 그런데 순교의 마음으로 자기를 다 내어주는 것.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없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때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도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각자가 가진 모든 은사를 완성시키는 은사의 완성입니다. 

다른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부족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 유익이 없다. 은사는 유익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 은사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아무 은사가 없어도 사랑이 있으면 OK입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를 움직이는 가장 큰 은사요 힘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은사를 발견해가되 서로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의 은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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