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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만지심 (창 1:1-3, 3:21)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기초이자 첫 출발점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생령이 된지라"는 말씀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영과 영이 통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영과 교통, 교제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령이 아니라 죽은 영입니다. 영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존재는 짐승같은 존재입니다. 사탄이 마지막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 영적인 존재임을 부정하는 자, 영이 죽은 자에게 주는 것이 666, 곧 짐승의 표입니다. 


육은 육적인 것으로 만족하지만 영은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을 통해서만 생명이 유지되고 만족함을 느낍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자신의 공허함과 갈증을 채우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은 물질로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은 오직 영을 통해 채우고 영원한 것으로 채웁니다. 

아무리 돈으로 이 영을 채우려고 해도 영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질로서 이 영을 채우려고 해도 영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하지 못하고, 물건을 사도 사도 영은 기뻐하지 못하고, 늘 갈급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창세기 1장 2절에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말씀이 닿기 전의 세계가 표현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 1:2A) 


혼돈이라는 것은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kaos로, 어떤 성경에서는 formless로 번역했습니다. 

뒤엉켜 있다는 것입니다. 무질서 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허하다는 것은 "empty" 하다, 즉 nothing,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혼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있긴 있는데, 아주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있어서 무질서 하다는 것이고, 공허라는 것은 아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창조 이전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설명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물질서 하고 뒤섞여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혼돈은 곧 공허함,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흑암의 깊음 입니다. 흑암이 깊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불안함이라는 것입니다. 

ex) 거식증, 안먹어도 늘 배불러 있는 것 같은 포만감. 폭식증, 먹어도 먹어도 늘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뻥 뚫려 있다....알 수 없는 흑암이 중간에 가득 채워져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손을 대시기 전, 말씀 하시기 전 세상의 모습은 이같이 무질서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계의 모습이요, 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입니다. 

영적이지 못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무질서합니다. 

삶이 막 뒤죽박죽이고 따라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언가 일은 하는데 열매가 업습니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생각은 하는데 정리가 되질 않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의 삶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다른 결과, 다른 열매만 나옵니다. 


이것이 열매가 없는 삶이요, 잉태치 못하는 삶이요,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는 삶이요, 무덤 가운데 거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화가 나타납니다. 

달리 말하면 창조가 무엇이냐, 무질서 하던 것이 질서 있게 만들어 지고, 아무런 열매 없는, 의미 없는 삶이 의미를 발견하고 목적을 찾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의 삶의 재료가 많아도, 물질이 많고, 학식이 많고, 건강이 있어도 무질서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안한 것이고, 하나님의 손길 아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은 삶이 정리가 되고, 질서가 잡히며, 의미있고 열매 있는 삶을 살고, 평안 중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읽으면 그래서 우리 삶의 질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날: 빛과 어둠 

둘째 날: 수직적 구분 - 물과 물을 수직으로 나누어서 궁창위의 물(하늘) 과 궁창 아래의 물(바다)  

셋째 날: 수평적 구분 - 땅의 물을 나누어서 바다와 육지 


넷째날- 태양과 달과 별을 첫째날의 장소에

다섯째 날 - 하늘 위의 물에 새를 궁창 아래의 물에 물고기를 

여섯째 날 - 육지에 동물과 마지막으로 사람을.... 


처음엔 나뉘고 분리하게 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각각 나뉘어진 공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의 열매인 창조물들고 채워나가는 것,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채워 나가는 것,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하나님 주신 질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 그 결과 안식이 없고 다시금 흑암과 같은 불안함과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빠지게 하는 것이 죄이고 사탄의 일입니다. 

아담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을 없앰. (마땅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게 함)  

가인 - 선악의 구분을 없앰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함) 

바벨탑 - 하늘과 땅의 경계를 없앰. (언어가 혼잡) -> 혼돈과 공허...


