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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롬 5: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딸 셋을 낳은 끝에 아들 하나를 둔 가정이 있었습니다. 늦깎이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어느 딸보다도 아들을 귀하게 키웠습니다. 

시골에 조그만 땅을 두고 농사를 하며 지내던 집이었는데 그 곳이 개발되면서 땅값이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가난한 농사꾼의 집에서 이젠 농사짓지 않고 땅 판 값으로 5층짜리 건물도 하나 사서 꼭대기 층에 집을 짓고 나머지 층은 세를 주고 남 부럽지 않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가난할 때는 그래도 별로 티나지 않았는데 부자가 되니까 아들에 대한 사랑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딸들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아들은 언제나 좋은 옷, 좋은 학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게 해 주었습니다. 

집안은 부유해졌는데 그래도 딸들은 언제나 구박, 아들은 언제나 "우리 귀한 아들"이라는 말로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시집 갈 나이가 되어 딸들이 하나 둘 시집을 갔습니다. 

 딸들은 시집을 갈 때도 부모로부터 서운한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즘은 돈 없으면 장가도 가기 힘들다더라"하면서 혼수도 변변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께 뭐라 말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지긋지긋한 구박의 생활에서 탈출하는 기분으로 각자 시집을 갔습니다. 

아들 장가 갈땐 정말 마을이 떠나갈 듯이 잔치도 열고 아파트며, 가구며 정말 집안 형편에 넘칠 정도로 넉넉하게 장가를 보내는 모습을 바라보며 딸들은 또 한 번 서운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래도 귀한 아들이니까...하며 누구 하나 부모에게 말한마디 하는 딸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딸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모든 집안의 재산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아들 몫이 되었습니다.

딸들에게는 한 푼도 주어지지 않고 그 많은 재산이 다 아들 몫이 되었습니다. 

딸들은 어렵게 어렵게, 월세에게 전세로 겨우 겨우 알뜰하게 입에 풀칠 하며 살아가는데 집있고 부족한 게 없는 아들에게는 또 아버지의 유산까지 보태어졌습니다. 

그래도 딸들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딸들끼리 "우리 집은 유별나. 걘 귀한 아들이니까..."하며 불평도 아닌 설움을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먼저 연락도 잘 안하던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 사업이 힘이 드니 누이들이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들이 뭔 돈이 있어요. 돈은 다 그 녀석에게 줬잖아요."

급기야 딸들도 평생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딸 셋이 아끼고 아끼던 돈을 모아서 500백만원을 모아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이거갔다가 어디 쓰냐. 그 녀석 한 달 생활비도 못하겠다,,,,"

"죽일 년들....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지금 힘들다는데 이거 밖에 못해주냐..." 

그 때부터 어머니는 딸들을 부를 때마다 죽일 년들, 베은 망덕한 년들....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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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한 집안이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 집이 그리 유별난 집입니까? 

조금 특별할지는 몰라도 주위에 권사님들이나 나이 드신 분들 이야기 들으면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도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딸로 태어나 받았던 구박, 아들로 태어나 받았던 편애의 이야기는 우리가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는데, 이 아들, 특별히 장자라든가 외아들이 주는 의미는 특별함니다. 

그것은 그 가게의 대를 잇는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장자권이라는 것은 "특별히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이 장자권을 둘러싼 특별한 은혜에 대한 일화입니다. 

성경 속에서도 아들, 특별히 장자는 재산의 상속에 있어서도 특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아들의 성품이나 능력과는 무관했습니다. 

성격이 좋아서 받은 은혜, 능력이 있어서 받은 은혜가 아니라 그저 날 때 부터 주어진 그들만의 특별한 권리이자 은혜였습니다. 


편애가 사람을 망친다고 이런 특권을 받고 산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인생이 순탄치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받는 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오히려 더 인색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합니다. 자기만 압니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없고 탐심과 욕망은 줄어들 줄 모릅니다. 

외아들, 장자를 순탄하게 잘 키운 집은 그 집 부모님들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거나 그 아들의 성품이 정말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잘 키운 아들로 모델이 되는 것이 이삭입니다. 

그는 정말로 귀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를 편애하지도 또한 탐욕스럽게 키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삭하면 순종의 자녀, 기쁨의 자녀 입니다. 


그렇지만 이삭보다 더 순종의 자녀, 기쁨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성경은 그 예수를 "beloved son,"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는 사랑받을 만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교만하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빌 2:6)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 2:8) 


그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자기의 분깃을 요구하며 재산을 요구했지만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여 자기를 살리고자 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자기를 죽여 아버지에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도 자기의 뜻대로,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자라 했습니다. 

나를 믿지 않으려는 자는 내가 행한 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이 아들인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였지만 그 사랑을 통해 오히려 공의를 배우고 진리를 나타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기울어지고 편중되지만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거룩하고 공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그는 더욱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삼위일체니 뭐니 해서 교리적으로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글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그 아들 예수가 그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을까? 

죄가 없으신 그 사랑 가운에서 자라시고 함께 거하시고 함께 세상을 만들고 구원을 이루셨던 그 관계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서두에서 말한 그 아들만을 생각했던 어머니보다 예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덜했을까요? 

그 아들이 그렇게 귀해도 평생 아들을 쉬지 않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들은 부모의 그 사랑을 다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부모를 닮을 수 있었을까? 아들은 부모가 그를 사랑한 것처럼 그 아들 역시 부모를 그리 끔직히 사랑했을까? 


