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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 6-11절  좁고 좁은 우리를...


요나는 사울이나 혹은 가룟 유다와 같은 그런 악인이 아닙니다. 사탄이 그를 지배해서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며 반대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사역에서 실패하며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되는 것은 그의 마음과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느 회사건, 무엇을 연구하는 기관이건 중요한 것은 주인과 종, 혹은 교수와 제자가 마음이 맞는 것입니다. 그들의 각자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이 서로 가지고 있는 마음이 다를 때에는 일이 제대로 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마음은 무엇입니까? 온 세상을 구원키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씩 사람을 세워가시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또한 그대로 실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다름 아닌 온 세상을 구원코자 제자들을 뽑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인드, 하나님의 생각을 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의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에서 벗어나자 가는 동의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대로 살던, 육신을 쫓고, 자기의 목적을 쫓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곳으로 가라. 

나의 처소를 떠나 그 분을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 내 목적을 위해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 그 분의 목적이 곧 가장 완전한 내 삶의 목적이요, 그 목적을 향해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하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이 뜻과 내 뜻이 부딪칩니다. 갈등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뜻과 그 분의 뜻이 부딫칠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비둘기 같은 온유함의 대명사였던 요나의 생각이 하나님과 갈등을 일으키자 요나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그의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분노하고, 반대길로 가고, 잠을 자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하나님은 질문하시고, 말을 거시고, 준비하시고 계획하십니다. 일방적이 아니라 항상 균형자가 됩니다. 때론 기다리고, 때론 따끔하게 질문하시고, 그리고 징계하시기도 하지만 징계를 넘어서는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또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계획하십니다. 박넝쿨은 요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어떤 은혜인가 알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대낮의 더위를 우리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면 반드시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광야를 지날 때는 항상 냉방이 되어 있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날씨가 비교적 괜찮은 날이면 기사가 중간에 멈추어서 한 100M정도를 걸어보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한 100M쯤 먼저 가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이 할 수 없이 걸어서 거기까지 가는데 그 100M 거리 사이에도 푹 푹 쓰러지는 사람들이 반드시 발생한다고 성지순례 같다온 사람들이 전해줍니다. 중동 지방은 더운 지방 사람들인데 복장을 보면 항상 두건을 두르고 옷도 치렁치렁 하게 다니는데 여름에 짧은 티 짧은 바지만 있는 우리들은 그들이 이해되지 않지만 그렇게 입지 않으면 뜨거운 햇빛에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입는 것입니다. 그곳은 아무렇게나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박넝쿨은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상황과 여건을 이용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우리나라에서 박넝쿨 주어받자 그리 큰 은혜는 되지 못하지만 그 지방에서 그 시간에 박넝쿨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참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욘 4: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요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물론 더운데 박넝쿨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한마디도 감사하지 않고 그저 그 박넝쿨로 인해서만 기뻐합니다.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오직 박넝쿨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과 뜻이 통했다면 하나님 감사해요라고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텐데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박넝쿨 아싸하고 좋아했지 하나님께는 한마디 감사의 표현이 없습니다. 


적어도 선지자면 기쁨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오직 박넝쿨 때문에만 기뻐합니다. 현대 대부분 교인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박넝쿨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지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나오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넘쳐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모든 기쁨을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작은 일이라도 기쁜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람과 상황으로 생긴 기쁨으로 기뻐하다가 곧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넝쿨이 우리에게 계속적인 기쁨을 줄 순 없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에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드리십니까? 아니면 단지 그 축복이 좋아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떤 것을 바라는가? 하나님 자신을 바라는가? 