  •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혼돈과 공허한 삶, 흑암이 가득한 삶을 그냥 외면치 않으십니다.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말씀으로 질서를 창조하시듯 다시금 죄에 빠진 인생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창세기 3:21절은 죄된 인간에게 다시금 창조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창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전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중 에덴 이라는 특수한 동산을 모델로 제공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해주시기 위한 장치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의 땅을 보여줍니다. 

 바른 관계의 땅에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다윗의 고백이 울려퍼지는 곳입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중요한 것은 왜 선악과를 두셨는가? 선악과가 없었으면 아담이 지를 짓지 않았을까?하는 헛된 생각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과를 통해 있었다는 것이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한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질서와 안식이 임한 것처럼 에덴 동산에 하나님은 선악과라는 말씀을 통해 질서와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질서의 파괴자, 영의 파괴자, 타락한 천사 뱀이 나타나 인간을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여 말씀 없이 살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너 자신이 하나님처럼 살라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음: 이젠 내 기준대로 살겠다. 내가 선악의 기준이 되겠다. 



자기가 자기 행동, 선악의 기준을 알고자 할 때에 자기의 기준이 되는 것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자기 선악의 기준. 자기 삶의 기준…

그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과 내 삶의 기준, 하나님의 본질과 내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

  • 수치심. 수치심이 찾아오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불안한 감정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어디론가 숨어야만 된다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뒤에 이들이 가진 감정은 죄의식이 아니다.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는 자책과 회개와 죄의식이 아니다. 단지 수치감이다. 죄의식과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고 수치감은 내 안에 몰려오는 나에 대한 감정이다. 수치심은 내 맘대로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과는 다르고, 그 방법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무가치하게 스스로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드는 생각과 감정이다. 


바로 그 때,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수치감에 어쩔 줄을 모를 때에 평소와 같이 하나님이 오셔서 그를 부르셨다. 그들은 서둘러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것이 최초의 종교의례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인간은 모든 종교를 망라하고 신의 부르심에 그대로 나아가지 못했고 반드시 의례를 통하여 나아갔다. 그가 부르실 때마다 무화가 나무를 만들어 입는다. 

하나님은 그냥 함께 거했지, 의례를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함께 있거나, 함께 있기 위해 우리를 불렀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무화가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숨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았다. 부르셨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었고, 두려웠고, 숨었다. ->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아담의 고백이다. 이 세 마디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인간의 죄의 증상과 상처가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누가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누가 널 정죄하였느냐? 뱀이? 하나님이? 하와가? NO!


아담 자신이 지금 자신을 정죄하며 두려워하며 수치감을 느끼고 숨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한꺼풀 무언가를 덮어 쓰고 가리고 나온다. 그리고 그런 의례를 해 놓은 다음에 마음으로 안심한다. 신에 대한 의무를 다했으니 자신의 마음도 가볍고 자신의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뭐하면 복을 받고, 뭐하면 저주를 받고 등등의 자신의 행위를 기준을 여전히 판단한다. 이런 신앙행위 속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 사귐이 없다. 복종은 있으나 대화가 없다. 순종은 있으나 친밀함이 없다. 

하나님은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면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모습을 나아오길 바라시지만 사람은 절대 그냥 안 나간다. 무화가 나무를 엮는다. 엮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수고한다는 행위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화가 나무는 자기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화가 나뭇잎으로는 자기의 수치심을 절대로 가릴 수 없다.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또 숨고, 또 두려워하며, 또 무언가 자신의 행위를 만들어서 예배하는 것이다. 


