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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장 3절: "그러나"의 신앙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But Jonahg ran away from the Lord and headed for Tarshish. He went down to Joppa, where he found a ship bound for that port. After paying the fare, he went aboard and sailed for Tarshish to flee from the Lord


  •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북이스라엘의 국력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 북왕국의 절정기.  

일반 백성들의 기대 - 솔로몬의 영광을 재현하자! 거의 실현단계. -> 거짓 선지자들의 동참.-> "하나님의 때" - 성공의 때  

참 선지자- 이스라엘의 영적인 타락을 바라보는 참 선지자들의 기대- 역시 "하나님의 때"를 소망. 그런데 그 하나님의 때는 심판의 때,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의 때, 영적 회복의 때 


  • 똑같은 시대, 똑같은 환경을 통해 바라보는 시각의 차 (무엇이 판단의 기준인가?) - 

               축복을 바라는 자들과 심판을 바라는 자. 외적 현실을 바라보는 자와 영적 현실을 바라보는 자 

 

  •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요나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말씀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때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다가왔다. 


거짓 선지자들을 비롯한 일반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때는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참선지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이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다. 


그런데 또한 참선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라 하셨다. 요나는 그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고자 준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니느웨에 가서 그 말씀을 외치라 한다. 그 니느웨를 통해 회개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로 요나 자신임을 깨닫게 하신다. 


  • 수많은 사람들과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사회의 영적 위기를 진단한다. 교회의 비판의 무리에 가세한다. 

모두들 이대로는 안된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이야기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회개의 메시지는 언제나 밖을 향한다. 

저교회, 저사람, 저민족, 저죄인......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심판한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설교를 드리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 말씀 듣고 내 남편이, 저 사람이, 저 깨닫지 못하는 죄인이 말씀 앞에 굴복하기 원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은 점점 교만해지고, 완악해지고, 무뎌져 간다. 남은 언제나 부족하고 난 언제나 의로운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죄인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내 기대치를 윗돈다. 내 생각을 넘어선다. 그 말씀은 언제나 나를 향하는 말씀이다. 

말씀의 은혜는 언제 임하는가? 내 생각과 맞아 떨어졌을 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항상 내 기대와 다른 데에서 말씀의 충격이,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참 신앙은, 참 믿음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 임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에 순종했다. 나중에 가서는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린다. 

미디안 10만군사와 전쟁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이만명의 군사가 너무 많다 하신다. 이천명의 군사도, 천명의 군사도 너무 많다 하신다. 300명만 남기고 다 돌려 보내라 하신다. 재정신이라면 순종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충격적인 명령에 기드온은 순종한다. 


안수를 바라고 찾아온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10번 물에 담그라 한다. 물에 담그라는 것은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한 번이 아니라 내 죄가 다 씻겨 질 때까지, 내 안의 상처가 다 사라질 때까지 거듭 거듭 말씀의 세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하신다. 

마지막 남은 음식을 먹고 죽고자 하는 사렙다 과부에게 그 음식을 가지고 선지자를 대접하라 한다. 기왕 마지막 남은 것 같다 여지껏 해왔듯이 나를 위해 쓰려고 하지 말로 주를 위해, 남을 위해 써보라 한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 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한다. 


도저히...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말씀들이 성경에 가득차 있다. 

환경에 의지하고, 상식에 의지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자라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말씀들이 성경엔 가득하다. 

그런데 믿음은,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그 명령에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일어났다. 

예수님이 말씀은 우리의 정곡을 찌른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이것은 절대로 네 생각대로 될 지어다. 네가 부르짖는 대로 될 지어다. 네 기대대로 될 지어다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 생각을 벗어난, 네 기대를 벗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꺾고 순종하는 그 순종을 통해서 역사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 마져도 자기 합리화, 자기 고집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다. 


  • 3절의 시작은 불행히 "그러나"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나 중심적인" "내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내 생각을 벗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시작은 항상 "그러나"이다. 


그러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평행선을 달리는 내 고집이요, 하나님 앞에서 주제를 모르는 내 교만함이요, 결국 어리석음의 표현이다. 그러나를 통한 요나의 행동의 결과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맞서고 있는가? 


니느웨로 가라는데 다시스로 간다. 니느웨는 이스라엘로부터 정동쪽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다시스는 정반대인 정 서쪽 너머에 있는 도시이다. 육지로 가라는데 바다로 간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요나를 추적하며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이제부터 계속 도망다닌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하나님은 화내시지 않고 타이르시는데 요나는 선지자인데도 하나님께 역정을 낸다. 하나님은 백성을 살리라고 하는데 요나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불신자 아닌 신자의 고집이다. 


