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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의 근거 (욥 1:8-11)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쓴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토 까뮈는 인간 삶의 실재를 "부조리"라는 말로 정의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일상의 일을 해석하면서 무언가 원리와 규칙을 발견하기 원하고 합리적으로 이해되고 설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도 이 "이성과 합리성"은 가확의 발달과 더불어 근대를 이끌고 왔던 시대 정신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현실 속에서 조명하려 했던 이른바 실존주의자들에게 인간은, 삶은 여전히 설명하기 힘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의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생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성경을 통해, 신앙을 통해 끊임없이 해석하려 합니다. 그 의미를 발견하려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고 그럴 때마다 성경은 어떠한 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세계라 하더라도 언제나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 인생을, 사람을 담고 있기에 까뮈가 말한대로 성경의 이야기도 어찌보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ex)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큰 능력을 부여 받았던 자 (육체적 능력 - 삼손, 지혜- 솔로몬-> 가장 유혹에 약했던 자에게 가장 큰 능력을 주시고 오히려 가장 경건한 자에게는 고난을 주시는 분... (성경 속의 부조리) 야곱을 에서보다 더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던....)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하지만 잘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그 중심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 히브리 밖의 하나님 민족

욥은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성서로서의 욥기는 구약 성경 중 가장 오래된 기록된 문서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 중심에 히브리 민족, 즉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구속사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곳곳에 이스라엘 외부에 있었던 믿는 자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보여 주면서 히브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숨기듯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 모세를 받아 주었던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 (그는 이방의 제사장인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지혜를 알려 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 표현), 바벨론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해방 시켰던 고레스왕, 그리고 예수님의 나심을 알고 찾아온 동방 박사.... 

그리고 동방의 의인이라 불렀던 우스 땅의 욥 - 그리고 그의 친구들... -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깊이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곳 하나님의 계시 -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그 이상의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보여 주시는 것 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고통에 관한 책? 

흔히들 욥기 하면 욥의 고난의 떠올립니다. 욥은 고통의 문제를 가장 잘 다룬 성경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친밀한 몇 구절 외에 둅기를 잘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욥기를 읽으면 괜히 나도 고난에 처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욥의 주위에는 욥의 친구들이 모여 욥의 고난을 가지고 여러가지 이론들을 대고 토론합니다. 


구약의 신앙인들이 믿었던 하나님 - 선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벌을 주시는 하나님 - 인과응보의 하나님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욥의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욥의 세 친구들 -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욥을 방문합니다. 

그들은 악인이 아니라 모두 신앙인이고 욥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위로하러 왔으며 욥의 처지를 보고 자기의 겉옷을 찢고 자기 머리에 재를 뿌리며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칠일 동안 그와 함께 앉아 그와 함께 합니다. 


그들의 처음 행동을 보면 그들은 긍휼을 아는 자요, 고난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요,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7일후에 욥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의 현재가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의 난 것을 저주하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하고 한탄하자 엘리바스와 친구들도 입을 엽니다.  


3장 부터 시작해서 37장에까지 친구들과의 긴 토론이지만 친구들의 이야기하는 욥의 고난의 원인은 다름아닌 욥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요 죄인에게는 징벌을, 의인에게는 상을 배푸시는 분인데 욥이 고난을 받은 것도 너의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욥 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흔히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없나?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성경을 알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나도 어차피 죄인 이니까 어떤 징벌도 달게 받을 만하다 하면서 그 고난이나 형벌을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난 억울하다. 난 죄 지은 것이 없다하면 어리석은 신앙인이요, 아직 자기의 참 모습을 깨닫지 못한 자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욥을 가리켜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거룩한 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교리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의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나은 상대적인 의라고 생각하거나 의례적인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욥의 친구들처럼 욥을 어리석게 볼 수도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순종하고 충성하는 자들에게 상을 내리시고 범죄하는 자들을 벌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당하는 고난은 결국 무언가 욥과 하나님 사이에 고백되지 않은 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욥의 신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욥의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줄 것이다. 이것이 친구들의 논리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때론 욥도 동요되고, 그로 인해 모순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욥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순전한 믿음에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욥이 고난 중에 원했던 것은 세가지 입니다. 

