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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탐, 무엇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 (민수기 13장 17-33절) 


우리가 잘 아는 12명의 가나안 정탐꾼 이야기 

출애굽 하여 어언 일년이 지나고 이제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가데스바네아에 진 치고 있을 때 

가나안 땅을 정탐


풍부한 해석과 신앙의 교훈을 남기는 장면 


1. 누가 정탐하고자 했는가? (정탐의 주체) 

  • 민수기 13장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 


  • [신 1:19-신 1:25]

(신 1: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신 1:20)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신 1: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신 1: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신 1:23)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신 1:24) 그들이 돌이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하고

(신 1:25)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왜 정탐케 하시나?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칠 때, 기드온이 미디안을 칠 때 (하나님의 사인을 바라보기 위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하기 위해...) 두려운 마음에 확신을 주기 위해... 정탐. 

  • 주체가 인간이라면 왜 정탐하고자 하는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셨는데.... 확신이 없다.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여기가 좋다. 더 이상 힘들기 싫다.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 


신명기의 백성들이 처음에 정탐의 이유로 댄 것 -> 

20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 이르렀다... 21절: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22절: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할수 있는가, 못하는가가 전제가 아니라 어떻게 차지할까가 정탐의 목적... 


2. 누구를 보내는가? 각 지파 중에서 리더된 자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아무나 보낸  것이 아니고 제비 뽑아 보낸 것이 아니라 각 지파의 머리들을 보냈다. 


3. 무엇을 정탐하는가? (정탐의 내용) 민 13:18-20 

정탐꾼들의 임무- 13장 18-20절 

1.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2.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의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 

3.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증거로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고 명합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온 다음 모세의 명한 임무에 따라 보고를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두 사람이 막대기를 매어 들을 정도로 큰 그 땅의 열매를 가져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임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 땅 사람들은 강하고 많다. 성읍은 산지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다. 


비교적 모세가 명한대로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 그런데 잘 정탐을 끝내놓고 이제 갈렙이 가서 땅을 차지하자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발생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진영이 두 파로 나뉘게 된다. 


갈렙이 먼저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이다." (민 13: 30) 


그러나 다른 열명의 정탐꾼은 말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땅을 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민 13:31절) 이라고 반대합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하는대도 하나님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보고를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민 14장 8절)이라고 고백하는데

나머지는 하나님 없이, 믿음 없이 그 땅과 가나안 사람들을 바라보니까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니라 (민 13:33)이라고 자신을 비하하기까지 합니다. 

 

 4. 정탐의 기간 (40일) 

많은 성경 학자들은 정탐의 기간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거리도 그렇고 그들의 땅을 살피고 사람들을 살피고 열매를 가지고 오는 것은 2-3일만 있어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천히 해도 일주일이면 쉬엄쉬엄 하면서도 완수할 수 있는 임무입니다. 

거리도 개인적으로 가기에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40일을 머물면서 정탐을 했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보고 금방 판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서로 나누면서 백성에게 알릴 좋은 소식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마음을 정하고 12명의 마음을 정하는 기간이 40일이 걸린 것입니다. 

정탐하라- explore-연구하라. 탐구하라. 탐험하라. 마음을 정하라. 

그런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나옵니다. 두 파가 갈립니다. 


성경의 40이라는 숫자는 육신과 영이 갈리는 분리의 시간. 

처음으로 40일이란 기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입니다 . 

노아의 홍: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창 7:17) 

모세: 40일동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세워 우상숭배. 

엘리야: 이세벨 여왕을 피해 로뎀나무 아래 피했다가 40일동안 광야를 지나 시내산으로 들어감 

에스겔: 40일동안 이스라엘 죄짐을 짐 

니느웨: 40일 후에 무너지리라 예언 

예수님: 40일 금식하시고 이어서 사탄의 시험을 당하십니다.  

            부활과 승천 사이 40일동안 머물며 사역함 


긍정적인 의미로 40일은 우선 육신적인 죽음의 시간입니다. 

홍수를 통해서 죄악을 죽이고 금식을 통해서 내 정욕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시간입니다. 

피곤을 물리치고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니느웨라는 큰 죄악의 성읍을 무너뜨리는 시간입니다. 

내 안의 죄악, 내 안의 불신앙, 내 안의 부정적인 생각, 내 안의 불평, 원망, 모든 어두운 것들을 몰아내는 시간이 40일이라는 기간입니다. 


또한 40일은 고난과 훈련의 기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알리는 준비의 기간입니다.  과거의 죄된 세상, 죄된 마음은 물과 함께, 성령과 함께 죽이고 새 창조의 세계로,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40일은 하늘의 영원한 문들이 열리며 하늘의 영광을 때를 예비하는 기간입니다.              

40일은 죄와 싸워 승리해야 하는 기간이고 육신을 이기고 정욕을 이기고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가는 기간입니다.  

40일은 나를 낮추시며 시험하셔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를,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달아보는 기간입니다. 

자기 삶, 자기 마음의 실체를 시험할 수 있는 기간이다. 


  • 40일의 기간동안 산에 있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백성들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 불렀습니다


  • 40일의 기간동안 죄악 속에 있던 백성들은 물과 함께 심판 당했습니다. 

그러나 배에 타고 있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새 세상을 꿈꾸며 인내했습니다. 


  • 40일의 기간동안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바라보며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이 저 강한 자들도 능히 자기들에게 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명은 40일의 기간 동안 똑같은 땅을 보며 절망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애굽을 생각했습니다. 악평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시험했고 백성들을 울게 만들었습니다. 


