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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장 11-17절 : 누가 참 신자냐? 


1. 시편 73편 아삽의 시 

시편 73편에 보면 <아삽의 시>라고 제목 붙인 한 시가 나옵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에 다윗의 참모였고, 특별히 그의 직책은 성가대장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자신이 곡을 지어 찬양하기도 했고, 주로 다윗이 시를 지으면 여기에 곡을 붙여 예배 때에 전체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양을 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 때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신앙인이었던 아삽이 2절에 보면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라"하면서 이후에 자신이 실족한 이유를 구구절절히 이야기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고자 애쓰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데 지금 몸도 마음도 병들어 있고, 하나님을 믿지도 아니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교만하고 남들을 학대하고 하는 자들은 분에 넘치도록 부유함을 누리고 죽을 때까지 평안한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이른바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들을 질투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투라는 것은 "부러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자신이 열심냈던 그 과거의 신앙생활이 헛되다. 부질없다 말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삶을 비판하고, 말씀 안에서 그렇게 안살기 위해서 애써 왔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할 그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자신은 늘 말씀 때문에 고민하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사는 삶을 통해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사실은 그러한 자들을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히 고통이 되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믿는 자가 화를 당하고 안믿는 자가 복을 받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2. 요나 

요나는 아삽이 표현한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그런 시대에 살았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정말 번영의 시대를 누린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적, 도덕적으로는 우상숭배하고, 가난한 자를 핍박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삶을 살았던 왕이요, 그런 삶이 그 시대의 풍조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요나는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고 회개를 외쳤던 의로운 선지자였습니다. 어쩌면 아삽의 고민과 고통을 안고 사는 자였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남들은 다 바알에게 무릎꿇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하면서 부르짖었던 것처럼 그런 의로움을 가지고 살던 선지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자신의 의로움을 지켜온 요나에게 어느날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한번도 상상해 본적 없는 민족의 원수된 대상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명령보다 훨씬 더 낯설고 어려운 명령입니다. 


여기서부터 요나의 신앙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해하지 못할 말씀이 임하자 순종의 선지자 요나가 불순종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냥 말을 안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틀어지자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가는 그러나의 신앙, 거꾸로의 신앙인이 됩니다. 


아삽이 악인의 형통함을 질투하고 부러워하였다는 고백처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자 대뜸 다시스로 발걸음을 돌려 자기 속에 숨겨져 있던 욕망들을 채우는 자가 됩니다. 숨겨져 있던 악한 모습들, 죄악의 모습들, 불순종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폭풍이 쳐도 잠만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어갑니다. 



3. 영혼의 밤 - I am nothing

이러한 일들은 신앙인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아니 어쩌면 신실한 사람일수록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그런 시험입니다. 

언젠가 모세의 120년 생애를 40년씩 구분하여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처음 애굽의 왕자로 있었을 때를 I am something의 기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들을 돌보는 기간 I am nothing 의 기간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이후의 40년을 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산 기간으로 말입니다. 


이 세개의 시간은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대략적인 신앙의 여정의 단계입니다. 

물론 인생에 있어서 모세처럼 이 기간이 똑같이 나누어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나처럼 평생 I am something으로 살다가 인생의 후반기에 I am nothing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i am something의 기간은 내가 신앙안에서 특별한 존재임을 누리는 기간입니다. 

세상에서 구원하여 점점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을 통해서 선과 악을 분별하며 점점 의로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알아감에 따라 내 삶이 깨끗해 지는 것 같습니다. 

열심을 내고 의욕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품었던 생각과 행동이 벽에 부딪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했던 선한 의도가 사람들에 의해 교만함으로 매장됩니다. 

자기의 선한 뜻은 애굽 병사 한사람 죽이고 혼비백산 도망하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신앙의 길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신앙의 길이 다름에서 오는 영적인 갈등, 신앙의 균열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영성에서는 이러한 때를 영혼의 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자신의 생각, 자신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입니다. 내가 죽어야 헤어나올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신앙은 그저 자기 잘난 맛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데 급급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뜻을 이루는 신앙입니다. 

이 영혼의 밤을 통해 비로서 자기 뜻, 자기 생각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데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때를 가장 고통 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짜 맞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던 것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실재로는 자기가 만든 자기 욕망의 표현이고 자기 우상이었다는 것을 집어던져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 부정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아까 시편 73편에 보면 

[시 73:16-17]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이 고통을 어떻게 이기는가?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피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르며 자신의 그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혼의 밤, I am nothing의 시간을 만나면 하나님을 피하고, 예배를 피하고, 기도하지 않으며, 자신의 굴로 들어갑니다. 

