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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 설교 (사도행전 16장 25-26절) 


사도행전 16장의 기사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자신의 계획하지 않은 땅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도착한 땅- 마게도냐의 첫 번째 도시 빌립보

    자신의 계획 - 1차 선교여행지를 되돌아 보자! (자신이 친숙한 땅 아시아-> 전혀 알지 못하는 마게도냐 땅으로 인도) 

거기서 옷감장사-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세탁소를 운영하는 루디아를 만나 그 집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 


2. 그 곳에서 점 치는 한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서 "이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고 며칠이고 소리치며 다님. ->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외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심히 괴로워 했을까? 

그녀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 아닌가? 

오히려 귀신 들린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며 선전하는 것은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심히 괴로워 했을까? 


바울 뿐만 아니다. 예수님도 공생애의 때에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가 다가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하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곧 귀신을 나가게 합니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건 그 말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구주가 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화려한 미사여구요 공치사일 뿐입니다. 

주의 종이 세상의 이런 칭찬과 공치사에 취하게 되면 겉으로는 인정받는 것 같지만 아무런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3. 귀신들린 자가 나오자 주인은 오히려 화를 내고 신고하여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갇히게 한다. 

귀신을 쫓는데 왜 그들을 감옥에 갇히게 하는가? 그들은 구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요, 물질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귀신의 정체요, 또한 세상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건,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건 그것은 딴 세상의 이야기이지 자신들의 이익을 해하면 그들이 누구이건 대적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군대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쫓았을 적에 그 마을 사람들은 귀신 쫓은 자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귀신과 함꼐 멸망당한 돼지로 인해 예수를 몰아낸다. 


그런 세상의 공치사에 빠져 안일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떨어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타협하지 않은 신앙의 결과는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습이라 하며 복음을 거부합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자들 앞에서 복음은 받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할 길입니다. 


4. 그러나 그 감옥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많이 맞았고, 그들의 발은 차꼬에 체워졌고 간수들이 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은 듯 합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자유를 제한 받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을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감옥 속에서도, 쇠사슬에 매인 채로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찬양은 죄수들의 영혼을 울리고, 감옥의 문을 열며 간수장들을 얼어붓게 합니다. 

간수가 바울과 죄수를 가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바울과 실라가 간수장에게 살 길을 제시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31절) 


  •  추수감사절의 유래 

종교개혁이 형식적인,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신앙의 순수 회복 운동이었다면, 영국에서는 신앙의 순수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좀 불편한 형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1534년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하기 위하여 여왕인 가타리나와의 이혼을 승인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를 열어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형식은 그대로 가톨릭을 따르나 가톨릭으로 부터 분리되어 이른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기나 형식이 신앙의 회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순수한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청교도라 불리며 완전한 신앙의 회복 운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교회를 공고히 하고자 한 국왕은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가톨릭 교도나 청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하고 청교도들은 국가의 핍박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승무원 6명과 남자 72명, 여자 29명, 100여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1620년 메이플라오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먼 미국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배를 타고 이런 긴 항해를 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100여명의 사람들이 긴 뱃여행을 시작해서 65일만에 11월 9일 미국의 동부 메사추세츠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사이 배 속에서도 어쩔때는 하루 2-3명씩 끊임없이 죽어나갔습니다. 뱃속에서도 뱃멀미니 건강악화로 시달리다가 꿈에 그리던 땅에 도착했더니 그곳 사정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곧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식량난과 굶주림으로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첫해 겨울을 지나는데 죽은 숫자가 50명이 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또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어찌 눈물바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그들은 또 땅을 경작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심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가을 그들은 풍성한 수학을 거두며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50 여명 남은 청교도들은 한해를 돌아보며 먼저 죽어간 이들을 기리고, 또한 그들의 농사를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대했습니다. 90여명의 많은 인디언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들새를 잡으러 나갔는데 다행히 많은 칠면조를 잡아 그들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 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이 바라던 신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국을 떠나는 믿음 -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믿음... 
  • 그런데 그 신앙의 여정은 고난의 여정, 고통의 여정, 죽음의 여정... 
  • 그런데 그 여정 끝에 드리는 감사와 나눔의 예배가 바로 추수 감사절이었다. 
  • 그들은 무엇을 감사했을까? 죽은 사람들을 기리며 어떻게 슬픔을 극복했을까? 
  • 그런데 그들은 그 와중에 예배 했고, 그 와중에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랑을 나누었고, 그 슬픔 중에 기도하며 찬양했다. 
  • 그것이 미국의 개척정신을 나았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며 이길 수 있는 마음... 감사의 마음. 행복의 마음, 도전의 마음.. 


감사는 상황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다. 공치사가 아니라 하나님 신앙의 적극적 표현이다. 주보에 실린 글. 

우리 삶에 감사가 없다면....행복이란 없을 것이다. 감사는 곧 행복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고난 중에 기적을 잉태게 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