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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얼굴

 

(이사야 52:13-53:6) 

 

 

[사 52:13-6] (사 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사 52: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꿈에로라도 하나님을 보신 분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혹은 사진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타낼까요? 

역사를 통해서 많은 예술가들, 혹은 영화 감독들, 혹은 영화 배우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인자하고, 온유하며 사랑이 많은 그 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그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노력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이상하게도 성경은 예수님의 생김새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키가 큰지 작은지, 미남인지 추남인지, 멋있는지, 유머가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절대로 예수의 생긴 건 언급을 안 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시는 장면은 나오는데 웃으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웃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규율로 세운 수도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어떠하셨을까? 

지금까지 예수의 얼굴은 실물을 보고 초상화로나 그림으로라도 남겨 져 있는 것이 없다고 알고 있다. 단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갈 때 예수의 몸을 쌓고 있었다는 '성의'에 예수 얼굴 윤곽이 희미하게 남아 있단 말은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수의에 대해서도 진짜냐 거짓이냐를 두고 첨예한 대립이 있다. 성경에 예수의 얼굴이,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예수의 얼굴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에게 예수의 얼굴을 함부로 상상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10년이 훨씬 넘은 정말 오래 전, 거의 모든 일간 신문 일면에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의 양심 BBC가 많은 학자들의 분석을 받아 첨단 법의학과 컴퓨터기술을 동원하여 그려 냈다는 예수님(이하 존칭생략)의 얼굴이 실렸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때문에 이 방송은 곧 많은 기독교 단체들의 항의를 들어야만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패션오브 크라이스트가 상영될 때에도 많은 유대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영화의 상영을 막으려 애썼다. 

고난당하는 예수, 매맞는 예수, 피투성이가 된 예수.... 이를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 여겼기 때문이지만 그 속내는 예수를 그렇게 만든 유대인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를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은  넓은 이마와 긴 머리, 그리고 수염을 가진 잘 생긴 남자의 모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마태복음 26:48에 따르면 군병들이 그에게 와서 예수님은 토속적인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다른 유대인들과 다른 특별한 것이 없다고 기록한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Celsus(2세기)는 예수를 '작고 못생겼다'고 혹평한다. 역시 2세기에 살았던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Justin Martyr 또한 예수를 '주목할 만한 아름다움은 없는' 이로 이야기 했다. 하지만 200년 정도 후 제롬과 어거스틴은 예수의 얼굴과 몸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어거스틴은 예수를 '아이처럼 아름다우며 지상과 천국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자'로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얼굴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계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계시록에 표현된 얼굴은 물론 영화로우신, 천국에서의 예수의 모습이다. 해가 비치는 듯한 얼굴... 

고린도 후서에 표현된 예수의 모습도 또한 빛으로 표현하지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추리라는 말씀,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어둠과 빛의 대조를 통해서 인간 예수 속에 깃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52장 13-53장의 본문은 고난당하는 종의 노래로서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그 종은 일찍이 본 일도 없고 들은 일도 없을 정도로 박해를 당해서 사람의 형상마저 일그러져 아주 비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을 통해서 여기서 표현된 야훼의 종이 누굴까 많은 이론들을 내세웠다. 

"타인보다 상했지만 지극히 존귀하게 된 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가 흠모할 아무런 것도 없는 분.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분." 


야훼의 종'은 특별한 사명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가 과연 누군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 종은 모순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종이면 씩씩하고 영예로워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가 억울한 고난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훼의 종, 고난 받는 종이 도대체 누구냐? 사람들은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여 시대가 바뀌고 새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 조명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숨겨진 미스 테리 였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그런 인물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장면은 바뀌어, 예수님은 잡신들이 우글거리는 이방인 지역,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문득 한 가지 질문을 불쑥 던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때 제자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며 그냥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때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은 다 착각하고 있다 해도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희랍 말이고 히브리말로는 메시아요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옳게 바라보고 바르게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도 착각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관입니다. 베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란 현세적으로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 믿었으며 바로 그 힘으로 나라를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며 또한 사회를 안정시키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보처럼 당신이 사람들에게 잡혀 버림을 받아 죽는다고 하시자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말렸습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는 잘 나가다가 사탄으로 전락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베드로의 믿음의 눈은 아주 위대했지만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영화롭고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사의 메시야로만 봤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정신이 번쩍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은 사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신앙의 모순이며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평생 방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미 왔으며 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본문: 52:13-15. 마지막 고난 받는 종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

* 내 종이 형통하리니: 형통의 원래 낱말-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이 단어는 각주에 있는 것처럼 내 종이 지혜롭게 행하리니, 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형통의 단어를 지혜롭게 행한다는 단어와 같이 쓰이는 몇 곳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 1:7-8절입니다. “봉독”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통이란 주님의 말씀대로 시행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종이 지혜롭게 여호와의 뜻을 다 이루신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다윗과 예레미야 선지서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형통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요셉이 감옥에 갈지라도 그것이 형통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잘 진행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을 대조하여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왕에는, 이라는 단어는 전에는, 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존귀하게 되기 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형통이 이런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것이 지혜롭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롭게 행하심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는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혜롭게 행하시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얼굴과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다는 것은 보통 사람보다 나아 보이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리가 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였습니까? 참람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너 같은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타인보다 상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사야 53:1-12


