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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맡긴 사명 (고후 4장 1-7절)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로 잘사는 도시였습니다. 국제적인 운동장이 있어서 올림픽과도 같은 경기도 하고 학문도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18개월간 머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특별히 평신도의 신앙이 잘 발달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서 하면 성령장, 사랑장이 있듯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에서 가장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은사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은사가 많은 대신 항구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향락문화 또한 잘 발달되었고 때문에 문란한 일들이끊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유난히 갈등과 분열이 심히 많은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분파를 만들어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나누어 싸웠고 평신도의 기세가 강했기 때문에 좀처럼 리더들에 대해서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가 무슨 사도냐? 그는 왜이렇게 말주변이 없냐? 그는 왜 이렇게 못생겼냐? 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2대 목회자로 세워졌던 사람은 아볼로 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또한 말을 누구보다 잘하는 웅변가였습니다. 처음에 아볼로의 말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겐 성령의 충만함이 없고 은사가 없다 하면서 아볼로를 쫓아냈습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권면하면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의 삶의 수준이나 신앙의 수준은 높아서 경제적이나 지식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성령의 은사도 활발한데 비해 그들의 삶에는 문제나 스캔들이 끊이질 않고, 또 그들 사이에 분쟁이나 갈등도 끊이질 않고, 또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세워진다 해도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도 만족을 하지 못하고 아볼로에게도 만족을 못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베드로가 왔다해도 갈릴리 어부 출신이라 만족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좀 더 수준높고 부족함이 없고, 그들보다 월등히 낳은 그런 지도자를 찾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기대를 맞추는 지도자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과 및 동역자들의 자세와 변론을 하는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이 직분, 전하는 자의 직분, 가르치는 자의 직분을 받아 우리가 주로 부터 긍휼하심을 입었듯이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지 않을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하는 말이 결코 속이는 말이 아니요 오직 진리를 나타냄을 2절을 통해 증거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시하건 하지 않건 자신과 및 동역자들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5절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5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고후 4: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만약 복음이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라면 누가 떳떳히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진리를 7절의 유명한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는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가 됨이요, 질 그릇은 무엇입니까? 바로 연약한 우리 자신들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그릇을 빚고 유약을 바르지 않은 그릇입니다. 즉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왜 그런 그릇에 보배를 담습니까? 

능력이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논문을 쓰는데 한 마디의 내 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권위있는, 믿을 수 있는 저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말에 신빙성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했더라도 더 유명하고, 더 권위있는 학자의 글을 인용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또 찾습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자격이요, 신뢰성이요, 권위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성도들도 좀더 많이 배우고, 좀 더 믿을 수 있고, 좀더 권위 있는 목사님의 말을 들으려 합니다. 또 목사는 그런 성도들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 타이틀을 중시하고, 외모에도 신경쓰고, 어떻게 해서든지 권위를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어떨까요? 

[눅 2:8- 11]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 

역사상 이 사건 보다 더 파격적이고 새로운 사건이 있을까? 왜 이 사건이 파격적이고 중요한 사건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말씀하신 대로 이 소식, 이 뉴스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구에게만 중요한 사건,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좋은 소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11절의 말씀은 이 좋은 소식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눅 2: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 바로 지금, 다윗의 동네, 그들이 살고 있는 바로 그 땅에, 너희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구원자, 바로 지금, 바로 이 땅에 나를 위해 메시야가 오셨다. 구원자가 오셨다. 


사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의 오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주로 율법이 중심이 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나심을 뒷받침 하기 위해 유대인의 족보를 이야기 하고, 동방박사와 헤롯 대왕의 입을 빌려 예수의 나심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보다는 남편 요셉의 꿈을 이야기하며 좀더 남성중심으로, 율법과 족보를 통해, 또 지식과 권력의 사람들을 통해 예수의 나심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 소개되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을 말합니다.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던 제사장 사가랴의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굳게 닫히고 반면 가브리엘의 소식을 듣고 이를 굳게 믿고 찬양했던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으로 부터 칭찬받은 이야기, 그리고 시므온이라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한 사람, 안나라는 과부 선지자의 이야기...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목자들의 이야기...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바와 같이 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의사입니다. 또한 이 글은 데오빌로 각하라는 당시의 권력자에게 복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했던 어쩌면 보고서적인 기록입니다. 

