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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용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사시기 6장 11-16절) 


홍해를 건너 요단강을 건너 드디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된다. 

사사기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분배하고 죽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여호수아- "모세가 죽은 후" 에 시작 

사사기 - "여호수아가 죽은 후"로 시작 


홍해를 건너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정복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까지 왔다. 

우리의 신앙 여정으로 표현을 하면 구원받아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면서 참 예배의 맛도 보고 순종하면서 평생의 기도의 응답도 받고, 신앙의 깊은 은혜도 체험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나에게 가나안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기도의 신비도 알고, 나름 신앙 생활 하면서 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리더도 되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행복한다. 참 안식이 있는가?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뭐가 잘못된 것인가? 


사사기서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나안은 가졌는데 정작 하나님은 잃어버린, 축복은 얻었는데, 정작 영적인 평안은 잃어버린, 기도 응답 받았다고 나름 뿌듯하고 만족했던 내가 어느날 보니 교만해지고, 삶은 게을러지고, 온갖 세상의 향락에 빠져 도대체 안믿는 자와 다른 것이 없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수 더 뜨는 그런 영적 타락의 극치에 빠진 그리스도인의 철저한 실패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이른바 하나님을 통해 복을 얻고자 했던 자들이 복을 얻자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기복신앙의 결말을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사사기이다. 

사사기서의 결론은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사사기서 1장은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자신 만만하게 가나안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로 시작된다. 

그런데 사사기서 끝부분을 보면 한 레위인과 그 아내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끝이 난다. 한 레위인이 첩을 얻었다. 아내가 아니라 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첩이 바람을 펴서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도망하게 된다. 그런데 레위인이 그 첩을 데리러 친정 베들레헴으로 간다. - 큰 줄거리를 보면 마치 호세아서를 연상시킨다.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은 호세아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는 듯.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지역- 레위인(에브라임) - 첩 (베들레헴) 

여인- 행음 -그런데 행음한 여인이 친정으로 간다. 

남편은 그 여인을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도대체 누가 행음을 한 것일까? 그 레위인은 과연 누구를 위해 예배하는 자인가? 미가의 제사장 사건... 


베들레헴에서 그 여인들 되찾아 돌아가려 하는데 장인이 붙잡고 하루만 더 머물게 하다가 먹고 마시면서 3일을 더 유하게 되다가 이제 레위인의 직무를 위하여 길을 떠나다가 중간에 베냐민 지파의 땅 기브아에 머물러 숙박을 하다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그 첩이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레위인은 그 첩의 시체를 12 토막으로 쪼개어 이스라엘 지파에 이 사건을 알리고 이로인해 베냐민 지파를 몰살하게 되는 사건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 하게도 사무엘서에 보면 바로 이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이 초대 왕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대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신앙의 흉내는 내는데 자기 생각대로 믿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 중에 이 사사기의 교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시대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각 시대마다, 지파에 맞게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신다. 

악한 그들이라도 구원의 손길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시대에 부름받은 자가 바로 사사이다. 


이번주와 다음주에 걸쳐서 사사기서를 대표하는 두 명의 용사로 불리우던 사사, 그렇지만 너무나도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사사, 기드온과 삼손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 기드온 

  • "또 짓는 죄" 

사사기 6장부터는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6장 1절이 어떻게 시작하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신앙생활 중에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죄. 우리의 자존감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갖게 만들어 관계를 깨뜨리고, 점점 마음이 완악해지게 하는 무서운 죄. 


하나님은 또 짓는 죄를 싫어하신다. 잘못된 습관.. 오늘 성경공부를 통해 나누게 될 잘못된 습관. 이스라엘의 잘못된 습관- 우상숭배... 그들의 잘못된 욕망의 결과, 불신앙과 불순종의 결과 -> 미디안 


  • 미디안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고나서 맞은 후처,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식이다. 그리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과는 먼 친척의 관계였습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갈 때에 미디안족속을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모세와 함께 가지 않았다.그들은 이스라엘 전체 민족에 비해서 작은 민족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그 보다 훨씬 강한 민족인 가나안을 정복하고도 지금 하나님 앞에 반복적으로 “또” 범죄하니까 미디안에게도 꼼짝 못하는 약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 부르짖음에 또 응답하시는 하나님 

결국 미디안의 손길이 이스라엘 전 민족에게 미쳤을 때에 이스라엘 전체 민족이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삿 6:6-7]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성경은 두 절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백성으로 말미암아 부르짖었음을 이야기한다. 반복해서 죄를 지어도 부르짖어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또 용서하신다. 부르짖는 자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사사기를 보면서 어찌 사람들이 이렇게 어리석게 또 죄 짓고, 또 죄짓고 그런가만 보지 그럴 때마다 그들이 부르짖는 것은 쉽게 넘겨 버린다.  