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금방 야단맞아 놓고도 피자 사주고 과자 사주면 금방 웃고 좋아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10살, 20살이 되었어도 단지 혼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과자 때문에, 피자 때문에만 금방 좋아하고 그런다면 얼마나 유치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교회 나온 지 10년, 20년이 되었어도 아버지의 그 마음과 사랑을 몰라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박넝쿨만 보고 기뻐하면 박넝쿨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박넝쿨을 다시 걷어 가십니다. 왜 걷어 가십니까? 하나님은 우상을 제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박넝쿨을 더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박넝쿨을 걷어가더라도 하나님의 의지와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축복받으면 우리 인간에게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열심히 기도하긴 했구나, 내가 한 행동이 인정받았구나,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칭찬하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가나안이 우리 신앙의 목적지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구약은 끝이 났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면 가나안에서 성경은 끝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복에 취해서 하나님을 일어버리니까 애굽보다 더한 고통이 가족끼리 죽이고 민족끼리 전쟁하는 그런 아비규한의 역사가 다시금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복이냐 하나님이냐의 선택의 순간이 주어집니다. 범죄하는 백성들을 변호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네말대로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그런데 더 이상 나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에 눈이 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가나안을 택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왜 이런 과정을 거치는가? 

우리의 신앙이 복에만 관심이 맞추어져 있을 때에 항상 넘어지는 것은 ‘나’의 문제, 요나의 문제 

나에게 영광을 돌리고 나를 위하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 신앙, 

그 “나”를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연단....연단 중에도 내가 깨지지 않는다면 아직도 먼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요나의 마음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요나 입장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겠냐? 

아니 쪼잔 하게 줬다가 빼앗냐? 하나님께 분노하고 대든다. 모든 일들을 나에게 맞추면 우리는 하나님께도 욕하고 대드는 신앙을 가진다. 


요나는 선지자였다. 선지자는 남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이다. 그런데 자기 삶에 적용하지 못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신 것은 무엇이고 그리고 빼앗아 가신 것은 무엇인가? 왜 빼앗아 가셨는가?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분대며 이젠 하나님 위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고 떼를 쓸 때에 박넝쿨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 없인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 없이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박넝쿨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많은 모습들이 하나님을 찾기보다 박넝쿨로 인해 기뻐하는 신앙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내린 은혜, 복일찌라도 우리가 그 뒤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기뻐하면 바로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그 은혜를 받는 나의 모습에 따라서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좋은 직장을 주셨는데 그 직장에 얽매여서 신앙생활 잘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우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좋은 학교 들어갔는데 학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신앙생활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기도할 때에 복받기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복을 담을 수 있는 믿음을 위해서, 복 받아도 더 열심히 하고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좀 생활이 피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더 열심히 봉사하며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못하는 이유가 여유가 없어서, 살기 힘들어서라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날 잘 아는 사람이라면 좀 여유가 생기면 기도하기 보다는 놀러다니고 다른 사람들 만나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10만원 있을 때는 쓸 것을 바라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100만원 수입이 생기니까 10만원 벌 때는 생각도 못한 것을 쇼핑하고 다니면서 써버리는 경험을 다 해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복을 사모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복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히 할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준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박넝쿨을 거두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우상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은 준 복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주시는 것도 우리를 사랑해서고 거두어 가시는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7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벌레는 미천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찬양하며 우리를 낮출 때에는 벌레만도 못한 나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기대고 있던 복인 박넝쿨을 그런 미천한 벌레가 취해갑니다. 그럼 요나가 기대고 있는 복인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미천한 벌레가 취해 갈 수 있는 벌레보다 못한 허무한 것입니다.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는 복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는 모든 것이 마치 이 박넝쿨 과 같습니다. 하루 아침에 없어질 허무한 것이 세상의 복입니다.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위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 가운데 사십년을 헤메었지만 그 땅에 들어가도 하나님을 놓치니까 행복이라고 믿었던 땅이 지옥과도 같은 음란한 땅이 됩니다.  


삼상 20장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바로 하루 전에 850명의 이방인 선지자와 겨루어 당당한 승리를 거둔 불세출의 장면을 연출한 엘리야가 오늘은 여왕의 협박에 도망하여 광야로 숨어버립니다.  

