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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 4:7-10절)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지진? 테러? 경제공황? ...


그런 것들도 물론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 우울증과 두려움과 혹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닫게 만드는 것...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점점 그런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는 좋은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뢰가 안간다는 것입니다. 

혼자 성경읽고 기도하면 은혜가 넘치는데 교회가서 사람만나면 누구누구 어떻더라부터 시작해서 서로 할퀴고 싸우고 하는 일들때문에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왜 받습니까? 

영혼구원때문에 받습니까? 그럼 영혼 구원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을 이룬 것입니까? 


영혼구원은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심을 믿고 그 분을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나의 회개와 고백, 그리고 신앙의 결단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았으면 이제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구원 받기 위해서,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날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서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화목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그 전의 삶에서 분리가 되고 성결해 지면서 함께 사귀던 사람들이 떨어집니다. 

구약의 거룩의 의미는 그래서 구별입니다.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해집니다. 

물이 고여 있으면 썩듯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따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희희 낙낙하면 금방 타락이 찾아옵니다. 

성전 지었다고 만족하면 금방 유혹이 찾아옵니다. 머무르면 썪습니다. 


거룩해 진 사람은 다시 밖을 향해야 합니다. 

형제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 사랑받는 것, 다 쉽지 않습니다. 


예) 주인으로 부터 버림받은 개와 고양이들의 이야기... 

한 번 버림 받은 기억이 있는 동물들.... 

사람들을 피합니다. 빛을 싫어합니다. 

어두 컴컴한 곳만을 다닙니다.  그리고 사나와 집니다. 

사람이 다가가면 짓고 피하고 도망가지 않으면 할퀴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면 영영 사람을 기피하게 됩니다. 

누가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그들을 버리고 간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개와 고양이를 다시 사람과 가까워지게 하려면 희생이 필요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다가가서 공급해주고 쓰다듬어 주고 함께 있어줘야 합니다. 

하물며 동물들도 그렇게 오랜 기간 인내를 들여 사랑을 주면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우츠프라카치아

예전에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설교하면서 소개했던 식물. 

결벽증- 한번 다른 생명체가 손을 대면 점점 시들해지다가 결국 죽는다. 아름답지만 만지면 서서히 죽어가는 식물. 

그런데 한 학자의 끊질긴 실험끝에 매일 매일 만저주고 물을 주면 결국 더 잘 자란다는 사실, 

지나친 결벽증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던 이 식물은 오히려 한없이 고독한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고슴도치과의 호저: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워 다른 호저에게 다가가면 다른 호저의 가시털이 자꾸 자신을 찌른다. 그래서 며칠동안 혼자 지내게 되고 그러면 또 너무 외로워 다른 호저를 찾고 또 가시에 찔리고는 다시 혼자가 된다. 평생 이것을 반복하는 동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사람처럼 연약하고 때로는 악한 존재가 없습니다. 흔들리는 갈대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두 번째 편지. 

항구도시로 잘사는 도시

국제적인 운동장이 있어서 올림픽과도 같은 경기도 하고 학문도 발달. 

사도바울이 새운 교회. 18개월간 머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 

성령이 충만한 교회. 은사도 많은 교회


그런데 은사가 많은 대신 문란한 교회. 

갈등과 분열이 심히 많은 교회.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 


이제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가 무슨 사도냐? 

그는 왜이렇게 말주변이 없냐? 

그는 왜 이렇게 못생겼냐? 


아볼로는 대 학자. (말을 잘하는 웅변가) 

그런데 그도 무슨 이유로든지 고린도교회에서 쫓겨나 바울에게 피신,

돌아가라고 권면하는데도 돌아가지 않는다 


서로가 상처입고 상처주고 떠나고 남는 자들은 더 걍팍해지고... 


그런가운데 교회의 사명 - 서로 사랑, 세상을 밝히는 것. 


한없이 상처를 주고 받는 성도들에게,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 어떤 직분, 사랑하는 직분, 사랑하게 하는 직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왜 낙심하지 않느냐?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왜 가시가 돋아나는가? 

왜 쓴뿌리가 찌르는가? 

(고후 4: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 숨은 부끄러움의 일- 죄가 해결되지 않고 여전하기 때문에. 
  •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결국 하나님을 속이고 
  • 그러면서 삶의 열매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게 하는 것.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자, 결국 자기 중심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복음이 가리워 지는 세계. 그리고 그 영향력 안에 살아가는 나. 


깨지기 쉽고, 깨질수밖에 없고, 그리고 여기 저기 이미 깨져 버린 그리스도인의 삶. 호저처럼, 배반당한 고양이나 개처럼, 우츠크라파치아 처럼.... 사랑으로 다가갔지만 사랑으로 배반당해 더이상 다가가기 힘들어져버린 신앙인들의 모습.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점점 더 움츠려들고 낙심되고, 포기하고 싶고, 우울해질 때에..

(고후 4: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상처받는 나- 상처주는 나를 생각하면 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내가 전하는 상처입은 내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 분이 내 주인이고 그 분 때문에 나도 "너희의 종"이 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 


나 자신을 바라 볼때마다 넘어지지만 그 분을 바라보면 다시금 일어서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 예수그리스도의 능력,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말한 질그릇은 첫째는 자기 자신 입니다. 

자기 자신도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말들을 계속들으면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화가 나고 역정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 앞에 오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를 어떻게 처음 만났습니까? 

바울을 만난 예수의 첫번째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를 핍박한 자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조금 아프다고 역정이 납니다. 

사랑하기 싫다고 합니다. 

예수는 날 위해 죽었는데 난 조금 아픈 것 같고 무너지기가 일수 입니다. 

예수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예수의 십자가 안에 자기를 묻습니다. 

그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고후 4: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 그렇습니까? 예수 앞에 나오면 그 앞에 어떤 어려움도 핑계 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모든 핑계가 날 위해 지신 십자가 앞에서는 변명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질그릇은 또한 자기가 사랑해야 할 모든 형제들입니다. 

그들 또한 나 때문에 상처 입습니다. 

그들이 찌르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상처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름부터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버리고 할퀴고 아픔을 주었기 때문에 쓴 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알면 불쌍해 집니다. 

긍휼함이 생깁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치료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얻습니다. 

주인잃은 고양이가 새 주인의 사랑으로 다시 야옹거리며 활동하듯이 상처 입은 영혼 우리 믿는 자들 안에서 치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요, 교회의 목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쓸모없고, 깨지고 깨지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는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보배 때문에 우리는 존귀해 진 것입니다. 

이 보배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쓸모없어 집니다. 

보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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