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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기쁨 (빌립보서 2장 1-4절)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나 만나지 않았을 때에 그의 삶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는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이끌리어 수동적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앞장서는 사람, 능동적인 사람, 진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생명체로 말하면 생동감이 있는, 꿈틀거리는, 원기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순종의 사람' 하면 수동적인 사람을 연상합니다. 

'자기 부인'하면 철저히 말 잘 듣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성세대가,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 버리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말잘듣는 사람을 원합니다. 

부모 말 잘 듣는 사람, 선생님말 잘 듣는 사람, 나랏님에 반대하지 않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잘 순응하는 국민, 목사에게 반대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성도...

그런데 그런 사람이 모범생인줄로 알다가 부모말 잘듣고 위에서 시키는 일만 잘 하다가 나중에 가면 왜 창의력이 없냐고, 왜 넌 능동적이지 못하고 늘 시키는 것만 하냐고 말을 합니다. 열정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사회가 자기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종 엘리에셀을 시켜서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했을 때에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만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물물에 여인들이 물길으러 올 때에 내가 물을 구할 때에 내가 마실 물만 줄 것이 아니라 내 가축에게도 물을 주는 여인을 하나님이 인도하신 사람이라 여기겠습니다. 

이삭하면 누구입니까? 순종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재물로 바칠 때에도 반항하지 않고 순종했던 자녀였습니다. 이제 그 순종의 자녀의 배우자를 구할 때에 현명했던 종 엘레에셀은 순종을 넘어 배려하는 여인, 열정있는 여인을 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순종을 강조합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그 순종마져도, 자유부인마저도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맴목적인 순종이 아닌 네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이 행하신 것과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의 지혜가 나 보다 낫고, 그 분의 말씀이 내 생각보다 높으며, 그 분의 인도하심이 내 가는 길보다 완전함을 안다면 이제 내가 주장하는 삶이 아닌 그 분께 맞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순종, 기독교의 자기 부인은 맹목적인 순종, 맹목적 부인이 아닌 자기를 긍정하고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나보다 하나님의 길이 완전함을 깨닫고 드리는 체험의 결과, 깨달음의 결과, 순복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하기 전에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능력과 말씀과 치유와 회복과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먼저 보이시고 나를 이제 알았거든, 인정했거든, 체험했거든 이제 나에게 너의 인생을 맞겨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의 열정은 남을 죽이고 나를 높이는 열정, 흔히 말하는 세상의 열정, 야망,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죽어도 유익하다.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난 사는 것을 확신한다. 

자기 중심적인 열정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타인 중심적인 열정으로 바뀝니다. 그의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보통의 신자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 우리의 열정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하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특권이지만 만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어디있느냐며 그 영적인 싸움에 동참하고 지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로서 여깁니다. 내 믿음의 성장을 위한 꼭 필요한 코스로서 받아들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의 고정적인 믿음과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단지 죄의 결과로만 알았지 내 믿음의 성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통로로서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서 실재적으로는 십자가를 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죄인의 고난은 당연한 죄의 결과지만 의인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해, 구원받을 자를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의 더 깊은 온전함을 위해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력은 고난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난을 피해서가 아니라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으로 마쳤던 1장에서 2장은 다시 그리스도인의 기쁨으로 돌아옵니다. 

1-4절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4절의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입니다. 


그리고 충만한 기쁨을 위해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2절의 "한 마음을 품어라"

또 하나는 3절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3절의 말씀도 한 마음을 품기 위해 꼭 필요한 마음이기에 교회 안에서 한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충만한 기쁨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충만한 기쁨을 위해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까? 반대로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하나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떄나 지금이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 한마음을 품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분열되고 전쟁을 치루기도 하고, 그 상처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까지도 교회를 멀리하며 또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유두고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 은혜를 받고 열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두 여인이 바로 교회의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는 것입니다. 이 두 열심이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으르릉 거리니까 성도들도 나뉘어져서 분열된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위문하고, 헌금을 가져다 주면서 사랑으로 섬기는 데에 그렇게 열심히 헌신해도 여전히 분열되어 충만한 기쁨에서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되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헌신의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3절)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맣고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라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그러니까 그들은 어떻게 일했다는 것입니까? 

거꾸로 해석하면 그들의 현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툼으로 일하고 허영으로 일했습니다. 각자가 자기가 다 낫다고, 자기 신앙이 더 맛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외면하고 자기 일만 돌보았습니다. 


