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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3장 16-22절: 선악의 심판자 


아담이 죄 짓기 전, 에덴 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악한 모습이 있었을까요? 좀 우스운 질문인가요? 

당연히 죄가 없었으니 악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럼 악이란 말 대신에 연약함이라는 말을 써 봅시다. 

아니면 부족함이라고 해 볼까요? 

아니면 허전함이라고 해 봅시다. 

에덴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도 연약함이나 부족함, 허전함과 같은 것들이 있었을까요? 

죄가 없었으니, 악하지 않았을 것이라 쉽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니 연약함이나 때로 부족함, 허전함과 같은 것들은 있지 않았을까요? 

연약하기 때문에 뱀의 유혹에 빠진 것이고, 에덴 동산에 거하였음에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무언가 허전함이 있었기에 선악과를 먹은 것 아니겠습니까? 뱀은 바로 이 아담의 연약함과 허전함의 약점을 파고 든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철학이나 신학에서도 오랫동안 이 연약함이나 허전함, 부족함등은 악의 결과물로서, 죄의 결과로서 받아들여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연약자 입니다. 그가 제한이 없는 신이면, 우리는 한계 투성이인 인간이고입니다. 선악과라는 것의 첫 의미는 우리는 날 때 부터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존재로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전함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죄인은 아니었습니다. 악인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악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기준이요, 판단자요, 결정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악이라는 것이 객관적은 어떤 것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일하면 선, 악한 일하면 악...이것은 꼭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그 선악의 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많은 나라에서 아동을 학대하면 부모라 할지라도 범죄로 여깁니다. 아동학대죄와 상해죄가 적용됩니다. 

그런데 단 백년전만 해도 이것을 범죄라고 여긴 나라는 거의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 아이들, 여성들은 노예 들과 마찬가지로 인권이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당연히 살인이죠. 그런데 여전히 사람을 잡아 먹는 나라도 21세기인 지금도 버젓이 있습니다. 

신께 제사를 드리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부족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간음하면 죄라고 하는데 어느 나라는 여전히 몇 십명씩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둔 나라들도 있습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기준이 필요하고, 그것을 판단할 판단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뱀이 아담을 유혹 할 때 무엇이라 유혹합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 (창 3장 5절)


이것을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뱀의 말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 맡기지 말고 너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준에 복종하지 말고 너 자신이 왕이 되고, 판단자가 되고, 결정권자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뱀, 사탄의 유혹은 그 때 부터 지금까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면 자유할 것 같지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더니 정말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선악의 판단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선악의 결정권자자 되자 가장 먼저 하게 된 판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3장 7절에 보니까 "그들이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옷을 입은 것입니다."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이고, 이제 부터는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서로 가리고, 숨고, 피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을 때에 인간에게는 선악이 필요없었습니다. 똑같이 연약하고 혹 어떤 점에서는 부족한 것들이, 허전한 감정들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 안에 있었을 때는 그냥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가족입니다. 하나님과 똑 같이 될 순 없지만 그 분과 함께 놀고 그분과 함께 거닐며, 대화하고 사랑합니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자녀가 아버지를 보면서 자기의 연약함 때문에 괴로와서 난 왜 아빠가 되지 못할까? 염려하고 불면증에 걸리고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하는 자식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버지가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언제나 든든하며,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대적하여 적이 되면 절망스럽지 않겠습니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자신이 판단자가 된 인간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정의, 법 등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세워놓은 정의의 구현하고자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할 때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 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결국 선악을 분별하는 재판 잘 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는 잘 알다시피 한 간난아이를 서로 자기 자식이라 주장하는 두 어미의 재판을 기가 막힌 지혜로서 판결하여 의로운 재판관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그런데 재판이라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판사가 있으면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습니다. 

검사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변호사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재판은 두 사람이나 그룹들이 맞서서 서로의 잘 잘못을 따지기도 합니다. 

재판관은 검사나 변호사, 혹은 둘 사이의 주장을 잘 듣고 분별하여 누가 옳은지를 가리는 것, 이것이 세상의 재판입니다. 


그런데 그 판사의 판결은 무엇이냐면 유죄냐, 무죄냐로 결정됩니다. 

형량이 결정되기 전, 가장 중요한 판결은 무죄냐, 유죄냐를 가립니다. 

무죄를 받으면 검사가 아무리 죄를 지적해도 결국 다 사해 지는 것이요, 유죄가 되면 변호사가 아무리 변호를 해도 모조리 죄가 인정됩니다. 둘 사이의 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둘 사이에서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한 쪽이 이기면 한쪽은 억울한 것이요, 한 쪽이 기쁘면 한쪽은 분한 것입니다. 


가장 공의로운 재판관이 있어도 한쪽은 억울함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참으로 믿을 수 조차 없다면 그 재판은 그야말로 부조리 투성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하면서 결국은 돈 많은 자가 승리한다. 동물의 세계와 똑같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솔로몬의 통찰입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ㅡ이 세상에서 

보건데- 살펴보고 통찰하건데

재판하는 곳 그곳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다. 


"결국 의인과 악인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자세히 그 다음을 번역하면 악한자나 의로운 자,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가 온다. 


지상 최고의 판사인 솔로몬의 통찰은 자기도 참 정의롭게, 바르게 재판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 만이 재판하실 수 읶ㅆ고, 또 반드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여러사람들을 재판하면서 깨달은 바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해도 인간 세상에서의 일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은 잘난 채 하다가 동물과 똑같이 흙으로 가는 것이지만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들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구절이 없다. 그건 신약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솔로몬은 이런 세상의 이치를 보면서 분명히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결론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나니 그것이 바로 그의 몫이다."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하나님의 때가 임할 때까지 세상은 풀지 못할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은 알게 해 주시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 인생에 이해하지 못할 일로 가득합니다. 부조리 투성이고 모순이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나의 몫으로 주어진 내 일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나눈 말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 더 나아가선 내 인생에 주어진 오늘이라는 선물을 통해 즐거웁게 살라는 것입니다. 내 몫은 누가 준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살도록 허락하신 시간입니다. 그것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으라는 것이고, 억지로,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즐겁게 주님 주신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선 세상 최고의 지혜자였던 솔로몬의 내세관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때가 오면 그가 짐승같은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의 자녀 같은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죽은 이후에 세상 일이 궁금하다고 해서 이 세상에 와 볼 사람이 누가 있겠냐? 하면서 

짐승같은 삶을 살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지를 결정하여 우리에게 몫으로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지요. 

죽은 뒤에 이 땅에서의 삶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인생은 반드시 후회가 따르고 부조리와 불합리 투성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취한 삶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억울함도 없고 분함도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오늘 하루도 후회함이 없는 인생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