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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광을 위해 (빌립보서 1장 19-30절) 


요즘 금요일은 디모데후서를, 주일은 빌립보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둘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이고 또한 감옥 속에서 쓴 글들입니다. 

빌립보서가 로마 감옥에 첫번째 갇혔을 때에 쓴 글이면 디모데 후서는 그 후에 또 다시 감옥에 갇혀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며 쓴 글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길 바울은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친근한 느낌을 주는 인물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책을 쓴 인물이지만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윗이나 요셉, 다니엘, 그리고 신약의 요한이나 베드로 보다도 훨씬 적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의 인물들은 고난을 겪기는 하지만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쩌면 거꾸로입니다. 

그의 시작은 창대함에서 시작하지만 끝은 너무도 힘들게 외롭게, 감옥 속에서 마감합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합니다. 

그는 삼층천 하늘도 다녀왔고, 모든 방언과 예언과 은사를 알고 맛본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예수 믿은 후 죽기까지 고난 가운데 살다가 순교합니다. 

어찌보면 그는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그는 표현이 강한 만큼 약점도 많고 인간적인 모습도 너무도 많은 사람입니다. 

다른 성경의 인물들(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배반을 하건 모욕을 하건 그런 사람들에 대해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상처 입은 이야기, "누구 누구는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으며, 그리스도를 떠났으며, 자신을 떠났다"등등의 구절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 대해 서운함도 표현합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도 안했으니 가족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 대한 서운함도 가감없이 표현합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에 상처를 안 입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순간 그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기댈 수 있는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에겐 성도가, 믿음의 동료가 그가 가진 유일한 위로처였습니다. 때로 그들은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들의 헌금에도 의지하고 그들의 기도에도 의지했습니다. 


19절: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줄을 아는고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더불어 성도들의 기도, 성도들의 도움은 이 세상에서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위로 였습니다. 

빌립보서를 지은 동기 중의 하나도 감옥에 갇힌 그를 위해 기도하는 에베소 교회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과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무 것에도 의지 할 것이 없는 사람만이 기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합니다. 세상에 기댈 것 없는 사람만이 성도들의 중보의 위대함을 경험합니다. 


뭐 기도제목 없어요? 하고 물어보면 "전 괜찮아요, 다른 사람 기도해 주세요.."하는 것은그 만큼 자기가 기댈 곳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기대었던 것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할 때 얼마나 당황하는지 모릅니다. 

성도는 기도로 살고 성령님과 더불어 성도들의 중보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목회자들 중에도 교회에게 짐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기 전문직업을 따로 가지면서 자기 생활비 자기가 충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것들이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직업을 가지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으면 성도들의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목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다른 많은 목회자들은 목사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성도들로부터 도움 받지 않으면 결국 그들이 어렵게 할 때에 내 팽겨 칠 수 밖에 없다. 교회와 목사, 성도와 목사는 사랑과 기도로 얽매여져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구약이나 신약이나 제사장들이, 선지자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자기 사명 안에서 떠나지 않고 거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머리 된 교회, 그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 외에 의지 할 때 많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 사실 예수를 만나기 전이나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의 삶을 바라보면 공통적인 그의 삶의 자세는 "열정"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도 그의 신념에 따라 열심히 사는 자였습니다. 

그는 부지런한 자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당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말리아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학을 받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도 획득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금수저 인생이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학교 들어가 미국 시민권도 따고 부러울 것 없는, 성공의 평탄 대로를 겪는 인생이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게으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노력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의 열심의 끝, 그의 열심의 목적은 무엇을 향하고 있었나? 

가까이는 그 자신의 성공을 향하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결국 예수를 핍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인생을 남을 죽이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들을 희생시키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의 현장에 그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리에 있었으며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를 만난 예수는 바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하고 아무리 성공해도 남을 죽이는 인생을 행복한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남을 꺾고 무너뜨리고, 정복하고...이것이 성공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바울의 열정을 자신을 위한 열정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교회를 위한 열정, 성도를 위한 열정으로 바뀝니다. 

자신을 위해 가치있게 생각하던 가문, 학교, 자신의 자랑거리는 이제 뒤에 남겨지고 그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살리는 데에 그의 삶을 바칩니다. 