표면적인 요나 - 거짓 선지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고 애쓴 사람

              - 비둘기란 이름의 뜻대로 인격적이고 평화로운 사람

              - 이스라엘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자 

‘그러나’에 포함된 요나 - 순종치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고집이 더 강한 자 

                      - 자신의 뜻이 아니라면 죽음이라도 각오하는 자 

->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내 마음에 맞으면 순종,, 안 맞으면 고집, 불순종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나의 의를 나타내는 교만이 아니었던가? 


- 왜 불순종하는가? 

Hint (욘 4: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욘 4 : 2) 


->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을까봐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니까... 거절치 않으시니까 

->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아서 

   그 뜻을 내 마음과 뜻에 맞추기 위해서 불순종...(나를 기준으로 하나님을 맞추려고...) 

   

  •  그러나로 시작된 불순종의 여정 (3절) -자세히 보자 

- 2절의 ‘너는 일어나’- 안주하지 말고 각성하고 나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라  

- 3절의 '일어나' : 피하고 거역하기 위해서 일어나 

    3절에 나타나는 불순종의 여정을 나타내는 단어들..: 피하려고, 도망하려, 내려가서,얼굴을 피하여...3절 하나에만 나오는 달어들....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과정  : 임재를 피함 -> 예배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다.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다. 


  • 그러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평상시 드러나지 않던 내 깊은 죄악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쓴 자가 만사를 제치고 불순종, 위험의 길로 객기를 부린다. 

    *이스라엘 민족 : 바다에 익숙지 않은 민족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니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길에 아무 준비도 없이 뛰어든다. 불순종하자 무엇이든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했던 요나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바닷길로 하나님께 물어봄 없이 뛰어 든다. 

  =>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나. 광야의 과정을 겪지 않는 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나는 항상 중요할 때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나이다. 왜 교회생활 하는가? 다듬어지기 위해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서 내가 싫어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 내가 싫어하는 나의 숨겨진 모습이 있기때문에 싫은 것이다. 그 싫은 모습과 대면하면서 나의 죄을 발견하고, 부딪치면서, 참으면서 내 죄악을 이겨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앙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공간은 없고 온통 육적인 나만 남아 있는 것이다. 

  

  ->  나의 미래, 나의 비전, 나의 희망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따르는 신자들. 광야의 과정, 연단의 과정 없이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생활하려 하는 사람이다. 자기 목적에 합당하지 않으면 언제나 피하고 도망하고 또 다른 배에 오른다. 그런데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나는 항상 ‘도망자’이다.  


신앙은 내 취향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 나의 축복, 내 가정의 축복, 내 뜻, 내 희망의 성취 -> 아멘

니느웨의 회복 -> 내 원수의 회복, 내가 싫어하는 자의 축복. -> 그러나 


자신의 기준으로 순종과 불순종이 결정 => 다듬어지지 않는 우리 모습 속에서 언제나 범하는 잘못. 초신자때는 하나님이 기다려줄 때도 있지만 계속해서 자기를 고집하면 하나님이 요나처럼 우리를 다듬어 가신다. 가만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 다시스 

다시스로 가려 하여 욥바로 내려 갔더니”

 다시스 - 니느웨는 동쪽에 위치, 

          다시스는 서쪽 끝단의 섬. 스페인 서남부, 광물 풍부, 금속 공예 발달 

             -> 하나님 뜻의 정 반대 

-욥바는 이스라엘의 항구 (다시스와 교역이 활발했던 항구)  

    - 다시스는 금속 공예를 통해서 무역이 활발했던 별천지와 같은 쾌락의 도시 

* 왜 하필 다시스로 가려고 하는가? 

하나님이 그곳에는 있지 않으신가? 그는 하나님의 시선이 가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지 못했던가? 마치 아담이 죄를 짓고 바위 뒤에 숨은 것처럼,, 숨을 곳을 찾은 곳인가? 


요나는 다시스에 대한 예비지식이 많았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자 대뜸 다시스를 선택 

-> 그동안 내가 금지 했던 곳. 그러나 하고 싶었던 것, 즐기고 싶었던 곳,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곳.

-> 불순종을 생각자마자 선뜻 생각한 곳. 

   평소에 마음속에 품어 있던 죄

   연약할 때 드러나는 죄....


-> 하고 싶었지만 내가 목사니까, 내가 교사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니까 부럽지만 참고 있었던 것, 그 장소,,,,

3절 한절에 3번이나 언급... 

하나님의 니느웨가 싫어지면 3배나 더 생각나는 죄가 바로 다시스 


-나의 욥바, 나의 다시스는 어디인가? 

이스라엘 사람들 -> 광야 생활 하면서 끊임없이 불평->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그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에 정말 풍요로왔나? 많이 먹을 수 있었었나?

