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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창세기강해)

창 4:16-26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by 소리벼리 2022. 2. 12.

창 4:16-26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땅의 소산으로 살던 가인이 아젤을 죽이고 땅의 저주를 받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삽니다. 

유리하는 자라는 것은 고향을 잃어버리고, 살 처소가 없는 인생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을 "본향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우리는 때로 길을 잃어버리고, 넘어지고, 때로 시험에 들진 모르지만 탕자처럼 돌아갈 집, 아버지 집이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자가 곧 유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본향을 잃어버린 가인을 위해서도 "죽임을 면하는 표"를 주셔서 그를 보호하십니다. 집 떠난 자식이라 할지라도 긍휼을 나타내십니다. 

죽임을 면하는 표를 주신 하나님의 심정은 아마도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일 것입니다.

더 이상 유리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납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했던 가인이 이젠 "여호와의 앞"을 떠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앞을 과연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앞을 떠날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내 앞에 있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의미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차"는 도망하다. 피하다의 의미입니다. 

 

"놋"땅에 거주했다는 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왜냐하면 "놋"이라는 의미가 유리하다. 방랑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17절)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더라 

 

고향을 잃고 방황하던 가인이 "에녹"을 낳습니다. "에녹"의 의미는 "새롭게 시작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성을 짓고 거기서 새 삶을 일구어 나갑니다. 

 

그가 지은 아들의 이름 "에녹",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 아들의 이름으로 지은 성은 무슨 의미로 시작된 성입니까? 

 

성을 쌓았다는 뜻은 "자기 영역을 만들었다"라는 말입니다. 그 곳의 주인은 자기입니다. 또한 울타리를 침으로 다른 존재의 출입을 막습니다.

"성" "굴" "탑" 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이 없이 자기가 주인된 삶,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만을 위한 처소.

아들을 낳자 가인은 아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 없는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공간 -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시간이 처음엔 두렵고 낯설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그 안에서 즐거운 안식을 얻는 듯 합니다. 

이랏에서 므후야엘, 므드사엘에서 라멕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만의 왕국이 세워지는 듯합니다.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니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더라.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파괴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 히브리 원문대로 직역하면 "라멕이 자신을 위하여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만을 위한 성을 짓다보니 점점 자기 욕망을 위한 성이 됩니다. 

그리고 두 아내로부터 나은 자녀들은 각각  

가축을 치는 자 (야발), 수금과 퉁소 잡는 자 -> 음악인 (유발), 두발가인 (기구 만드는 자)

로서 이른바 "문화와 문명"의 시조가 됩니다. .

 

에덴 못지 않은 완전한 왕국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문명으로 삶은 정착되고, 더욱 편안한 문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23절에 가서야 그 결과가 드러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ㅜ

 

잘 해석해야 할 문장입니다. 

어느날 라멕이 두 아내를 불러 말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라멕에게 한 말입니까? 라멕 스스로가 아내들에게 한 말입니까? 

가인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여놓고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신 가인을 죽인자는 벌을 칠배나 받을지어다라는 말을 자기 맘대로 확대해서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에게, 아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며 성을 짓던 라멕은 자기 성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며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나를 죽이는 자는 벌이 칠십 칠배가 될 것이다.   자신이 죽으면 누가 벌을 내립니까? 

 

여기서 역사가 끝났으면 소망없이, 아무런 빛없이 세상은 절망을 향해 가지만 가인이 스스로 성을 짓고 하나님 없는 왕국을 쌓을 때에 하나님은 멈추지 않고 또 일하십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에녹성을 짓고 하나님 없는 그만의 왕국을 세우려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또 다른 씨- 바로 노아로, 노아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새 역사를 준비하십니다. 

 

셋 - 대신 두다, 마련하다 

에노스 - 사람, 연약하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 여호와께 말을 걸기 시작하다. 기도하다. 예배하다. 

 

 

라멕의 말: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다." 원가 비슷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사야 53장 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하나님 없이 자기 성을 쌓는 가인과 그의 후손 라멕- 스스로 하나님 되어 사는 것 - 얼마간은 그것이 평안한 것 같고 견고한 것 같지만 하루 아침에 죽음의 장소, 사망의 장소가 된다. 

어떤 실패에도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 

 

어떤 시작을 할 것인가? 하나님 없이 자기 성을 쌓는 시작을 할 것인가? 

새마음으로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