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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장 7-10절 입술로만 하는 회개


구원받은 신자들도 회개하여야 하는가? 왜 교회는 날마다 성도들에게 회개를 말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한번 복음을 믿었으면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은 후에도 회개한다면 그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증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대표적인 곳은 구원파다. 그러나 구원파 뿐만 아니라 기성 교회 안에도 이러한 생각이 교리처럼 자리 잡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우리 개신교는 신학적으로 회개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믿음은 중생, 거듭남의 전제 조건이요, 시작점이다. 

세례요한도 예수님 자신도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이전에 먼저 회개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회개가 믿음보다 앞선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그럼 이제 회개함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에게도 회개가 필요한가? 

물론이다. 웨슬리는 <신자의 회개>라는 기독교의 고전과도 같은 유명한 설교를 남겼다. 

왜 한번 중생한 자가 계속적으로 회개해야 하는가?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회개와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계속 머무르고, 계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즉 성화의 과정을 위해서도 회개와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죄에 대한 책임으로 자유로워 졌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죄의 영향력, 죄성, 죄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을 의식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비쳐졌다. 우리는 순간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우리의 불법이 사함을 받고 우리의 죄가 가리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롬 4:7).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내용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 완전히 성화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 사람들은 모든 죄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입을 때에 완전히 없어진다고 믿으며 이것을 열심히 주장한다. 신자의 마음속에는 죄가 없으므로 그 순간부터 온전히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이나 우리의 체험과 이성과도 다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해 느끼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지만 정욕으로 인한 죄를 짓는다. 예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나는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죽노라 하고 말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한다. 원하는 의는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한다. 예수 만나 거듭난 이후의 일이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때의 회개와 다른 신자의 회개, 성화를 위한 회개이다. 


요나서는 특별히 선지자, 즉 신자의 죄를 다룬다. 중생한 신자가 회개해야 할 이유는 신자의 회개를 통하여 성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계속적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죄에 대해 눈감아 버리고 자만과 고집과 태만과 유혹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요나를 죄인의 관점에서 다가가 보자. 

그는 선지자였다. 요즘말로 말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교회 생활 잘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회의 일꾼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죄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 기준과 선택에 의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먼저였다. 말씀으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씀을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자기가 하기 좋은 것은 열심히 했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따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큰 죄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가 판단하면서, 부리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자기 뜻에 맞으면 말 듣고 안 맞으면 안듣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연약함이다. 요나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요나는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어디 요나보다 거룩하고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광야의 과정이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연단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신자의 죄를 그냥 넘겨 버리시지 않으신다. 예배 잘 드리니 눈감아 주겠다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때까지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기다려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선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와 함께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나가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 무작정 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범죄해도 죽기 직전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분이다. 탕자가 돌아오기만 하면 상거가 멀어 우리가 볼 수 없을 때에라도 먼저 우리에게 달려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 (왠만큼 기다려서는 탕자가 돌아올 때 탕자는 오직 집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그리며 올 것 이고 아버지는 할 일도 많으신대도 먼저 발견하는 것은 아들이 아닌 아버지시다) 

그래서 먼저 4절부터 6절까지 대풍과 사공과 선장을 통해서 기회를 주신다

환경을 통해서, 내가 믿었던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의 입술을 통해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라는 말로서 기회를 주신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내가 지금 징계를 당하고 있다,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징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징계의 뜻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오해할 수 있다. 요나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징계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제 선장까지 나서서 이야기를 한다(6절). 이제는 극한 상황까지 가서, 계속 상황을 조여 가시는 데에도 요나는 알지 못한다. 이방인 선장이 직접 요나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도 요나는 깨닫지 못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죄 지은 자가 죄가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또 그 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숨어지내는 모습과 똑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라. 죄를 지어 거리낌이 있어도 발각되는 순간까지 끝까지 부인하며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죄를 숨기려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인내하시면서 죄인이 죄를 갖고 돌아올 때 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기다리신다.

   죄 지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십자가 보기가 싫다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1:1의 관계이다. 원망을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꿔주신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 만나는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너무 알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자신이 변화될 것을 아니까, 자기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것을 아니까 아얘 도망을 가는 것이다. 그냥 있어도 되는데 구태여 다시스로 가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안 만큼 내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식대로 배우고 그 지식이 내 삶에 드러나고, 그리고 그 기준을 맞춰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자화되어져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자칫하면 요나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쓰이지 않고 죄 짓는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큼 무섭고 잘못된 것은 없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죄를 지었나? 너무 잘 알아서 그것을 다 지키는 것 같은데 그 사이 사이를 다니면서 자기들을 드러내며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것들이 바로 바리새인이 아니었나?

   ex) 요즘 - 검사, 부장판사, 변호사- 사회적 큰 물의-> 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법을 너무 잘 아니까 그 사이를 피해다니면서 온갖 상상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재판가면 처벌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  우리가 지은 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한테?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지은 죄를 반드시 찾아내시고 드러내신다. 

   

   오늘 이 죄인을 찾아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비뽑기이다. 

   제비뽑기=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쓰인 구약시대의 방법이다. 

