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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교회 (에베소서 4장 11-16절) 


호주의 높은 파도 덕분에 젊은이들 사이에 파도타기 좋은 장소로 알려진 한 해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도가 너무 거세 종종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고를 보다 못해 한 사람이 낡은 모터보트를 수리하여 해변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파도타기를 하다 위험을 당한 젊은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사람에게 구조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해변가에 작은 움막을 짓고 항상 그 안에서 바다를 응시했습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이 사람의 선행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을 돕겠다는 사람과 돈이 몰려들어 오기 시작했고 초라한 움막은 현대식 건물로, 구조 장비는 최신식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정치인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구조한 젊은이들의 부모와 형제들, 친구들이 감사 인사차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간단한 수영복만 입고 있었던 사람은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복장을 갖추어야 했고, 오는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식당을 만들었고, 먼 곳에서 오는 이들을 위해 숙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라했던 움막은 현대식 건물의 해변종합클럽이 되었습니다.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으며, 자신이 죽어가는 생명을 어떻게 구조했는가를 설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이 사람은 온종일 사람들과 만나 식사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시설을 관리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사람은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사람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바다를 쳐다보았던 사람이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바람에 그 순간에도 해변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홍성욱 목사님이 쓴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책에 나와 있는 예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혼구원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겉치장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교회를 비꼬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교회를 걱정합니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고 더 이상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여전히 교회를 걱정하며 때론 비판하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고쳐나가야 하고 무엇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의 내용들은 잘 볼 수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는 신약성서에서 교회에 대해서 가장 깊이, 잘 설명된 성경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읽은  4장의 본문말씀은 아무리 묵상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교회에 관한 정의, 사명,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역할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몸은 철저히 머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즉 주인은, 명령권자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의 말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18절의 말씀은 특히나 그 해석의 차이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회에 대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가톨릭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의 "이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합니다. 

베드로라는 말의 뜻이 반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베드로를 교황의 시초로 교황에 대한 권위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로 이 마태복음 16장 16절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고백을 교회의 기초로 해석합니다. 

만약 베드로를 교회의 기초로 해석한다면 주님이 세우신 열두제자 중의 나머지 열 한 제자는 모두 베드로의 밑에 거하는 베드로 밑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주님의 말씀을 보아도 주님은 베드로를 나머지 제자들의 우두머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동등한 관계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게 있어서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에게 나겨진 권위, 즉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열쇠가 교황에게 있다고 여기는 반면, 개신교에 있어서 교회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요, 음부를 이기는 권세는 교황이 아니라, 목사가 아니라 교회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해야할 교회의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과 삶으로 그들에게 예수의 사명을 나누어주고 예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구원의 사역과 제자, 혹은 성장, 혹은 성화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사역입니다. 

엡 1: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가 하신 일을 믿고 얻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를 주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건이요, 교리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중생이요, 양자된 사건입니다. 

구약의 모세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사건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는 "(출 14:13)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은 믿는 것이고,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의 사역의 시작이지 목적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구원받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니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가 왜 그렇게 악취가 나냐? 구원받은 사람들이 저지경이라면 난 구원 안 받는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오기 전, 방주 안이 살기 좋았을까요, 방주 밖이 살기 좋았을까요? 

방주가 아무리 커도 그 안에 있는 이상 좁은 공간입니다. 각종 동물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물이 새지 않게 약청을 발라 공기도 탁합니다. 악취도 납니다. 

세상은 희희 낙락한데 방주는 짓는 과정도 고통이거니와 그 안에 사는 것도 곤역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니....사람들은 죽는데 방주 안의 사람들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지 않습니다. 죽음이 그 안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첫쨰 모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바라보았고 경험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고난도 곧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고난이 있기에 그들은 부르짖었고, 고난을 통해서 그들은 출애굽했습니다. 

홍해를 건넘으로 그들은 애굽의 땅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툭 하면 얘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는 먹을 것도 풍족했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날 여기서 죽이시나보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도저히 구원받는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모델은 이 광야이고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교회 안의 성도입니다. 


여기에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중생, 구원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Follow Christ, Imitate Christ)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의 최고 목적이고 방향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Union with God) 이 그들 신앙의 최고 목표입니다. ,

그래서 죽기까지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애씁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의 완성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도저히 완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살아도 주님 앞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옥이라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땅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얘쓰다가 그 부족한 공간은 매우는 장소가 연옥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중생하는 순간 이미 연합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연합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내 마음대로,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중생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 성화입니다.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실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과정이 성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목적지인 가나안까지 들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광야가 바로 성화의 장소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성막을 짓도록 하십니다. 예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사역은 바로 이 성화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부터 15절 까지는 이 성화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엡 4:13-엡 4:15]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믿는 것은 예수가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은 그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내가 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모델과는 다른 예수의 사역의 새 지평을 보게 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모세나 여호수아, 다윗과 엘리야 같은 지도자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 인도하면 순종하면 복, 불순종하면 저주가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하나님을 더 알려고도, 심지어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닮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겐 항상 제사장이나 선지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보려고도, 또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상역을 다 보여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쫓고, 오천명을 먹이시는 현장에 항상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손수 귀신을 쫓고, 말씀을 선포하며, 심지어 오천명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너희가 주어가"하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함께 사시고 또 훈련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80년대, 90년대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의 바람이 불면서 예배의 목적, 교회의 사명이 이 성화에 맞추어지지 않고 구원 사역에 맞추어졌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예배나 교회가 앞장섰습니다. 

