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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세례 (욘 2:1-4)


[욘 2:1-4]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1장의 요나 -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뜻이 임했을 때에 나의 기준, 나의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그리스도인...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는 대신 반대편의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가고 배 밑으로 내려가고 바다 밑으로 내려가고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갔던 요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기준, 우리의 판단, 우리의 이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상황이 이렇게 내려가던지, 영적인 상태가 이렇게 내려가게 된다. 1장의 요나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리스도를 주라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실재로는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하는 입술신앙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 1장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암울하고 긴장되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 바로 1장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2장의 분위기는 1장과는 사뭇 다르다. 2장에는 평안이 있고, 감사가 있고 눈물이 있고 회개가 있는 장이다. 왜 이렇게 분위기의 차이가 나는가? 

2장의 요나의 삶에 있어서 귀중한 전환점이 되는 장이다. 고난 중에서 일어서는 장이 바로 2장이다. 


1장에 쓰이는 동사 – 3절) 피하고, 도망하고, 내려가고 (5절)내려가서, 잠이 든지라. (10절)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고 (12절)바다에 던지라 

2장(1-4절) 에 쓰인 단어 – 기도하여, 불러 아뢰었더니, 부르짖었더니, 내 위에 넘쳤다. 성전을 바라보겠다.  


일어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요나는 1장의 암흑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가? 상황만으로 본다면 2장의 상황은 1장의 상황보다 훨씬 더 어렵고 깊은 절망의 상황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이나 갇혀 있는 상황이 이때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곳에서 요나를 일어나게 하였는가? 


1. 기도 이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1장은 고백은 있지만 회개가 없고, 질문은 있지만 기도가 없다. 

1장을 잘 살펴보면 그 곳에는 기도가 없었다. 9절에 보면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소개했지만 자신이 누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백했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다에 빠지는 상황에서도 그 죽음의 상황에서도 그는 오히려 죽기를 소망했지 기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기도를 요나가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살 가능성이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시작했다. 죽은 요나가 비로소 호흡하기 시작했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요나는 도저히 숨 쉴 수 없는 공간에서 호흡이 시작되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요나는 비로소 숨쉬기 시작한다. 성서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그것을 읽고 교훈 삼아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고 적어도 그러한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우리 삶의 매뉴얼, 설명서이다. 


1절의 ‘기도하여’의 단어는 히브리 시제로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아직 완료되지 않고 진행형으로 씌였다. 계속 기도하였다는 의미이다. 어려우니까 한 번 하고 끝난 기도가 아니라 응답이 임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무언가 평안이 임할 때까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임재하실 때까지 기도했단 말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며칠 동안 있었는가? 3일 동안의 기간은 성경에서 완전히 죽는 기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걸어갔던 기간이 3일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기간이 3일이다. 요나는 언제까지 기도했나? 불순종했던 자신의 모든 것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도했고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여 응답할 때까지 기도하였다. 


우리도 형식적인 기도는 늘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한다. 1장과 2장의 차이는 무엇인가?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요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우리는 상황이 달라지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기도해서 달라지는 첫 번째 것은 상황이 아니라 나 자신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 삶의 방향이 바로 잡히고 내 시선이 주께로 고정되는 것이다.  


2. 요나가 고난 중에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했다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 - 하나님 여호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항상 하나님... 

여호와 ->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내가 기도하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기도의 방법과 태도는 무엇인가? 

약속, 언약, 성취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절대로 형식적으로 기도해서는 안된다.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확신의 기도를 해야 한다. 

2장의 분위기 전환은 하나님께서 내 음성을 들으신다는 확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태도가 바뀌고 마음가짐이 바뀌니까 심판의 하나님, 징벌의 하나님은 사라지고 약속의 하나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온다.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내가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니까 피하려고 했던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1)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인데 기도가 없다는 것은 영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다.  

2) 상황의 변화가 없어도 여호와의 언약을 확신 할 때 변화의 시작이 나타난다. 


예수 믿으면서, 신앙생활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 바빠서, 힘들어서, 눌려서, - 아무리 직분이 높고 교회 출석을 해도, 기도 안하면 죽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밑바닥까지 내려가도 치고 올라갈 근거가 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거기까지 내려가지 말라고 하는 거다. 거기까지 가면 너무 힘드니까..본인도 힘들고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도 너무 아프니까 바닥까지 내려가지 말고 먼저 기도하라는 거다. 그런데 안된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으면 세상의 방법을 취한다.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고 하는데도 기도 안하고 해결되는 불가능한 방법을 취한다. 한번 기도해서 안되면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절망한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게 기도해라. 네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나에게 기도해라. 너의 기도를 듣고 반드시 응답하는 내게 기도하라....


[시 86:1-4][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I am devoted to you)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엄살이 아니다. 다윗은 어느 순간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응답을 구했다. 왜 

(시 86:10)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3.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갔다. 