세상으로 나갑니다. 자기 속에 감추어 두었던 죄의 땅 다시스로 향합니다. 그러면서 그 원인을 다른 성도 때문에, 교회 때문에, 더 나아가 하나님께 돌립니다. 


4. 요나와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영혼들을 가만 방치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고 묻고, 기다리고, 또 질문합니다. "넌 누구냐? 왜 그러고 있느냐? 넌 정말 날 믿냐?" 

선원들의 질문은 요나에게 

"난 히브리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포기 하지 않습니다. 

내가 끊질기게 하나님과 멀어지려 한다면 하나님은 나보다 훨씬 끊질기게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그가 하나님과 반대로 가는 길을 멈추어 섭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습니다. 

이 풍파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내 자존심이 다칠 때, 내가 열심히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고 잘못했다고 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 인간은 자기 기준에 틀리면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굴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대신 무엇이라 말합니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2) 

자기 죄를 깨닫고 이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도 고백합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회개 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사람들이 저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주님 제 회개를 받으시고 이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소서." 

 

 그런데 요나는 홀로 뛰어 드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 보고 자기를 던져 달라고 합니다. 

 이 심보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회개 없이 죽음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고 죄를 덮어 씌우려는 끝까지 자기는 의롭고 하나님은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잘못의 대가가 아니라 죽음으로서 자존심도 살리고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는 너무도 뻔뻔한 모습입니다.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하나님의 방법이 틀렸다고 죽음으로 대드는 것입니다.  

 요나는 죄는 인정했을지라도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차라리 죽겠다고 합니다. 내가 책임지고 죽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자존심이 날 살리는 자존감이 되어야지 날 죽이는 감정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5. 이방인 선원들 

여기서 또 살펴보아야 할 사람들은 이방인 선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요나가 나를 바다에 던지라 말했지만 차마 그렇지 못하고 자기도 살고 요나도 살리고자 합니다.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3) 

하나님 없는 인간의 동정심 - 사람을 하나님 없는 극단으로 몰고갑니다.  

                          - 이러한 동정심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울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이끌지 못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동정심, 사랑  -> 점점 더 흉용해 지니라. 


하나님의 진노는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죄를 돌이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해결 - 돈 벌어서 선교하면..봉사하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해결해야..


요나를 싣고서는 배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요나를 싣고가는 선원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죄에 대한 집착을 보여줍니다. (인본주의로 포장한 집착) 


선원의 입장에서 보면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길만이 선원들이 살 길이고 우리의 살길이다. 

세상이 볼 때는 무정하고 매몰차지만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안되니까 이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14절입니다. 

(욘 1: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중요한 표현은 이들은 자기들의 한계를 알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것이고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뜻이 아니라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자기 뜻을 고집하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가는데 이들은 이방인이면서도 자기들의 한계를 만나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고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요나의 결정적인 실수를 정확하게 꼬집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백만 하고 가만 있지 않습니다. 


15절에 보니까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그들은 돌이키고 행동했습니다. 고백만 하고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 대로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회개 입니다. 

요나를 던지는 행위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죄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던지는 것입니다. 

이방선원들 :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함...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참다운 회개는 행동하는 것이고 참다운 회개가 있으면 그 열매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이 회개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습니까? 

1. 파도가 가라앉습니다. 

2.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했다. - > 신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다. -> 예배를 드리고 서원했다..무슨 서원을 했을까요? 하나님을 믿기로... 순종하기로... 죄를 던지니까 육신적 구워 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여호수아 9장의 말씀.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동하다가 꾸지람을 듣고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선택해서 성전의 주인이 되는 사건. 


두 사건 모두 어리가 알고 있는 신실한 자들의 민낯이 드러나며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오히려 참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 참 신자인가? 하는 물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6. 요나와 하나님 2 

그러면 이제 요나는 죽고 이방 선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까? 

요나는 이제 죽음으로 치닫는가?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고 불쾌해 하는 큰 아들을 책망하시고 이젠 돌아온 탕자를 더 사랑하시는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시고 그들에겐 심판만이 남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여전히 요나에게 있습니다.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와 물고기를 준비시킨 하나님...(17절의 ‘이미’, ‘예비하사’)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 


물고기 뱃속..: 불쾌, 답답, 고통스러운 장소, 그 안에서는 그것이 은혜인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 줄 압니다. 

선원 : 고백과 행동이 있는 진정한 회개를 했습니다.   

요나 : 진정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 뱃속에서 완전히 죽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더 지혜로운 자인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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