그게 무슨 잘못인가 생각하겠지만 구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접하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구원사역은 그냥 선포하는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닌 믿지 않는 사람들의 호감을 주기 위한 예배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구원은 주가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요, 교회의 더 크고 중요한 사역은 구원받은 자들을 훈련시키고,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끼자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진단하며 학자들이 판단하는 잘못된 두 가지 형태의 교회가 있는데 하나는, 피라미드형 교회이고, 또 하나는 버스형 교회입니다.

1.피라미드형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목사가 앉아 있고 직분자들이 그 밑에 서열대로 자리 잡고 있는 교회형태를 말합니다. 맨 꼭대기에 30년 넘게 교회 다닌 사람이, 그 아래에 20년, 10년 … 

맨 아래에 교회 등록한 지 얼마 안된 사람이 있어서 새로 온 사람이 뭐 좀 하려고 하면 ‘교회 온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피라미드형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교회의 직분이나 경력을 사회의 직위처럼 생각하고 으스대고 목에 힘주고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를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직이 잘 정리되어있고 일사분란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톨릭의 모델이 이와 같을 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 곳,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도 하며 섬기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사회조직과는 다릅니다. 


두 번째는 버스형교회입니다. 

‘버스형’이라고 하는 것은 목사 한 사람이 운전하고 성도들은 버스에 탄 사람들처럼 밖을 내다보며 세상을 즐기거나, 세상 모르고 졸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물론 그 버스는 목표를 향해 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버스에 탄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버스 운전사 같은 목사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되면 그 버스에 탄 성도들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는 목사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모델이 이와 같습니다. 모세에게만 의존하고 여호수아에게만 의존합니다. 그들이 죽으면 방황하고 헤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이런 모델을 따르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모든 권한을 주다가 목회자가 넘어지면 일어서질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흔히들 목사를 제사장에 비유합니니다. 특별한 임무와 직임을 강조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만인 제사장과 직업소명설입니다. 

성도들 모두가 거룩한 나라요 제사자으로 부름 받은 것이고, 목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직업이 주 안에서 거룩한 성직인 것입니다. 


전통에 사로잡혀 질식할 것 같은 교회를 운동경기에 비유하면 선수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만 교회라는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성도들은 관중이 되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보는 중에 목회자만 북 치고 장구치고 재주를 넘는 경기를 한다. 관중들은 다만 선수가 잘하면 박수치고 못하면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데 성경적인,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에서의 선수는 바로 성도들입니다. 집사, 권사, 장로들이 선수들이며 목회자는 코치일 뿐이니다. 그래서 선수들을 발굴해 뛰게 하고, 세상은 경기장이 됩니다. 그리고 관객은 교회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이다.

 

같은 꿈을 꾸어야 한다. 지도자와 회중이 같은 비전 안에서 하나 될 때 그 회중, 민족, 공동체는 부흥하게 된다. 아무리 리더가 탁월해도 바르게 따르는 이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리더가 못났어도 선수들이 탁월하면 그 공동체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의 건강한 성도는 서로 간의 직분이나 직임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성경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은사에 따라’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성경에 교회의 본질을 설명할 때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에 나오는 ‘몸의 비유’를 말합니다.

우리 몸의 어떤 지체도 다른 것과 비교하여 ‘너는 이것보다 못하다’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지체들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몸의 지체는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 비교의식이 가득차 있지만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비교하여 상하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보다 귀하고 누가 누구보다 덜 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엡4:11~16)에서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서로 다른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성도들이 목회하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성도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건강한 성도는 교회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까? 

교황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하고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했기 때문에 저항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의 세가지 모토 아래 직업소명설과 만인 제사장을 회복시켰습니다. 

성직자들만 읽었던 성경이 모두에게 열렸으며 성직자들마 알아들을 수 있었던 예배의 언어도 일반인이 함께 하는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모두가 예배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어느 때 부턴가 가톨릭 못지 않은 성직자의 권위,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기 시작. 

물론 목사는 영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영권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대언하는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 받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 세워줄 수도 없고 억지로 세워서도 안됩니다. 


난 2012년 목회를 시작하면서 성도같은 목사, 목사같은 성도가 되는 교회를 꿈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섬김의 목회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임과 동시에 성도님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고 싶은 훈련자로서의 기대와 소망을 품고 드린 말씀입니다. 

이제 사역의 방향을 여러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는 교회가 되도록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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