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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 (창세기 32장 22-32절) 


야곱은 히브리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양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같은 인물들을 좋아하고 또는 신앙의 모델로서 삼고자 하지만 야곱을 뽑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야곱이라는 의미는 "사기꾼"이요, 이름 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사기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신약의 열두 사도의 모형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시조는 야곱입니다. 야곱을 통해, 그의 열두 아들을 통해,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을 바꾸어 이스라엘 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요, 새사람, 새나라가 되게 하신 모든 신앙인의 믿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을 기억하며 "나도 하나님과 기도하여 이겨야지.."하며 부르짖기도 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우리도 야곱처럼만 하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는 소리인지 우리는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창 12:1-2)의 말씀은 야곱의 자손들이 모세를 통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아브라함 이전에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나라, 왕국을 세우려고 했던 바벨탑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새로 보여주시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도대체 어떤 나라냐 하는 질문은 바벨탑을 통해 세우고자 했던 나라와 비교해서 살펴 볼 때에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창 11:1-4]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두 사건의 공통점은 사람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을 건설하는데에 있습니다. 

  • 그런데 바벨탑 사건은 사람이 주어가 되어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즉,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왕국을 짓자는 것이지요. 일의 시작과 끝이 모두 "나" 혹은 "우리"가 주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하나였던 세계에서 흩어지는 나라가 됩니다. 바벨이라는 의미 자체가 "뿔뿔히 흩어짐"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 나라를 짓자는 목적은 흩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 바벨탑의 건축은 분명한 비교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벽돌로 돌을 대신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이 아닌 건축물은 돌과 진흙으로 지었는데 바벨탑은 벽돌과 역청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벽돌과 역청은 인간의 기술로 세우는 나라입니다. 돌과 진흙으로 만든 건축물은 무엇입니까? 교회요, 성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반석과도 같은 고백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요, 진흙같은 우리를 토기장이 하나님께서 빚으신 것이 성도입니다. 흙으로 만든 우리에게 물로, 성령으로, 은혜로 빚으신 것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어두웠던 우리눈을 침과 진흙으로 보게 하신 자가 성도요 교회입니다. 
  • 그런데 그런 돌과 진흙으로 세워진 성도를 교회를, 벽돌과 역청이라는 물질로, 기술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 기슬과 물질로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했던 것이 바벨탑입니다.  
  • 이스라엘은 그러한 바벨탑에 대신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로, 기술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씨름을 통해서 만들어 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택해야 했는가? 

가장 연약하고 가능성 없는 자(기술도 없고 물질도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복의 나라, 복의 백성이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벨탑... 세상적인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

목적은 똑같다. 땅과 자손을 건설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모여 힘을 합하지만 그 근원된 욕망은 다름아닌 자기 이름을 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과 자손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완전한 번영의 축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32장의 내용은 유명한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라고는 하지만 그 천사는 바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시기 위해서 나타난 하나님이 현현이었습니다. 왜 야곱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를 이스라엘로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씨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듬어 가시는 과정이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그것이 힘겨운 씨름인 것입니다. 하나 하나 굴복할 때마다 끙끙거리고 힘들어하고 비틀거리는 것이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씨름하는 시간은 내가 하나님께 굴복해 나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어 주시는 시간입니다. 마치 조련사가 말을 훈련시키느라 힘겨워하고 말도 지치지만 그런 힘겨운 조련 끝에 주인의 말을 잘 따르는 명마가 탄생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조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 첫째는 바로 그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날 때부터 씨름하는 자입니다. 겨루는 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언제나 겨루어서 쟁취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표를 달성합니다. 그는 팥죽 한그릇에 형의 장자권을 쟁취합니다. 팥죽 한 그릇이라는 것은 결국 하루의 갈급함을 이용해 형의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목마른 갈증 떄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불평원망하며 범죄하는 민족이 되듯이 야곱은 형의 한끼 배고픔을 이용해 장자권을 사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장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장사를 통해 얻습니다. 그것도 형의 약점을 이용한 합당치 못한 장사입니다. 그는 아버지 에서도 속이고 라반도 속임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복적은 바른 것이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그의 방밥은 철저히 악인의 꾀에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꾀로 얻고자 했던 아브라함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했지만 철저히 인간적인 꾀에 의지했습니다. 그는 사기꾼이요, 악인입니다. 그래서 그런 꾀에 의지하는 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과의 씨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하는데 꾀를 부리니 그곳에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 남을 때까지 끝까지 꾀에 의지합니다. 머리를 굴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받고 싶은데 그것의 방법은 철저히 바벨탑의 방법, 벽돌과 역청에 의지합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꽈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야곱의 선택

  • 그는 홀로 남게 되자 비로서 하나님의 방법을 구합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홀로 남게 되자 비로서 전적으로, 자기 꾀를 버리고, 자기 생각 버리고 하나님 이제 나를 만지소서, 나를 고치소서, 하나님 앞에 무릎꿇습니다. 
  •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천사를 높지 않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고 관절은 비틀리고 어긋나는데도 그는 놓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잠잠하면 포기합니다. 자기의 상황이 더 안좋아지면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다른 방법도 없으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기조차 못합니다. 쉽게 포기하면서 그래서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합니다. 할만큼 한다는 것은 될 때 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요, 그 분의 말씀이 임할 때까지 젼혀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성령이 올 때까지 기도하라는 그 말씀에도 불구하고 500명중 380명이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흩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자기의 믿음은 할 만큼 하면서 하나님도 참 너무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가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게 응답하지 않으면, 말씀을 주지 않으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으면 난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고, 엉덩이가 쑤시고 아파도 난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매달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 모습을 그대로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사기꾼입니다. 난 엉터리입니다. 난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문제해결하러 나왔는데,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기려고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내 진정한 회개, 내 진정한 모습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씨름에서 진적 없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비로서 무릎꿇고 회개합니다. 
  •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름의 응답은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죄인됨을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환도뼈- 자신이 이기심, 고집, 세상적인 힘이 되는 근원, 자기가 세상에서 의지하는 보루-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젊은 부자 청년에게는 돈, 
  •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줄 알면서도 괜찮다고 스스로 속이며 살진 않는가?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바벨탑과 다른 존재다. 다른 나라다. 벽돌과 역청이 아닌 반석과 진흙으로 빚어진 교회요 성도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내 환도뼈를 꺾으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 내 고집을 꺾을 때 하나님은 비로서 우리에게 네가 이겼다고 우리를 앉아주신다. 네가 이긴거다 하면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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