누가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사실을 중시했습니다. 의사로서 과학자와 같은 눈으로 있는 그대로, 꾸미지 않고 기록하여 보고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그런 증거들...

마리아의 꿈이라던지,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중심에 나와 있는 가장 중요한 소식.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오늘 이 땅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전한 목자들...

누구하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상 가장 믿기 힘든 일을 증거할 증인들로서 별로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믿기 힘든 사건을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하셨다! 

unbelievable news를 unreliable한 사람에게 맡기셨다! 

우리는 이런 일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도 아니고, 무언가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전혀 신뢰받지 못하는 그런 여인을 통해 부활의 소식을 알렸던 이야기...

요한복음 4장에 전혀 신뢰받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내가 메시야를 보았다"며 마을을 뒤흔들었던 이야기....

예수의 삶을 당시 가장 소외되고 믿을 수 없었던 갈릴리의 어부들을 통해 증언케 하신 열두 제자들을 통해 전파된 이야기...

어쩌면 신약성경의 모든 일들은 이렇게 가장 믿기 힘든 일들을 신뢰받지 못한 자들을 통해 전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목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목자들 하니까 어감이 좋아보이지만 이 단어를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름으로 바꾸면 어감이 확 달라집니다. 

목자를 뭐라 부릅니까? 양치기...양치기 소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죠.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하고 하도 거짓말을 하니까 정말 늑대가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이 전혀 믿지 못하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

어쩌면 목자들의 이야기는 그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 만큼이나 신빙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나심은 한 명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명의 목자들...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자들의 여러 입술을 통해 증거된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방법을 가리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 표현합니다. 


(고전 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믿을 수 없는 양치기라도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이면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열두 제자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목자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을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그저 나에게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를 자랑하고, 성도들을 자랑하고, 무엇보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나같은 자에게 맡기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그 놀라운 이야기,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한 자들의 증언이 바로 성경이고, 그러한 자들의 활동이 기독교의 역사이고, 그러한 자들의 사는 이야기가 바로 간증입니다


하늘의 천사와 주의 사자들은 예수의 탄생의 증인으로 목자들을 택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나 요한이 아닌 막달라마리아 같은 여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들고 그들은 그들에게 임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광고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이 믿건 말건, 외면하건 반기건 주가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고 고치신 일들을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가장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을 저희들의 입술에 맡기셨습니다. 


바울이 말한 질그릇은 첫째는 자기 자신 입니다. 

자기 자신도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말들을 계속들으면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화가 나고 역정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 앞에 오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를 어떻게 처음 만났습니까? 

바울을 만난 예수의 첫번째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를 핍박한 자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조금 아프다고 역정이 납니다. 

사랑하기 싫다고 합니다. 

예수는 날 위해 죽었는데 난 조금 아픈 것 같고 무너지기가 일수 입니다. 

예수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예수의 십자가 안에 자기를 묻습니다. 

그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고후 4: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 그렇습니까? 예수 앞에 나오면 그 앞에 어떤 어려움도 핑계 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모든 핑계가 날 위해 지신 십자가 앞에서는 변명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질그릇은 또한 자기가 사랑해야 할 모든 형제들입니다. 

그들 또한 나 때문에 상처 입습니다. 

그들이 찌르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상처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름부터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버리고 할퀴고 아픔을 주었기 때문에 쓴 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알면 불쌍해 집니다. 

긍휼함이 생깁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치료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습니다. 

주인잃은 고양이가 새 주인의 사랑으로 다시 야옹거리며 활동하듯이 상처 입은 영혼 우리 믿는 자들 안에서 치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교회의 목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쓸모없고, 깨지고 깨지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는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보배 때문에 우리는 존귀해 진 것입니다. 

이 보배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쓸모없어 집니다. 

보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처럼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런 질그릇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우리 질그릇에게 보석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외모를 따집니다. 

(고후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그런데 그런 기준은 아무리 맞추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를 때도, 다윗을 부를 때도 그들이 준비가 되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기에 연약한 자를 통해 실패없이 사용하십니다. 복음을 자격있는 자에게 맡겼다면 누가 그 복음을 맡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이 복음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질그릇같은 우리에게 임할 때에 질그릇도 쓰임받는, 하늘의 빛으로 빛나는 귀한 그릇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데에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교회를 자랑하는 데에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합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