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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하시다 (시편 139편 1-4절) 


  •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

생각의 속도가 얼마나 빠를까요? 제가 과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한 수치를 제시할 순 없지만 사람이 꿈을 꿀때를 보면 잠시 잠깐의 시간에도 꿈 속에서 몇시간씩 때론 며칠씩의 시간의 경험도 하게 된다든지 큰 일을 성취하거나 큰 위기를 당했을 때에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라든지의 표현을 보면 순간의 시간에 할 수 있는 생각의 양은 과히 어마어마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수많은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말, 혹은 언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말이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양으로 보아도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생각중에 확실한 어떤 부분을 결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무슨 책이나 말을 해석할 때 우리가 잘 훈련받고 능력을 쌓으면, 가령 그 사람의 배경이나 환경을 잘 알면 어떤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그 사람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언어 자체보다도 그 사람의 배경이나 언어를 구사하는 방법을 더 잘 알아야 한다고까지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언어학이나 뇌 과학등 여러 과학이 발달하면서 현대 해석학에서는 어떤 사람이 생각을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 이미 원래의 의미에서부터 많은 의미들이 사라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읽을 때에는 또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수많은 의미들이 사라지거나 왜곡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들을 합니다.  아무리 그 사람의 배경을 연구하고 그 사람의 언어습관들을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원래의 의도를 아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다고까지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잘 연구하지 않고 대충 들어가면서 그 사람의 말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의도나 뜻을 안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소통 소통 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부부 사이에도 이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갑니다. 

더더군다나 현대는 사람들끼리 살비비고 이야기하면서 사는 시대라기 보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이모티콘이나 컴퓨터의 용어들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양식을 더욱 간단하고 단순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때론 이모티콘이 우리의 생각을 잘 표현할 때도 있니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지요. 

 

말하는 사람은 진지하고 자세히 표현하고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말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배경까지도 알아가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의미를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모티콘이나 단순한 대화로 서로를 소통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로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신다"는 것을 느낄 때라고 말들을 합니다. 


누구도 내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무리 표현하려 해도 내 마음이 표현되지 않는데, 그 분 앞에 잠잠히 기도할 때 "내가 네 마음을 안다...": 하는 감동을 느낄 때 우리는 소위 은혜를 받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안을 느낍니다. 


  •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1절부터 4절까지 그 분께서 나를 아신다는 표현이 매절마다 적어도 한 번씩 다섯번이나 걸쳐서 나옵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1절에 보니까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다"고 하십니다. 과학자가 연구를 하듯 신학자가 말씀을 공부하듯 주께서 날 그냥 스쳐지나가듯 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 내가 눕는 것, 내가 가는 길을 살펴보신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만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2절에 보니까 "멀리서도 내 생각을 아시고, 3절에 보니까 내 모든 행위를 아시고, 4절에 보니까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현대 해석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책상머리에 앉아서 연구하고 노력해도 내린 결론이 사람이 사람의 의도, 생각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내 생각도, 내 행위도, 내 혀의 말도 다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원을 들여다보면 더 의미가 깊어집니다.

"오 주여 주가 나를 계속적으로 살펴보심으로 나를 속속들이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언제 넘어지는지 언제 일어서는지도 아시고 먼곳에서도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진행하는 것과 내가 무엇때문에 주저앉는 지를 분별하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사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내 생각을 입술로 내뱉기 전에 이미 그것을 완전히 아십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내 생각과 내 입술의 말을 알 수 있는가? 13절에 그 이유가 있지요.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나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것입니다. 

날 나아준 부모도 날 모를 수 있습니다. 

컴퓨터, 스마트폰의 주인... 그것을 다루어도 자기가 쓰는 것만을 쓰기 때문에 그 제품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 제품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입니다. 

바로 나의 창조주이시 때문에 나를 나의 부모보다, 나보다 더 날 잘 아십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것에 감동해서 제자 되었던 자.