고난을 당할 때에 부르짖을 수 있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표시이고, 특권이고, 능력이다. 

문제는 고난이 왔는데도 부르짖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고, 고난이 왔는데도, 삶이 황폐해지고, 우울해지고, 영혼이 죽어가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목사로서 성도를 대하다 보면   저 분은 정말 기도해야 하는데 할 정도로 안타까운 처지의 성도들이 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열심히 믿는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위급한데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한다. 사시기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훨씬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꼭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사업이 망하고 시험이 떨어지고 해야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 영혼에 만족이 없고, 평안이 없고, 자꾸만 어두운 생각이 들어오고,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과, 좌절감이 몰려올 적에 그러한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자녀답게 살게 해 달라고, 사명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 다시 정욕과, 탐욕과, 습관적인 죄가 나를 엄습할 적에 내 영혼이 강건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부르짖음의 응답 - 기드온 


  • 기드온 

기드온은 어떤 자였는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 자 (11절) . 왜? 미디안 족속이 두려워서…. 

원래 밀은 타작마당과 같은 큰 장소에서 황소를 끌고 다니며 타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미디안 몰래 포도주틀과 같은 작은 기계로 조금씩만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어떤 자였는가? 므낫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약한 자. 

믿음도 별로, 집안도 별로, 그 집안 중에서도 더욱 연약한 자. 

그를 가리켜 무엇이라 부르셨는가? 너는 큰 용사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12절) 

이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를 통해서,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정말로 함께 하신다면 강한 용사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함께 하는 것이 너의 힘이다. 


물고기 낚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올라 "내가 너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75세 된 자식 없는 노인 아브라함에게 "네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나이 80된 목동 모세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라!" 

불구자 에훗을 통해, 여선지자 드보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어떻게 "내가 너와 함께 함으로..." 

갈렙이, 여호수아가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린 큰 용사다. 큰 용사는 다름아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이다. 


  • 사사기 7장 미디안과의 전투 (9절- 18절) 

본문 9절은 "그 밤에"란 구절로 시작된다. 그 밤은 어떤 밤인가?  

기드온이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과 몇가지 사연을 거쳐서 미디안 족속과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모으니 3만 이천명 정도가 모인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보시고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들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여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사 7:2) 하면서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 보내니 2만 이천명이 돌아가고 만명이 남게된다. 지금 미디안 병사의 숫자는 자그만치 13만 5천명이다.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 가나안에 취해서 힘으로,  돈으로, 빽으로, 하려 했던 세상의 방법을 제거하시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돌아가도자 하는 자, 신앙으로 이기지 못할 자를 돌려 보내니 만명이 남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이 아직도 많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서 개처럼 핥아서 마시는 자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또 다 돌아가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가가 무엇입니까? 고난을 주어서 허겁대고 물질에 넘어가고, 세상에 무릎꿇는 자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그만치 9천 700여명이 돌아갔다. 3만 2천명 중에서 3만 천 700명이 다 사라지고 300명만 남은 것이다.  

자꾸 줄이기만 하시는데 여러분 기드온의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그리고 미디안을 치라고 연약한 자 기드온을 불러놓고 자꾸 힘을 실어도 모자란데 하나님께서 너무 많다.. 줄여라. 더 줄여라... 하면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들을 자꾸만 없애고 줄이고 하실 때 그런 상황을 내가 겪는다고 생각하면 난 과연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밤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라는 말씀이다.  