   

※구약시대에 나타난 제비뽑기

   첫 번째,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방식으로 아이성 전투에서의 패배의 원인이 드러난다. 아간이 죄인임이 발각되었고, 제비뽑기 방식으로 사울이 왕이 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법이 제비뽑기를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분별할 때에도 제비뽑기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요나서에 나오는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에 나오는 제비뽑기이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비뽑기와 다르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유대인들에게 주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이방인들이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제비뽑기라고 하는 것이 불경하고 미신적으로 사용된 경우에도(단지 답답해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기 위해서 그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하셨다는 것이다. 그 예가 오늘의 요나서에 나오는 제비뽑기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교적인 사상을 찬성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서든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잠언 16:33)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세 번째, 맛디아를 뽑았는데 그러고 나서는 제비뽑기의 관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행전 2장 이후에는 교회 일을 하는데 제비를 뽑지 않고 사람들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 선택하는 일들을 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비뽑기가 필요 없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성령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께 우리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성령님, 어떻게 하면 좋죠?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시대에도 제비를 뽑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제비뽑기 과정을 통해서 요나의 죄가 드러난다.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불순종한 신앙인들에게 이런 심판의 위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들어온다. 


이방인들의 질문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도록, 회개를 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1)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 처음부터의 불순종의 여정을 떠올리게 된다. 충격적인 다섯가지 질문이 시작된다.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데 이렇게 정확하신 하나님이시다. 

2) 네 생업이 무엇인가? 

너의 직분이 무어냐? 하나님의 선지자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 

너의 직분에 충실하고 있느냐?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라도, 나귀의 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심판 전에 분명히 알려주신다. 

3) 어디서 왔느냐? 너의 출신이 어디냐?

과거로부터 도망한 요나 

과거의 요나 

지금의 요나 

 - 하나님과 교제 

 - 따뜻함, 보호, 안위...평안...

- 폭풍, 질책, 죄인..


4) 고국이 어디냐? 

너의 시민권이 어디에 속해있느냐? 

왜 도망다니느냐? 

- 육적 : 북이스라엘 사람

- 영적 : 천국이 시민권.    네 본향이 어디냐? 

이방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궁금함을 툭툭 질문하는데 그것이 요나를 코너까지 몰고 감. 

5) 어느 민족에 속해있느냐? (고국- 법적 시민권,  민족- 교제권)

네가 교제하고 있는 부류가 누구이냐? 

지금 나는 누구와 만나고 있는가? 이방사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자 그 결과로 만났던 사람   

그전 - 소수지만 하나님에 속해있던 선지자들과 만나지 않았겠나?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뜻을 논하고 이스라엘의 부흥을 논하던 내가 이방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질책을 당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됨..


9절부터 대답,,,: 깨닫고 회개하는 구절인가? 

                뉘우치고 회개하는 구절인가? 


no. 

어투 - 당당하다. -> 진정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압박에 못 이겨서 하는 입술의 고백...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억울하게 항복하는 것. 

너무 많은 지식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입술의 고백에 불과하다.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닌 진정한 마음의 고백이어야 한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 나는 당신과는 다른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사람이다. 

   죽음 직전에 있지만 선민사상에 젖은 우월의식... 형식과 껍질의 사람...

-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 거짓말..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했나?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입술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거룩한 것처럼 올려드림...(과거의 기억으로 현재를 드림.. 자기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자신을 드림) 

알고 있는 지식 가지고 변화되지 않으면서 입술로 고백하고 기도...-> 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 교사로서, 교역자로서... -> 순간적으로 충격은 줄지라도 입술의 고백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타인 앞에 설 때에 가증하게 서는 사람들...

나는 위선자인가? 진실한 선포자인가? 

교회교육의 목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실패의 이유-> 가증한 입술의 고백으로 가르칠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다시스로 가지는 말아야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면서 어떻게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역자, 교사 -> 말이 어둔해도 진실하면 변화가 나타난다. 

              말 잘하고 능력있어도 입술의 고백을 가지고는 변화시킬 수 없다. 


- 10절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알고 

이방인들의 질문-> 어떤 이유로, -너는 도대체 누구냐? 

요나의 대답 -> 나의 신분을 먼저 -> 직접화법으로 

                 이유는 간접화법으로 두루뭉술하게... 

우리의 회개의 모습이 이렇지 않는가? 

자신의 죄는 두루뭉술하게 

“주님, 나의 연약함,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요.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이 자녀 됨만을 강조하면서 기도하지는 않는가?” 

회개의 시작(깨달음)은 있으나 진솔하지 못한 회개.,...


사람들..마지막 질문을 하고 장면이 바뀜..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 ->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셨던 질문..

 죄인에게 하는 질문은 항상 동일하다.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 요나의 대답이 없다. 침묵한다. 죄는 인정했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볼 때 회개할 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나, 세상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볼 때 회개할 수 없다. 거기에는 '탓' 만 있고, 변명만 있고, 이유만 있다. 

형식적이고 가증한 입술의 고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나를 볼 때, 진정한 회개가 나온다. 

거룩에 다가갈 수 없는 진정한 고백이 나온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라는 절규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지금... 회개가 사라져가고 있다. 당연히 용서 받는 줄...

죄의 고백이 없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가 없는데 어떻게 죄가 용서되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거리낌이 있는가? 

절대로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죄인이 돌아오길 바라신다. 

탕자를 기다리는 하나님, 상거가 멀어도 그 흔적만 가지고도 뛰쳐 나오는 아버지...

우리 모두가 가증한 요나다. 


변하고 싶지 아니한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아니한가? 

그러면 하나님의 시선에 보이는 나를 보아야 한다. 

변명이 없는, 이유가 없는, 남의 탓이 없는 나의 벌거벗은 모습,

십자가의 은혜를 주었음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나의 여리고성에 갇혀 마음 문 닫고 생활하는 내 민낯을 인정해야 한다. 

입술로만 하는 회개가 아닌 영혼의 회개, 내 중심에서 나오는 진정한 고백을 원하신다. 

그분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아직도 상거가 먼데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 

내 마음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 말씀하신다. 기도하자.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