예수 믿는 다음 그의 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의 인생은 살리는 인생입니다. 

교회를 살리고 성도를 살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살리는 삶을 삽니다. 살리기 위해 그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삽니다.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자신의 자랑을 죽이고, 자신의 육신을 죽입니다. 

예수 만나기 전, 그의 삶의 목적이 자신을 높이고 가꾸는 것이였다면 예수 만나고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난 죽는 것도 유익하다." (21절) 내가 죽을 수록 그리스도가 사니 유익하다...

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아직 전도해야할 사람들을 위하여 유익하니 내가 살아야 되는 이유는 바로 너희의 유익을 위해서다. (23-24절) 


그는 삶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말씀을 보는데 너무 부끄럽습니다. 내 소망과 기대... 말로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인데...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가 잘 되고 싶어하는 생각... 내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생각... 사도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게 살고자 했는데...난, 나 자신을 살펴보면 너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아직도 내어 드리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서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살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나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려 하다 보니까... 주님 앞에 설 때엔 언제나 부끄럽습니다. 


  •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 이런 감정이, 열정이 한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도 한 순간 이런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을 다 드린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결 같이, 예나 지금이나, 온전히....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종교학에서 말하는 종교의 기능은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도움받기 위해서 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슨 신이든지 덕좀 보아서 내가 잘되도록 믿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이 범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신이든 그 덕에 내가 잘되도록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의 고백은 그런 종교적인 역할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만을 위하다가, 예수만 위하다가 살 수 있나? 의문을 던지는 것은 너무도 솔직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언제 이루어 지는가? 바로 진정한 사랑을 할 때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서도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하면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아이를 진정 사랑하는 부모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밤잘 설쳐가며 아이를 돌보고, 밥해주고 뭐해 주더라도 그것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커 가는 것 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예수를 믿으나 안믿으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랑의 모델이 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연인끼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상대방에게 귀한 것 사주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물질을 아낍니다. 비싼 것 사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 불행이 무엇입니까? 

삶의 질, 웰빙을 이야기 하면서 정작 근본적인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면 현실이 어려워도 함께 일해가며 미래를 일구어 나갔는데, 이젠 웰빙한 현실이 갖추어 지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으려 합니다. 

아얘 결혼하면 서로 손해라며 결혼하지 않으려 합니다. 

결혼해도 자식 낳으면 자기들이 손해본다고 자식도 낳으려 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헤어지고 돈 때문에 죽이고,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립니다. 


그런데 정작 외롭고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에 돈이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왜 예수 때문에 죽을 수 있는가? 

그가 바로 참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죽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남기신 사람이 내 양을 먹이고 사랑하라는 것이기에 우리 한 성도들끼리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질 높은 삶입니까? 

여행하면서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좋은 장면을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

설사 사진이 없어도 그 풍경 자체, 여행 자체를 즐기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진 찍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직접 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사진 찍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남기는 데에만 목적이 있습니다. 

뭘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겉모양만 남은 인생입니다. 


아이들 엄마 프로그램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나...."조용하고 한가하게 브런치 먹으러 가서 커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 실재로 그런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니까 자기들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 꽤 많은 젊은 미시족들이 혼자 와서 차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더랍니다. 

그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서 부러워하고 있는데 한 사람을 보고 그 부러움이 깨어져 버리더랍니다. 

아주 이쁜 옷을 입고 우아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그 책이 거꾸로 들려져 있었던 것이지요. 

아주 폼은 멋있었지만 정작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척 하면서 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하면 행복할 것 같고, 멋질 것 같은데 정작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멋진 카페에 가서 커피 시켜 놓고 책읽지 않아도 

그냥 집에서 아이 재워 놓고 진짜 시늉이 아닌 책을 읽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약합니다. 

사는 것은 사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열정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수동적으로, 억지로 살지 않고

부지런하게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열정이 있어도 목적이 없으며 그 열정을 허무한 열정이요, 위험한 열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한 가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 안에 우라의 생명도, 구원도, 행복도 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사랑 안에서 발견됩니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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