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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단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여호수아 전체의 내용 - 가나안땅 정복. 가나안의 의미가 무엇인가? 

 

가나안 : 어떤 이는 행복, 어떤 이는 축복, 어떤 이는 물질적인 축복만을...어떤 이는 유혹...간단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땅. 

             지금의 이스라엘 전체의 땅. 그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 - 하나님의 임재, 통치.

             그러나 그 땅 자체가 복이 아니다. 그 땅은 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물리적인 예루살렘 땅은 물론 선택받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땅은 불모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선민, 집착, 신앙이 강헀다. 

              북왕국이 망했을 때에도 예루살렘이 있는 남왕국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도 불타 없어졌다. 

              

             그러나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그 땅 자체가 아니다.  -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든 하늘과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가나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누구의 입술을 통해 하는가? 바로 라합이다. 

             (수 2장 11절)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문제는 가나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곧 가나안이다. 내가 어떤 가나안을 생각하는가가 내 신앙의 특징을 보여 준다. 

             가나안이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엄밀히 말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된다. 복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그 복은 곧 깨어졌던 하나님 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부재가 어떤 고통을 가져다 주는 줄을 삶을 통해 제험하고 그 은혜를 체험한다. 

             그런데 큰 아들은 한시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큰 아들에게 가나안은 빨리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왕이 될 때 까지만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신앙의 여정에 가나안은 유혹이고 타락을 가져다 준다.            가나안을 얻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건 축복이 아니다.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다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기독교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유럽, 미국, 한국 교회 모두가 가나안 이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한다. 

             

 2. 하나님의 계획, 준비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하다. 

 첫째, 사람을 세운다. 모세를 잃고 무너져 있던 여호수아를 일으켜 세운다. 

           1장에서 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는 철저히 모세와의 관계 안에서 훈련된 자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 할 때에 삶의 전쟁터에서 최선을 다했고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머물었고 모세를 떠나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 그리고 모세가 죽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한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하게 한다.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 사람과 동역한다.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이다. 

             맡긴 자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이다. (고전 4:2) 

 둘째,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들에게 명령하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은 사흘 양식(사흘- 십자가의 시간, 죽음의 시간; 양식- 고난을 이기는 힘은 믿음, 믿음은 오직 말씀으로부터...그렇게 때문에 사흘 양식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말씀으로 준비하라는 것이다.) 을 준비하고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를 통해 자기 목적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이 땅과 안식이다. 

             땅이 주어졌어도 안식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는 평안하다. 안식이 주어진다. 

             

 셋째, 2장에서는 그 땅을 정탐케 한다. 12명 대신 하나님께 집중된 2명의 사람을 보낸다. 

             그리고 라합을 만나게 한다. 정탐꾼이 가서 한 일은 라합을 만나서 함께 머물고 라합을 말대로 사흘을 산에서 피신했다가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2명의 정탐꾼은 라합을 통해서 여리고성의 상태를 보았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았다. 

             처음 12명을 보냈을 때를 기억하라. 

             그들은 좋은 땅을 보았고 열매를 보았다. 그 다음 본 것이 그 나라 사람의 장대함과 자기 자신을 보았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함께 보았지만 다수는 부정적인 것 때문에 좋은 것을 포기한다. 사람의 생각은 항상 부정이 긍정을 이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메시지, 약속, 보장을 발견한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산에 밝은 사람은 오히려 신앙에 실패하는 자들이 많다. 

             믿음은 여러 사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다. 

             말씀은 늘 해석이 동행한다. 

             누구에게나 말씀이 주어져 있지만 그 말씀을 붙잡는 자만이 레마를 경험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다. 

             

  • 1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광야의 역사는 새벽의 역사다. 새벽에 홍해가 갈라지고 새벽에 만나가 내리며 새벽에 요단을 건넌다. 새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성실한 믿음 가운데서 역사된다. 게으른 자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자는 곧 부지런한 자이다. 움직이는 자이다. "깨어 일어나"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이다.  아침형 인간....한 때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거기에서 말하는 것-> 인간의 싸이클이 자연의 싸이클에 맞추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는 것이 자연의 싸이클이고 곧 인간의 싸이클이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이 싸이클을 깨어버린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시작해서 육체적으로도 건강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 2절: 사흘 후에- 계속적으로 사흘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신앙은 계속적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사도바울 처럼 날마다 죽지 아니하면 또 넘어지고, 불평하고, 절망한다. 


  • 3~5절: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나아가라 하신 분께서 갑자기 멈추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이제 떠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이 변화 무쌍한 세상에 변함없는 말씀이 변화한 것처럼 감각되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6절: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실 수 있도록 

->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임재, 그가 앞서가게 하라. 자신이 먼저가지 말라. 말씀을 따라 가라. 기다리고 인내하라.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라. 

                 백성들에게: 성결하라.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진군하라.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땅에 가기 위에서는 나의 장막을 떠나야 한다. 내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고 있는 내 안의 안식처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 -> 여호수아 -> 제사장 -> 백성

은 신앙생활의 지휘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개신교인들마저 제사장을 목사로서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하라고 교육을 시키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개신교의 교리는 만인 제사장이다. 

카톨릭이 구약을 모델을 따라 모세나 여호수아, 혹은 제사장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중시한다면 개신교는 

벧전 2:9절의 말씀을 따라 우리 성도 모두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 

목사의 사명은 제사장이 되어 아둔한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각자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돕는 자, 함께 하는 자, 때로는 가르치는 자, 연결하는 자이다. 

그러면 성도 각가 우리 안에 말씀의 사람이 되어 백성의 상태에서, 말씀 안에 거하는 제사장의 상태로, 내 가족과 내 이웃을 인도하는 여호수아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동체의 지휘 혹은 계급 체계가 아닌 개인 안에서의 영적 상태, 요한이 말한 아버지의 믿음, 청년의 믿음, 어린아이의 믿음의 상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1) 구원받을 때를 기억해 보자.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삶은-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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