어제 본문의 끝 부분인 52:13절부터 53장까지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는데 오늘의 말씀은 마치 메시아의 모습을 십자가 아래에서 그린 것처럼 선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제 5의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 Who 

1-3절이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말하는데,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의문문으로 시작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서로 메시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 분이 오신다는 것을 전했지만 실제는 아무도 믿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팔’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편 팔’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1절 하반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틀림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믿지 못했는지를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 어린 묘목같다. 어린 나무일지라도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곳에 있어서 머지않아서 큰 나무로 자랄 것이 확실하게 보이면 좋을 텐데, 마른땅에 자라고 있어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되고, 게다가 뿌리가 아주 작게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저히 제대로 클 나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를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니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진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방 한 칸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고,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게다가 말씨도 표준어가 아닌 갈릴리의 투박한 사투리를 쓰셨을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보아도 메시아로 인정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들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입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 모두의 죄악’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다 영원히 죽은 존재였음에도 하나님은 독생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을까? 

그 초라함이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상한 얼굴로 와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 상한 얼굴로,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정결의식을 치루어 목욕재계하고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 앞에 서는 자는 언제나 두려움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다음의 55장에서는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꾸미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감추지 말고 네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너무 거룩한 척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거룩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그 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초라해져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피부병에 걸렸던 나. 나 자신의 모습에 항상 컴플렉스가 있었던 나. 한 번은 체질을 변화시킨다고 한약을 먹는데 뱀이 꺼풀을 벗는 온 몸, 특히 얼굴이 하얗게 비듬처럼 딱지가 생겨서 벗겨짐...그런데 그 속에서 나오는 살도 깨끗하지 않아..

한 여름에도 항상 긴 팔, 긴 바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왜?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가 없어서... '

거울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싫었던 나. 

그런데 그 초등학교 때에도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께 기도하고 친구가 없으니까...예수님을 친구삼아 놀았다. 


그래서 그 날도 기도하면서 내 피부병 낳게 해 주세요. 내 얼굴만이라도 깨끗하게 해 주세요. 하는데...

내 모습보다 훨씬 심각하게 상한 얼굴, 상한 몸, 피로 물든 몸으로서 나타나시면서....넌 나보다 낫지 않니? 

내가 이렇게 흉하다고 나를 멀리할래? 

난 네 모습 그대로가 정말 좋단다. 


어느 순간 몸에 대한 컴플렉스가 사라지면서 감추지 않고 내보이면서 다니다 보니까 신비하게도 어느날인지 모르게 몸의 흉한 상처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다니면서 그냥 예수님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니까... 어느 덧 내 모습이 깨끗해진 것. 아직 안 깨끗하더라도 이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부끄럽지 않다. 예수님이 그런 날 사랑하시니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유다와 예수님의 얼굴만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는 정물화의 대가, 즉 모델이 있어야 그리는 사람. 

그런데 유다와 예수의 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성당에 앉아 있는 정말로 빛이 나 찬란하게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그에게 부탁하여 예수의 얼굴을 완성했다. 만족스러웠다. 

유다를 찾아 헤메다가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 감옥을 방문해서 정말 악해보이고 추잡해 보이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영락없는 유다였다. 

그를 방문하여 열심히 그의 얼굴을 스케치하는데 갑자가 그 죄수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왜 그렇세요?" 

"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어요?" 

"예? 무슨 말입니까?" 

"사실은 제가 3년전 바로 예수의 모델로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그 사람입니다." "예?" 

그 사람의 사연인 즉, 예수의 모델이 되고 나서 자랑하다가  마음에 난 정말 예수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사악한 종교집단을 만들며 생활하다가 사람을 죽여서 사형수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화. 


헨델의 메시야 

 헨델은 독실한 신앙인이 아니라 대중의 인기만을 추구하던 음악가였다. 한때 온 영국 국민의 사랑고 명성을 한몸에 받았던 헨델은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혹평과 외면을 당하고, 개최한 연주회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좌절감과 실의에 병까지 들어버린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뇌성마비가 와서 한쪽이 마비되고 얼굴은 굳어지고 그야말로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 때 한 친구가 와서 성탄절 칸타타로 쓸 곡을 작곡해 달라고 했다. 세상을 한탄하며 절망하던 그는 "난 이제 끝이야... 무슨 나에게 작곡을 부탁하냐...."하면서 거절했지만 그 친구는 한 번만 이것을 읽어보면서 결정하게나 하면서 음악의 가사를 주고 갔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53:3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가사를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면서 그 분이, 메시야가.... 나처럼 버림 받았었구나... 멸시를 받아서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았었구나...하면서 복받치는 감정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식음을 전폐하며 24일 동안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작곡한 곡이 메시야... 

그 메시야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메시야의 첫 공연 마지막 우리가 잘 아는 할렐루야의 합창이 울려 퍼질 때 헨델은 감격해서 일어나서 이것은 내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지어주신 곡입니다. 하나님께 영광....그러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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