- "그 밤은" 내가 의지하는 것을 모두 내려 놓는 시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내게 다가오시는 시간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어려움과 고난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제 의지할 것이 없냐? 이제 내가 너의 써포터, 돕는자, 심부름꾼이 아니라 너의 주인, 너를 다스리고, 너를 인도하는 구원자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변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점입니다. 인간적인, 세상적인 관점이 바뀌어서 영적인 관점, 믿음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 속에서 세상적인 관점, 세상적인 기준에 대해서 세뇌당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실력만큼 사는 것이 최상입니다. 가장 잘 되었을 때가 그렇습니다, 자기 그릇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나에게 맡겨진 것만을 하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의 인생, 찌질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 믿음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꿈꾸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믿음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은 자기 인생의 크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기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던 인생이 열정을 품게 되고, 안된다고만 여겼던 것들을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도저히 상식밖의 일을 명하십니다.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라. (16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1) 나팔 :

  • 이스라엘의 전쟁은 항상 나팔을 분 자들이 가장 앞에 섭니다. 나팔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망권세를 멸하시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며 외치며 진격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기드온의 명령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기준과 잣대로 부정하게 적용했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듯 이들은 기드온의 말을 듣고 순종하며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그것이 곧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시간 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에게 순종하며 나아갈 때 전쟁은 승리합니다. 


2) 빈항아리

항아리는 담는 것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항아리는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 영혼입니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우리 마음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빈항아리를 가져오라 명하십니다. 내 욕심, 내 판단, 내 기준 다 버리고 오직 순종하는 빈 마음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와서 그 빈항아리를 깨뜨리라 하십니다. 부스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숫자를 의지하고, 약을 의지하고, 환경만을 의지하는 가득찬 항아리를 비우고 가져와서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 "항아리가 뭘 뜻하죠?" 하고 묻는데, "넌 거기에 뭘 담고 싶니?" 라고 되물으신다. 항아리에 무엇을 마실까...의 물을 담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무엇을 먹을까...의 양식을 담는 게 아니라, 항아리에 횃불을 담으라신다. 횃불은 성령입니다. 내 두려움과 내 욕심과 내 기준을 버리고 그 속에 성령의 기름, 성령의 충만, 활활 불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기도로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대로 너희도 그리하여....(사 7:17절) 


기드온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그는 연약한 자였고 소심한 자였다. 미디안이 무서워 숨어서 자기 먹을 것을 타작하던 자였다. 

군대가서 화장실 가서 초코파이 먹던 모습처럼...


가나안에 들어가 오히려 가나안을 정복하지 못하고 가나안의 노예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기드온을 택해서 큰 용사가 되게 하셨다. 

신앙인들이 실질적으로 의지하던 힘과 숫자와 물질을 철저히 버리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게 하셨다. 


2013년 이 설교를 첫 준비하면서 묵상햇던 글을 읽어 보았다. 

"자꾸 숫자에만 눈이 간다. 내가 이겨야 할 숫자. 내가 감당해야 할 숫자. 내가 살아야 할 숫자. 내가 써야만 하는 숫자. 내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숫자...." 

자꾸만 숫자에만 눈이 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 숫자를 없애신다. 계속 줄여나가신다. 숫자를 보면서 절망하고 숫자만을 위해 기도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내겐 믿음이 없는 것일까? 헛된 믿음만 있는 것일까? 믿음이라 여겼던 고집만 있었던 것일까? 사라지는 숫자를 보면서 입술이 타고 믿음이 타고 마음이 탄다. 하나님, 내 눈에서 숫자를 지워주세요. 숫자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네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숫자를 지워 주세요.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세요..." 


그땐 정말 한 주 한주를 버티는 것이 믿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졌다. 

숫자가 많아지니 숫자가 날 시험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적은 숫자를 가지고도 시험하시고 때로는 큰 숫자를 가지고도 시험하신다. 

내 믿음을 보기를 원하신다. 


큰 용사는 크던 작던 숫자가 아닌 하나님을 보는 자다. 

믿음으로 숫자를 극복하는 자다. 

적은 숫자에 민감한 자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잊고 

큰 숫자에 민감한 자는 교만함 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린다.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불신앙이고 

교만함 가운데 잃어버리는 것이 불순종이다. 


예수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가나안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편안하신가? 기쁨이 충만하신가? 

그렇지 않다면 난 사사기서의 백성들처럼 사는 자들이다. 

가나안은 얻었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내 뜻대로 신앙생활 하는 자다. 

신앙 생활을 흉내는 내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사라져 버린 죽은 신앙인이다. 


큰 용사여,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자!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