1) 그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거역함 없이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욥 6:8-10]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에 차라리 죽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기쁘게 죽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지지도 않습니다. 사탄에게 고난을 허용하였음에도 그의 목숨은 건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2) 그러니까 이제 욥이 원한 것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해줄 중재자 (판결자)를 원합니다. 

[욥 9:32-33]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 16:20-21]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성령님이 중재자이십니다. 


3) 그 사이에 중보자가 없자 욥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설명을 듣고자 원한 것이었습니다. 

[욥 13:2-3]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욥 31:3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이러한 요구에 친구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미천한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설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욥의 친구들의 반응은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과 변론하리요 하는 겸손함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어떠한 고난을 받든지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요, 하나님이 불합리하다고 여겨져도 따지지 말고 믿으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신앙주의요, 권위주위입니다. 유교문화의 권위주위와 합쳐져서 신앙생활 하는데도 질문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신앙 역시 욥 보다는 친구들의 신앙에 가깝지 않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친구들의 믿음을 책망하십니다. 

(욥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하나님은 교리가 아니다.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는 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 단념하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분개하고 부르짖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인 것이다. 

진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치리

- 욥의 친구들로 하여금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려라. 그리고 욥은 그들의 번제를 받고 그들을 위해 나에게 기도하라. 

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주신지라. 

-> 하나님께가 아닌 욥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친구들로 인해 상처 입은, 상처 입힌 자가 상처입은 자에게 잘못을 빌라는 것입니다. 그럼 상처입은 자의 기도를 통해서 상처입힌 자를 용서하시고, 상처입은 자는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3. 고난의 이유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시지만 그 대답이 욥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되는가?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단지 욥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섭리들을 보여 주시면서 너의 제한적인 지식으로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 내가 하는 것을 네가 다 알 수가 있느냐하고 오히려 질문을 던져 주신다. 


오히려 고난의 이유는 욥에게 가려져 있는 하늘에서의 대화- 사탄과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논쟁이 되는 부분- 하나님이 사탄과 deal하시는 분이신가? 사탄의 계략에 놀아나시는가? 


사탄의 질문 -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체로 사랑할 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가 있고,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는 공격 


순전한 믿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씩 잃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파괴되는가? 

욥은 순전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준다. 


아담과 하와 -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는 시험 

욥- 가장 비참한 처지에서도 그 믿음이 유지 될 수 있는가? 


사탄의 공격 - 상급들을 제거하면 믿음이 무너질 것이다. -> 이것은 조건적 믿음, 환경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의 시험에 오른 욥 


금처럼 정제된 가장 순전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황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침묵되는 상황에서 펼쳐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절정 - 하나님께 버림받는 상황(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것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욥의 친구들의 유혹 

[욥 35:6-7]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욥 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러나 욥의 믿음은 욥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를 지켰다. 욥이 승리하자 사탄이 패배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정확히 답변해주지 않았지만(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그릇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그가 묻자 그의 곁에 나타나셔서 그 분이 여전히 그의 곁에 계심을, 가의 삶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알려 주신다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욥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심을 거두고 하나님을 친밀히 경험한다. 


직선으로 향하는 공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수없이 많은 회전을 통해서 흔들리며 가는 공) 

하나님의 역사 - 역사에 도도히 흐르는 사랑과 공의 

그런데 구체적인 일상에서 경험되는 하나님 


이해되지 않는, 공식적이지 않은.... 

너무 손쉽게 우리는 교리를 만들어 의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삶을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기 보다는 포기하거나 외면하거나 그저 받아들이면서 자기 신앙에 만족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변론하시길 원하십닏. 우리의 물음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경험과 교리에 갇혀 하나님과의 현재적 관계를 놓쳐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론은 밝은데 현재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무감각합니다. 


관계는 공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교리를 넘어섭니다. 사기꾼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42장 1-6절 - 이론적인 하나님이 친히 만져지고 교제하시는 관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