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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시선으로 세상 보기 (빌립보서 1장 12-18절) 


지난 시간부터 빌립보서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빌립보서와 감옥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빌립보서는 그 탄생부터 감옥과 관계가 깊은 교회입니다. 감옥 속에서, 감옥과 같은 세상 속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성경에서는 곳곳에서 감옥 속에서 누리는 진정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자유한 자 같으나 세상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부러울 것 없는 처지 같지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가 있습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심장,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도록 합니다. 


  • 성인전과 성경 

문학장르 중에 성인전- 위인전기- 신성화, 과장, 그 사람의 위대함을 표현...

그런데 성경과 그 안의 인물들...

과장시키지 않는다. 신성화 하지 않는다. 

족보를 과장하고, 어릴적의 행적을 과장하고, 업적을 과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는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그 분의 족보는 과장은 커녕 흠집 투성이다. 불의한 여인들, 이방여인들까지도 족보에 등장. 

어린시절의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고...

가장 큰 업적인 십자가의 사건엔 배신과 모멸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성인전이 아니다. 위인전이 아니다. 성경은 계시이다.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그래서 성경 속의 인물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 걸어오시는 방법이다. 

 성경을 읽는 평범한 우리를 향해 쓰신 글이고 간증이고 고백이다. 

 

  •  바울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 안된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떨가 항상 나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만약 그와 내가 다르다면 무엇때문에 다른가? 나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못생겼으며 병을 달고 살았고, 그 스스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라는 전과가 있으며, 복음 전파자가 된 후에도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심지어 같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도 핍박을 당하는 자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염려도 있었고, 열등감도 있었고,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걱정이 있었다. 

복음을 전했던 교회에 대한 근심들, 양육하던 형제들이 배교하기도 하고, 교회가 분열이 생기기도 하였고, 그 와중에 그 자신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자기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역자 때문에 많이 괴로워 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부분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점도 없다. 자기들끼리도 하나 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무슨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가? 


역사적 배경)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  

[행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로마의 집에 가택 연금. 세들어 살면서 밖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마음껏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 


그런데 빌립보서를 쓸 당시의 상황은 더 악화 됨. 

그는 로마에 죄수로 오게 되었을 때 하숙집 같은데 있으면서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마음대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도 전하고 성경 공부도 할 수 있는 처지였다. 단지 그 집을 벗어나서 아무데나 다른 곳에 가지 못한다는 제약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져서 악명높은 시위대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그는 틈틈히 복음도 전하고 만날 사람도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완전히 자유가 봉쇄당하는 본격적인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 (빌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 감옥 안에서 사도바울의 깨달음.- 내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  

- 12절: 나의 당한 일- 감옥에 갇히게 된 일. 

* 감옥 안에서의 삶: 감옥 안에 그에게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안은 불결했으며 그 안에서 그는 분명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나 벼룩같은 벌레로부터 고통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늘 만나던 믿음의 형제들과 만나지 못하는 상실감이 그의 마음 속에 더 손실로 다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플러스가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Plus) : 시위대 안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됨

   그가 시위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이 시위대 안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위대 안에서 한 두 사람의 크리스챤만 얻은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시위대 안과 기타 여러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모두 지금까지 그가 전도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이사의 집 식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시위대 감옥으로 옮겨짐으로 받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상실감(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가 여기게 들어오게 됨으로 얻게 된 몇 명의 크리스챤들(공적인 사역, 복음을 위한 일)입니다. 그는 이 두가지 대차대조표 항목을 보고서 전체적으로 ‘플러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 시위대 감옥 안에 들어오고 또 이 안에서 고통 받은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위해서는 더 유익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플러스 마이너스의 기준이 무엇인가? 복음의 진보가 되는가? 해가 되는가?    

  - 우리의 기준: 항상 '나'에게 맞추어져 있다. 내가 잘되면 좋은 것이고 내가 고통스러우면 불행한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는 생각은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요, 내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생각.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가? 

  - 그는 자신이 당한 육체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시위대 감옥에 대하여 ‘끔찍했다’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가 당한 고통도 항목 안에 다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중을 자기 개인의 편의에 두지 않고 복음의 진보에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수지맞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하여 판단할 때 얼마나 내가 편해졌느냐 혹은 어려워졌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음의 진보가 되었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제대로 모든 것이 보일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정말 전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의미없는 일을 위하여 평생 뛰어다닌다. 그것으로는 아무 영혼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겨우 식구들 밥 먹여 살리느라고, 자기를 위하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 통곡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상을 내팽겨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 너머의 나의 사명, 복음을 위한 경주를 위한 열매가 있느가라는 것이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져야 될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영적인 대차대조표가 없기 때문에 모르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우리는 내 자신의 삶을 복음의 진보하는 기준에 맞추어 정리를 해 볼수 있어야 합니다. . 과연 나의 삶이 복음의 진보였는가 아니면 복음의 후퇴였는가? 아니 복음의 진보는 고사하고 내 영혼이 더 성숙하고 치료받고 온전해졌는가 아니면 더 퇴보하고 더 헤매었으며 중요한 것을 잃지는 않았는지 결산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어떻게 우리 개인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할 수가 있는가? 목사들은 그럴 수 있어도 일반 성도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우리에게 주신 일- 생육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만물의 이름을 짓도록 한 것,

하나님의 일을 나누어 주셨다. 