(사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어떤 목사님이 책에 “오늘 날의 많은 예배의 장소는 단지 앞치마를 만드는 공장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평가한다.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하러 와서…? 내 할 도리 다했으니 이젠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하러 나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우리 스스로 수치감을 느끼고, 가리고, 숨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시 내 육신의 욕심, 안목의 욕심,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 살다가 어느 순간 또 수치감을 느끼고, 가리고, 숨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도저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교제를 위하여 만든 인간이 이젠 하나님이 오실 때마다 가리고, 숨고 어쩔 줄을 몰라 할 때에 느끼는 하나님의 감정… 

그러한 죄인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는 것


하나님이 입히신 가죽옷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가죽옷은 자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현실적으로는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갈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참지 못하고 숨어버립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신앙양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가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큰 바위 뒤로 숨습니다. 나뭇잎 치마가 오죽했겠습니까? 금방 오그라들고 감추이던 것이 드러납니다. 잠시잠깐 지나면 또 다른 것을 만들어 입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수치가 가려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주신 옷은 어떤 환경에도 헤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가져 줍니다. 


둘째, 가죽옷은 피흘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범죄한 인간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됨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말은 무언가 가죽을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가리워주기 위해서 희생당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가죽을 제공한 동물은 물론 양일 것이라 결론을 짓습니다. 출애굽할 때에 사망의 재앙을 내리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자들만 그 재앙이 넘어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페인트를 잘 칠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무조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가정만 하나님의 재앙을 피해갔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넘어가리라.”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가인과 아벨 사건 이전에 가죽옷의 사건은 인류 최초의 피흘림의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무언가의 피로서 그들을 가리워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수 양을 잡아 그것의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의 몸에 옷을 입히시는 사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구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갈3:27에서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심으로 수치를 가려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주심으로 우리의 수치, 죄를 가려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겔 16:8에서는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너무 보고 싶고 교제하고 싶고 이야기 하고 싶은데,,, 인간이 마치 바람피다 걸린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숨고 피하고,,, 그러니까…날 피하지 마라.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마라 하면서 어린양을 죽이면서까지 입히신 것이 가죽 옷. 

그런데도 그것으로 완전하지 못해/…. 왜? 겉은 가렸어도 그 마음에는 여전히 선악과가 있기 때문… 내 마음, 내 기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밭을 바꾸진 못해…. 그 대신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교제할 끈은 열어둔다. 

구원의 긴 계획. 선악과의 마음/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사탄이 가져다 준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원 복음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너희 식대로 사는 것과, 나의 식대로 사는 것을 경험해보고 깨닫고 돌아와라. 

스스로 인정하고 돌아오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무화가 나뭇잎으로는 안되는 구나. 가죽옷의 방법으로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구나… 

아담과 하와를 내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같지만 결국은 3장 15절에 온 복음을 말씀하시며 하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 축복. 

가인과 아벨…. 너의 식대로 하는 제사. 나의 식대로 하는 제사. 엄격히 알려줘야 해. 깨달아야 하니까? 

그런데 화 내고 아벨을 죽임. 

[창 4:14-15]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살인까지 했는데…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심…. 

탕자: 내 멋대로 살겠습니다. 마음은 아퍼.. 그런데 그 마음을 바꾸지 못해… 그래 너 스스로 깨닫고 와라. 

깨달은 자를 기다리며 문밖, 마을 어귀까지 와서 기다리시는 분,…. 


혼돈과 공허의 무질서에서 말씀의 진리로 

그런데 그 말씀을 떠나 또 다시 죄의 길, 혼돈과 공허 가운데로 빠진 자들에게 오신 주님. 

가죽옷을 통하여,  당신의 피흘림을 통하여  그 은혜를 통하여... 


당신의 삶은 어떠합니까? 

일을 해도 열매가 없고, 무언가를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질서하고 혼돈과 공허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으로 오신 창조의 하나님, 질서의 하나님,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 기준, 내 판단, 내 방식대로 살아가다가 또 다시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매주 주 앞에 나올 때마다 또 다른 무화과 나뭇잎 옷을 지어 이정도면 됐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가리고, 외식하며, 자신의 수치를 숨기려 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당신께서 피흘림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원히 썩지 않는 옷을 입히셨습니다. 

그 은혜의 주님을 바라보며 숨기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다시금 주 앞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없는 내 기준대로의 삶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은혜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정하라고 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