아마도 그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한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보다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사랑을 묵상하면 할 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나같은 자를 위해.....

어떻게 나같은 죄인을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인간을 위해서... 그 귀한 아들을 대신 죽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내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모든 삶을 바친다고 해도 내가 예수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 예수의 백만분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루 종일 하나님의 일만 해도 내가 예수를 대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 실상은 어떻습니까? 

난 내가 목사인데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시간보다 나 혼자 나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목사인에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시간 보다 집안 일 돌보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나만의 일에 몰두하는 시간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어떤 신실한 사람, 헌신된 사람, 설사 온 삶을 하나님께 헌신한 성인들이나 선교사들의 전기를 읽어보아도.... 그그 사람이 예수를 대신 할 수 있을꺼라고 생각되는, 예수보다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본 적도, 읽은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독생자를 죽일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게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내가 뭐라고....


그렇다고 내게 무슨 선한 모습이 있어서, 투자할 가치가 있어서, 뭔가 기대할 수 있어서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직, 여전히, 지금도, 계속해서,,,,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일 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 


도대체 왜? 

이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으니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것이 와 닿지를 않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내가 언제 달라고 했나.... 왜 나도 모르게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나...별 생각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왜 나를 사랑하셨을까?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를 죽이면서까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정말로 이해가 되십니까?


서두에 말씀드린 그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는 중에 "나에게 예수는 그 아들보다 훨씬 더 귀하고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감동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 귀하고 사랑스런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 같이 한번 외워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뭐 사랑받을 만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동거하며 살도록 창조된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상관없이, 멸망을 위해, 죄를 향해, 죽음을 향해, 절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다 보다, 참다 참다, 견딜 수가 없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다 듣다 결국은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보면서, 병든자, 가난한 자, 교만 속에서 죽어가는 자를 바라보시면서 우시면서 "내가 저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리라 (요 14:18)"하시는 예수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결국 하나님 없이 고아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그 비참한 인생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프리카나 불쌍한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못받으며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정말 비참히,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고 불쌍한 마음을 느낍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월드비전이나 그런 기관을 통해 자매 결연을 맺어 직접 도와 주기도 합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더 나아가 그런 기관에서 일하면서 직접 그 아이들을 찾아다니기도 하며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희한한 것은 더 깊이 관련하여 일을 하면 할 수록 그런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사랑이 더욱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연예인들은 자기 소득의 거의 대부분을 그런 아이들을 돕는데 아끼지 않고 기부하며 달려가고 도와주는데에 앞장 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저 사람 돈 많으니 저런가보다 하고 유명해지기 위해서 저러나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은  정말 안타깝게 그들을 위해 아낌없이 물질과 시간과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어가는 우리 인생을 바라보시면서 자기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한 우리 인간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사랑하시되 마음으로만 한 것이 아니고, 조금 관여하여서 도와 주려 한 것도 아니고, 자기를 내어 던져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통해서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이젠 사망과 절망과 어둠이 아닌 빛과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우리의 집이 이젠 하늘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걸할 처소를 얻는 것입니다. 


죄에 빠져 있던 굶주린 영혼들에게 주님께서 오병이어를 통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들의 필요가 채워지는 그 놀라운 기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비로소 자신의 오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요 6장47~ ) 


그런데 떡을 먹고 물고기를 먹을 때는 좋아하며 모여들던 사람들이 주님이 내 피를 먹고 살을 먹으라 하니까 다 떠나갑니다. 

내 배가 부를 때는 감사하고 기뻐하다가 정작 주님을 믿고, 주님을 닮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자 하니까 "이건 너무 어렵다" 싫다면서 떠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해달라고 구해달라고 부르짖어서 출애굽 시켜서 홍해를 건널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더니 하나님과 교제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그들을 훈련시키니까 "나를 죽이려나 보다, 애굽이 훨씬 나았다"하면서 다시 우상을 섬깁니다. 참 하나님과 교제 하는 대신에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대신 만들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위에 절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감사한데 뭐 아들까지 죽이면서 그렇게요. 부담스럽게....하면서 겸손한 척 그 사랑을 거부하며 예수 외에 다른 길로 자기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의 피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신 것입니다. 


가끔가다 저에게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서 힘들지요. 남들처럼 즐기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포기해야 하지요? 하고 불쌍히 쳐다보며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 한 적이 없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내 삶이 무언가를 포기해야하고, 참아야 하고, 금욕해야 한다고 느낀 적도 별로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것이야 말로 내가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옮겨서 바른 길을 걸어간 다는 것이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 내가 내 인생의 여행길에 헤메이지 않고 딴 길로 가지 않고 주님이 정하신 길, 좁은 길, 좁은 문, 높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로고스 교회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한 가족 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하는 예수를 죽이면서 까지 나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사망의 길에서 구해졌습니다. 

다시는 어둠과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 주어졌고, 평강이 주어졌고, 참 행복이 주어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리고 경험하며 또한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아직 예수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죽어가는, 고아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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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덕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6.26 15:39

    참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한없는 주님의 사랑 다시한번 느끼며 갑니다♡

  2. 장덕순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6.26 15:39

    참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한없는 주님의 사랑 다시한번 느끼며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