요나서 1장 1절이 시작 -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 

-> 말씀을 던지고 자기 기준과 자기 생각대로 내러감...

요나서 2장 -> 시편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도 -> 말씀이 중심이 된 기도. 요나의 기도를 가지고 쓴 논문- 그의 기도는 시편의 요약이다!


2장의 2절 처음은 시 3:4

2절의 하단절은 시 18: 4-5, 30:3

3절의 처음은 30장 6-7절

3절 후반절 – 시 23:5 

4절의 처음은 31:22절, 4절의 하반절은 시 5:7절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감정적인 기도보다 능력 있는 기도는 말씀을 붙잡고 하는 기도, 이것이 한다고 나오겠는가? 하나님을 피하기 전 평상시 요나의 신앙이 드러난 기도이다. 


요나의 상황, 인간적인 기도 -> 나 죽겠어요, 살려주세요, 냄새나요

-> 문제에 대해서 탄원하는 기도에 그칠 것이다. 

요나 : 상황적, 감정적이 아닌 말씀의 기도를 드린다. 


-> 그래서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말씀 속에서 살아야 한다. 위급한 순간에 닥쳤을 때에 신앙의 근본이 드러난다. 

기도는 호흡이면 말씀은 양식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이 메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와 말씀으로 날 채워 놓아야 한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훈련,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훈련...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호흡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기 시작했다. 


4. 요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인정했다. (3절) 

내가 중심일 때 ->모든 것이 어렵고 짜증난다. 나는 보이지 않고 상황과 상대방만 보인다. 

하나님이 중심일 때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나를 발견한다. 

기도와 말씀이 회복되어지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우연과 행운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섭리이다. 

세상의 문화는 우연과 행운이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 기대하고 일확천금을 꿈꾼다. 

그리스도인에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따라 오게 된다

말씀과 기도가 전제될 때 나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되고 인정된다. 


5.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나님께 화해와 용서를 구한다. 이제 내가 돌이켜 주를 바라보겠나이다. 고백하는 것이다. 믿는 다고 하면서도 자신만 바라보던, 자신의 생각만으로 살던 요나가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눈을 돌린다고 고백한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하는 고백이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은 바라보는 데에 있다. 가장 밑바닥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인 호흡을 하고 양식을 먹고 있는가? 

나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는가? 섭리로 인정한다는 것은 고난일 찌라도 나에게 유익함을 인정하는 거다. 선하신 하나님의 일을 고난이고 아픔일지라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거다. 

나는 날마다 주의 전을 사모하고 있는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가? 형식적인 것에 만족하고 예배드린 것에 만족하고 기도드린 것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할 때 너무 쓸데없는 말, 의미 없는 말이 넘쳐나지는 않은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 해결책이 있다. 


카타콤, 초대 교회 순교자들이 묻힌 지하묘지이며 박해받던 성도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그곳에 가면 조각이나 벽화들을 볼 수 있다. 고난의 극심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며 신앙을 표현했다. 주로 예수님과 관계된 그림들 사이에서 뜻밖의 그림들이 눈에 띄는데 그것이 바로 요나의 그림. 요나가 바다에 던져 지는 모습, 요나가 다시 뭍으로 나오게 되는 모습.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그린 그림에서 요나는 자주 나신으로 그려진 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요나가 벌거벗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데 초대교회 박해받던 신앙인들은 요나를 그리면서 자주 나신의 요나로서 묘사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요나를 영세자, 즉 세례받는 사람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 때는 세례 받는 이들은 거의 옷을 벗은 채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세례는 벗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사람을 입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물 밖으로 나오는 그들은 새 옷을 준비해서 입었다. 그렇게 그들은 거듭나는 의식을 치렀다. 카타콤 벽에 그림을 그려 넣은 그 신앙의 아티스트들은 요나, 바닷물 속에 던져졌다가 다시 물 밖으로 나오게 된 요나를 그런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보았다. 요나 이야기를 그들은 그들이 받는 세례의 영적 의미를 밝혀주는 이야기로 읽으며 그들의 박해를 견뎠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3절)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지금 물이 자기를 덮쳤다는 소리이다. 

그 물은 어떤 물인가? 고난의 물, 사망의 물, 환란의 물이다. 파도이고 폭풍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이 나를 덮쳤다고 표현은 해도 내 위에 넘친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넘친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긍정의 표현이다. 

은혜가 넘친다. 사랑이 넘친다. 기쁨이 넘친다 그렇지 요즘 내 주위에 사탄의 역사가 넘쳐나...그렇지 않는다. 


(시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는 것,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다. 바로 성령의 세례이다.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서 성령의 충만함,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상에, 욕망에, 불순종에, 자기 중심적인 자기는 죽이고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신자로 거듭난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