우리는 처음 창조 될 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나누어 주도록 창조되었다. 


심부름꾼이 아니라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하셨다. 

살리고, 기르고, 사랑하는 일에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고 책임져 주셨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서 끊어졌다. 

죄인의 특성- 하나님의 일, 살리는 일, 양육하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게 한다. 

땀흘려 일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가가 늘 부족하다. 

나 자신을 위해 아이를 낳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 마저 원하지 않는 시대이다. 죄인의 시대이다. 


그런데 그곳에 만족이 있는가? 늘 부족함이다. 

사랑하며 살리며, 불사르는 것은 모두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불사르도록 지으셨다. 


그런데 나만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진 삶은 결국 허무한 삶이다. 죽음의 삶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자기사랑에서 벗어나 바로 형제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나르시시즘- 자기 사랑의 결과이다. 자기 만을 바라보다가 죽도록 내어버려 두는 것. 사단의 거짓이다. 


  •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빌 1:16) 

다른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양육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위대 감옥에 들어가면서 걱정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서 너무 낙심한 나머지 신앙을 버리는 자들은 없을까 혹은 제대로 채움을 받지 못해서 거짓 교사를 따라가는 자들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그의 염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14절,“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분명히 그들 중에는 그의 문제로 신앙에 흔들리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를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 더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말씀의 종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양육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감옥을 옮기면서 끝까지 마음에 부담을 느끼던 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나타난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 발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더니 자기가 맡고 있었던 때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 안에 있는 완벽주의적인 생각이 얼마나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끝까지 주님을 믿지 못해서 붙들고 있는 동안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없으면 이 형제들이 매우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제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바울같은 탁월한 말씀의 종이나 하는 것이야. 나처럼 믿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바울이라는 사람만 믿고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 안에서 외롭게 복음을 붙들고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모두 다 자기 발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은 너무나도 어리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스스로 일어 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라는 사람만 믿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장 염려하던 것을 주님께 맡겼을 때 주님이 이들을 직접 양육하며 키우시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기가 붙들고 있던 때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일을 잘 하십니다. 

 

ex) 엘리야의 로뎀나무 사건. (내가 열심이 특별하여 오직 나만 남았으니..) 


  •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솔직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부끄럽게도 그곳에서 자신과 좋지 않는 관계에서 복음을 전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가 묶여서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너무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한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을 솔직하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단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단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고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복음을 전한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과 바울의 사이가 불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도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쟁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많은 크리스챤들로 부터도 그렇게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직접적인 관계없이 바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다른 12사도와는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바울이 좀 이상하거나 혹은 경계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시위대 감옥 안에 갇혀 버리니까 아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눈에 있는 가시가 없어졌던 것처럼 환영하면서 더욱 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 안에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그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던 자가 제거되었다 이때야 말로 우리들의 세력을 넓힐 때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어떤 복음 전하는 자와 분명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것이 바울을 굉장히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들의 활동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렸으며 그의 원칙을 깨트려서 상당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론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18절,“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 동안 바울은 이 얌체같은 자들의 사역이 잘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이 편치 않고 시위대 안에 들어 옴으로 그의 모든 사역이 다 망가지는듯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만큼은 잘 용납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감옥 안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 고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생각의 변화였습니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그리고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그리스도만 전해지면 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 순간의 생각의 전환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또 어떤 부분은 사실 욕심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라고 하면 영적으로 엄청나게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감정도 없고 미움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들 보다도 더 민감했고 더 어떤 문제에 집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려운 가운데 싱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직 주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또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대차대조표는 내가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느냐 혹은 내가 얼마나 좋은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비록 내가 고통 가운데 있게 되어도 그것이 복음의 진보가 될 수 있다면 더 유익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자기가 직접 돌볼 수 없었던 형제들을 주님께 맡겼더니 더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묘미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가지고 갑니다. 금방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끝까지 주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붙들고 있던 때 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십니다. 결국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이 꼭 나의 방식으로 나를 통해서만 일하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나와 다른 종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고 만일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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