40일이라는 기간을  통하여 누군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누군가는 세상으로 돌이킵니다. 40일은 육신의 한계 앞에서 내가 영적으로 살 것인가, 여전히 육신의 노예,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시간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고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후에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40일이 임합니다. 

똑같이 은혜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꾸 과거로 회기합니다. 

자기가 맛보고 경험한 은혜를 거부하고 악평하며 다시 과거의 자기로, 변하지 않는 자기로, 소망이 없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사람들은 은혜 뒤에 오는 영적인 고통의 40일을 통하여 성숙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사망을 이기고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또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으로 어떻게 보느냐가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바라본 그 땅은 이미 우리에게 맡겨진 땅이요 예정된 땅이요 구별된 땅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낼때 당부한 것이 무엇입니까? 

13장 20절에 보면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장 9절에 여호수아와 갈렙도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것, 마음에 느껴지는 감정때문에 요동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배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같은 사물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느냐, 불신앙의 신앙으로 보느냐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똑같은 사물도 어디서 바라보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똑같은 자연도 어느 시각에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정탐꾼들의 처음 보고에 의해 밝혀진 객관적인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 땅은 과실이 잘 열리는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라는 것이고, 그렇지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크고 강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의 눈으로, 두려움의 눈으로, 자꾸만 바라보니까 

13장 32절에 사람들은 이 객관적인 사실을 어떻게 바꾸어 버립니까?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들어가면 죽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와서 보고할 때는 그들 입으로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였는데도 이제 믿음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말하다 보니까 이제 좋은 점은 하나도 안 보이고 땅조차도 사람을 죽이는 나쁜 땅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말들이 쏟아지니까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했다고 합니다. 

비관적인 생각이 지배하니까 밤에 잠도 못자고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원망의 타겟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출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였는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민 14:3)


과장에 과장을 더하여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극단적으로 생각하면서 다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말미암아 홀해를 건너서 온 민족이 이제 하나님을 떠나서 어떻게 다시 홍해를 건너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극단적인 표현에 분노하게 됩니다. 

14장 11절에서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22절에 보면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노하십니다. 

열번이나 나를 시험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항상 내가 그들과 함께 했음에도 열번씩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공개적으로, 집단적으로 원망했음을 서운해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 오병이어의 기적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때의 너희는 예수님이 들어가있는가, 없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질문은 너희 삶에 내가 중심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네 삶의 한 복판에 내 자리가 있는가? 너의 삶의 중심에 주님의 자리가 있는가?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우리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오리까?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반응...(불신앙) 


  • 관점이라는 의미의 영어 “Perspective”라는 단어는 Person과 spective의 합성어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바라보는 시각,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달리 감지하는 개인마다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똑같은 물컵의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이것밖에 안남았다”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관점은 바로 이 차이를 가리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라 (explorer)”하라는 임무를 띠고 12명의 뽑힌 자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열 명의 사람들은 그 땅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보며, 두 명의 사람들은 그 땅을 바라보며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디다. 


신앙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의 관점은 “차이”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달리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가지는 능력입니다. 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주의 역사가 되고 우리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이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에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에바다”는 눈이 열리는 역사입니다.       


개인마다 다른 차이의 눈에서 믿음의 눈으로 눈이 열리는 것.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 사람을 보는 것. 삶을 보는 것. 그럼 우리 삶은 에바다...열린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닫혀진 삶을 사는가? 각자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5. 모세의 선택 

가장 큰 반전... 

모세는 누구의 말을 들었는가? 왜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고 열명의 말대로 가데스바데아 땅에서 멈춰 섰는가? 


목회를 하면 많이들 하는 소리...

참 신자는 10퍼센트...그들을 바라보고 목회를 해라. 그들만 있으면 된다. 

어떤 이는 새벽기도 하는 성도가 참 신자... 

제자와 무리... 많은 교회들이 10:1, 혹은 10:2의 비율로 무리와 제자가 갈린다. 


직분에 상관없다. 세상에서 배운 정도도 상관없다. 12명의 정탐꾼은 모두 각 지파의 리더들..,,


모세의 목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하는 것... 


설사 그곳이 가나안 땅이 아니더라도, 축복의 땅이 아니더라도, 모든 백성들이 낙오없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 


(출 33: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출 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아닌 줄 알면서 그들을 인도하기 이해서 40년을 함께 고통 속에서 거하는 것. 이것이 모세의 리더십... 


왜 많은 교회들이 분열되고 깨어지고....하면서 내세우는 말..

그들이 틀렸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갈라섰다.

아니 성도가 틀리더라도 목사는 성도를 버려서는 안된다. 끝까지 함께 하고 책임져야 한다.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참고로 시작해서 끝까지 견디느니라로 마친다. 


사랑의 처음과 끝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를 살리기 위해 함께 고통스런 40년의 기간을 또 함께걷는 것이다.


성도가 목사를 잘 만나야 되듯 목사도 성도를 잘 만나야 된다. 


난 목사로서 사무엘처럼 말씀이 희귀하였으나 성전의 불이 꺼지지 아니하였던 것 처럼 내 책임을 알고 최선을 다할 것이고, 여러분의 눈이 열릴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가르칠 것이지만 내 더욱 힘든 사명은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함께 기다려주고 고난에 동참하며 잃어버린 한 영혼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목사는 성도를 위해 존재하고 제자는 무리를 위해 존재한다. 제자 스스로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 삼으신 목적은 "내 양을 먹이게 하시고 치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눈이 띄여지기 원한다. 에바다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40일의 기간을 통하여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기 원한다. 


하나님이 주인된 가나안의 백성이 되길 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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