신앙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인데 그는 큰  일을 치룬 뒤에 그에게 닥쳐온 작은 문제로 인해 숨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인은 문제 때문에 광야로 숨어서도 안되고 일순간의 쾌락 때문에 좌지우지되어서도 안됩니다.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 인도, 간섭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인가? 모든 일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도망하거나 다른 것에 집착하지 않도록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묻고 대답하며 기도하야 한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럴땐 어떻게 하지요? 이 일이 나에게 왜 일어났지요? 

-> 항상 모든 일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었던 박넝쿨이 사라졌을 때에도 

“나 이렇게 뜨거운데 박넝쿨이 사라졌어요.. 이제 어떻게 하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요?”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께 물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물음에 응답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깨닫지 못한 잘못을 생각나게 하시고 고치게 하시고 다시금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묻지 않는 것은 내가 힘들어도 어려워도 난 나를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넝쿨이 사라지자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는데 뜨거운 동풍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벌하시기 위해 준비했다기 보다는 중동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현상이다. 그늘이 없으면 당연히 생기는 중동의 뜨거운 바람이다. 


박넝쿨이 있을 때에는 햇볕도 가리고 뜨거운 바람도 가리지만 은혜를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는 무엇인가? 사탄이 지배하는 자연상태가 바로 지옥 아닌가? 롬 1장과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사 ”라고 말씀하신다.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결과는 괴로움이고 눈물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가 심판 당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 그대로가 우리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한 시도 살 수 없다. 

은혜 밖의 세계는 벌레가 있는 세계이고 동풍이 불어오는 세계이다. 


내가 만족스런 신앙생활이 아닐찌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 밖에서 드러난 요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내가 고생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한다.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지요?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자기가 당한 고난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니느웨 백성이 저렇게 은혜를 받지요? 자신은 다 잘하는데도 고난을 당하고 니느웨 백성들은 죄인인데도 복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든 생각이 은혜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다 욥처럼 우매히 당하는 고난이고 남이 받는 은혜는 다 이해 못할 은혜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핵심을 찌르는 마음이다. 

11절 

“너랑 상관없는 박넝쿨도 아끼거늘 니느웨 사람도 내 자녀들이란다. ”


사람의 좁은 마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넓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들이 죄를 많이 지었어도, 날 떠나고 우상을 숭배했어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이라도 돌아와 내 안에 거하여 복을 받는 것이다.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간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어서 들어와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끝난다. 

왜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만을 남기고 끝이 나는가? 성경에서 끝이 불명확하게 끝이 나는 경우 그 끝맺음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다 요나다. 우리는 다 요나같이 불순종하며 요나같이 성내고 요나같이 좁은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과 수평을 달리는 과정을 지났거나 혹은 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들이 회개한 요나가 되어서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고 계신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극단의 길을 달려갈 때가 많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물어오시길 바라신다. 해답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왜 묻지 못하고 극단의 길을 가는가? 

절대로 감정적으로 이끌리지 말라. 감정은 항상 내 중심적이고 욕망에 이끌린다. 나는 잘하니까 문제를 다른데서 찾으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냐? 네가 내 마음을 아냐? 

네 마음이 너무 좁은 것 아니냐? 


어릴 적 찬양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와 하늘 그 보다 높고, 바다 그 보다 깊고, 우주 그 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그런데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그 크신 하나님께서 요나와 같이, 아니 요나보다 훨씬 더 좁고 좁은 나와 함께 동역하기 위해서 씨름하시고, 함께 하시고, 기다리시고 끝까지 인내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해 길을 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하면서 이제 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도대체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무시하고 누가 더 큰지, 그 나라 가면 오른편 왼편 앉게 해 달라면서 자기들끼리 다툴때에도 주님을 그들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발을 씻기고, 식탁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라고,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죽어도 배신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물고기를 잡아 먹이시고, 자기 자신 조차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사람은 믿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게하신다. 

우리는 주님이 믿을 수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실패하고, 배반하고, 원망하고, 넘어져도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어주신다. 

좁고 좁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담기 위해서는 꺠어져야 한다 

그릇은 깨어지면 못쓰지만 성도는 깨어져야 쓰신다. 꺠어질때만 그 분의 크심을 담을 수 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