나다나엘 "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너를 알았다" 

사울에게 쫓기고 자식이 배반하고, 자기의 친구가 자기를 떠날 때마다 다윗이 찾았던 곳....하나님의 임재

사람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다. 왜? 그 분만이 내 마음을 아시니까....

때때로 목사로서 성도들을 대할 때마다 소통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이야기를 내가 다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고, 그 반대로 내 이야기를 자꾸만 오해 할 때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압니다. 그 분은 전지하십니다.  

그 분의 "내가 너를 안다."는 말씀은 그 누구의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 그 분의 전지하심이 좋기만 한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면 죽는줄로 알았습니다. 왜? 나를 속속들이 아시니까...

내 죄악이 다 드러나니까...

하나님 편에 섰을 때에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가장 큰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반대 편에 섰을 때에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구약의 아간,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꾸만 숨기려고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바위 뒤에 숨습니다. 

아담이 영이신 하나님을 몰랐을까? 바위 뒤로 가면 과연 하나님이 못찾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식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육체의 죄를 가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닌 것 같지만 그 순간 가리고자 한 행위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을 때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경험하며 살지만 하나님과 등지면 내가 하나님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 감출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 죄인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면 하나님을 피할 것으로 생각하고 배를 타고 잠을 자면 하나님의 시선에서 감추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합니다. 

EX) 청문회... 증거가, 증인이, 녹음이 있어도 아니라고 잡아뗴는 사람들....

기업인들 (공손하게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모릅니다) 교수나 의사들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이래서 난 모릅니다.) 

정치인들, 공직자들 (무작정 모릅니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그 사람들만 뻔뻔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감추고자 할 때 자신은 정말 감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감찰해 달라고, 자기를 판단해 달라고 기도했던 다윗도 어느 순간 하나님을 피하고자 했던 때가 있었었나 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스올에 내 자리를 편다는 것은 악인의 자리에 앉는 다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하나님과 반대깃로 가서 하나님이 날 떠나시겠지...하더라도 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마치 요나가 일찍이 일어나 다시스로 향하듯 부지런히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듯 반대길로 가더라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날 붙드시리이다." 

한 번 택한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꽉 붙잡고 놓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 받을 때는 더 없는 할렐루야인데 신앙적으로 비뚤어져 있을 때에는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려 계속나아가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빠지듯이, 유다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듯이 결국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성도들과 다툴 수도 있습니다. 

성도와 목사가 의견이 안맞아 다툴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신실한 자들이었지만 다툼으로 길을 달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다투는 자는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정말 그릇된 것을 보아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영성가들이 교회 안에서 누군가와 혹은 교회의 제도가 정말 그릇되어서 충돌할 때 이것이 신앙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

그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때로는 심지어 목사와 다투더라도 기도할 때에 정말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진정 하나님께서 날 지지해주고 인정해주신다면 그 다툼은 거룩한 다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왕은 정치적인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악을 판단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사울은 합법적으로  모든 법리를 다 내세워서 다윗을 죽이고자... 

그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누가 잘못하는 것이냐고 판단해 달라고...

마틴 루터 - 가톨릭에 대항해서 종교개혁을 할 때에...교회에게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저주받을 짓, 종교적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장.

그 때에 그가 맞설 수 있었던 이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그런데 요나의 불순종. 죽어도 내가 옳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외쳐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으면 죄....왜?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결국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이 아닌 나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아무리 가려도 하나님 앞에 감출 수 없으니까 거꾸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내어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이렇게 나아갈 때에 정말 하나님의 깊은 은혜, 마지막 절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모든 인생길에서 악한 행위를 버리고 영원한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그 분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의 전지하심은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가장 큰 위로이자 힘이고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전지하심을 망각할 때에 죄가 일어나고 교만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꼐 더욱 나 자신을 살피라고 나를 오픈하고 내 모든 부분을 열 때에 구원이, 평안이, 영광이 내 삶에 임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