'다툼'은 경쟁심리입니다.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데 항상 경쟁상대를 의식합니다. 베드로가 항상 요한을 염두에 두듯, 사울이 다윗 때문에 인생을 망치듯, 유오디아는 순두게를, 순두게는 유도디아를 거슬려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만 보여야 하는데 사람이 보입니다. 경쟁상대가 보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어찌 영광받으시겠습니까? 

허영이라는 것도 남들을 의식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인정되고, 사람들이 자기 한 일을 좀 알아주고...그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텐데 그 영광을 자기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이 허영심이라는 것입니다. 허영심이라는 말이 어디서씁니까? 

어떤 옷을 입고 있고 어떤 핸드백을 매야 자기 가치가 높아진다고 하는 생각---이런 것들을 허영심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에 메이커를 붙이려는 것- 성경은 허영심을 헛된 속임수, 또는 헛된 영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직책이, 자리가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면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 가치를 그 정도밖에 취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물보다 뛰어난 존재로 만드셨는데, 자신은 고작 명품 하나 값에, 메이커에, 물질과 돈과 자리로 자기 가치를 메기려 하니 그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도 항상 초점은 '자기'입니다. 자기가 인저받아야 하고 자기가 높아져야 하며 자기가 돋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높아지면 질수록 누가 낮아집니까? 

다른 사람들이 낮아지고, 결국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낮아집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고, 비난하고, 비아냥 거려도,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이라면 난 기뻐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난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입니까? 나 중심적인 사람입니까? 

아무리 열정이 있고 은혜를 받았고, 체험이 많아도 이 자기 중심적인 모습이 사라지지 않으면 외적으로 나 때문에 주위가 분열되는 것이고, 내적으로는 내 기쁨이 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낫게 여기는 것- RE-SPECT : 눈높이를 맞추라. 다시 보라. 밑에서 바라보라.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 꼭 필요한 것. 

왜? 인간은 내려다보기를 원하기 때문에...그것이 죄악의 본성. 판단자가 되고자 한다. 재판관이 되고자 한다. 

마실 문화/ 남 얘기 하면서 시간보내는 것. 결국 판단과 정죄로 소문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낮은 인간으로 오신 것

삭개오- 예수님이 그를 바라다 보시며....너도 내려와라...함꼐 거하자! 


주보 한줄 묵상에 올렸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속의 문구

"여러분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낮게 두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 위에 두면 엄청난 해가 닥쳐 올 것입니다. 평화는 늘 겸손과 함께 있습니다. "

겸손은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나를 평안하게 한다. 갈등을 없앤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런데 교만하면 갈등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다. 기쁨이 사라진다. 


  • (빌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이럴 때에 교회는 힘을 얻습니다.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기쁨은 내 신앙만 좋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가족들이 환영해주지 않고 화목하지 않으면 그 성공은 허무한 것입니다. 너무 좋은 일이 생겨서 잔치를 차렸는데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 잔치는 망한 잔치입니다. 기쁨은 공동체를 통해서 옵니다.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되는 구절이 바로 1절입니다.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해석을 잘 해야 되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네 개의 조건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너희들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격려, 혹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면

성령과 함께 교제한 적이 있다면

믿음 생활 하면서 남을 불쌍히 여기거나 부드럽게 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면....


이것은 너희에게 이것이 없다가 아니라 신앙 생활 하면서 이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무리 신앙이 다르고 체험이 다르다고 하지만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것들을 맛보지 않았는가? 

말씀 속에서 도전받고, 위로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예수 믿지 않거나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부드럽게 대한 경험이 있지 않으냐? 

그러한 경험이 있다면 아무리 다른 신학과 신앙의 내력을 가졌다 한들 우리는 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맛본 자들이다. 


그런 것을 맛본 교인이라면 다르다고 분열하지 맣고 마음을 같이 합하고, 그리스도의 한 사랑 안에 있음을 깨닫고 뜻을 합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힘쓰라.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꼐 영광되는 삶을 살게 되니 우리 안에도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랑도 있었습니다. 열정도 있었고 체험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불화가 있으니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되지 못하니 부흥이 없었습니다. 가장 은혜를 체험한 유오디아와 순두게게 동시에 분열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기쁨은 하나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되지 못하면 십자가의 은혜마져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죽기 까지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서로를 낫게 여기라 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열심만 있어서 안됩니다. 방향을 잘못잡은 열정은 죽이는 열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한마음, 한 사랑으로 하나되는 로고스 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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