      그들이 자유로왔나? 행복했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멀어지면 그리워지는 것이 바로 그 세상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서지 못했을 때에 늘 드는 생각이 바로 세상이다. 

(약 4:4)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니라  


믿는 자들이 믿음의 순간에 조용히 묻어 논 곳. 마음속에 있지만 꺼내놓지 않은 곳.

생각하지 않지만 무의식 속에 그리워하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다시스다. 

하나님은 그런 죄 까지도 살피신다. 다듬어가신다.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나오면서 왜 뒤를 돌아보았나? 

롯의 아내라는 것은 바로 믿는 자 안의 믿음의 마음 밖의 또 다른 부분을 가리킨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적인 꿈, 가치관, 버리지 못한 욕망, 하고 싶은 쾌락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지 않지만 언제든 불순종의 때에 나의 생각을 좌지우지할 곳이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죄의 근원을 벗어버리라 하신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실 때에, 이방인과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것을 불태우라고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좋은 것을 남기려고 한다. 자기 속에 감추어 두려고 한다. 온전히 불태우지 못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동안 감추어 두었던 죄의 욕망을 꺼내어 놓는 것이다.  


  • 죄악의 동반자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이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착각, 역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구나...

당시에는 정기적인 배가 없었다. 비정기적,, 제때 시간 맞추는 배가 없었다. 

  -> 도망하려 했더니 마침...

  -> 하나님을 자기 기준에서 평가 (역시 하나님도 허락) 

     비 성경적인 행동을 합리화 -> 사탄의 역사 


그래 한 번 정도는 불순종해도 돼. 가서 쉬어라,,, (나의 합리화) 

늦게 일어났는데 마침 비가와... 교회가기 싫은데 마침 손님이 온데,,,,

(역시 하나님의 뜻이었어) 


죄를 선택했는데 처음엔 좋은 일들이 나타남-> 탈선의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윤활유

-> 불순종의 항해에서 마침 만나게 되는 배를 조심하라. 

편리하지만 나를 망하게 하는 배, 욥바를 떠나자마자 정체를 드러내는 배 


다시스를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 비싼 대가 -> 선가를 내야 한다. 

다시스로 가는 대가 (선가) -> 육로로 가는 니느웨보다 훨씬 비싸다. 

죄값은 항상 최상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

 (그 대가가 끝이 아니다. 선가는 배의 삵 뿐만 아니라 요나의 목숨을 대가로 하고 있다. 불순종, 죄의 대가는 항상 사망이다.) 


- 다시스로 가는 배의 유혹 

유혹의 순간 - 최고 보장. 비밀 보장, 선착순....(유혹) 

그러나 그것은 관광선이 아니라 상선이다. 나를 팔러 가는 노예선이다. 왕복표가 없다. 한 번 타면 돌아올 기약이 없다. 

 

(추락의 과정)

요나 - 배로 내려가고 - 배 밑의 선실로 내려가서 자고 - 바다 밑까지 내려가서 - 물고기 뱃속까지 내려감... 스올의 뱃속.. 지옥 끝....


니느웨 - 하나님의 뜻이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 내 안의 불순종의 공간..

다시스 - 내가 항상 꿈꾸어왔던 죄의 공간. 숨어있다가 불순종하면 튀어나오는 것

      (그것은 장소일 수도 있고, 성격일 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불순종하면 항상 화로 푸는 사람, 남에게 성냄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하는 사람,

불순종하면 항상 하게 되는 죄의 습관.. 

불순종하면 항상 같이 하게 되는 사람, 친구....


하나님은 하기 힘든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죄가 드러나게 하신다. 

광야의 과정, 연단을 통해서 당신의 숨겨진 죄를 낱낱이 드러나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당신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 안의 죄를 발견하고 들여다보는 즐거음- 

물론 그것을 대면하면 고통스럽다. 피하고 싶다. 그런데 피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피하면 피할수록 죄는 내 안에서 더 역사한다. 그것을 보게 하시는 것은 내가 변할 수 있다는,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을 준다. 

내가 살아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내 안에 고칠 것이 없다면 이제 천국가면 된다. 이 땅에서 아직 내가 고칠 것이 있기에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 시간 나의 다시스를 놓고 기도하자 

지금은 죄를 짓지 않지만 내가 약할 때에 항상 나를 유혹하는 그것을 생각하자.

당신의 분노, 당신의 욕망, 당신의 쾌락, 당신의 연약함의 장소를 지금 내어놓자. 

그것은 내가 약할 때에 언제든 나를 지배할 죄의 근본이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에 항상 거역케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실 때에 항상 뒤돌아보게하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내어놓기를 원하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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