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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함 (살전 5:12-23)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그리스지역에 있는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지역에서 큰 핍박을 받으며 교회를 세운 후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부터 바울을 죽이기로 한 유대인들이 이곳까지 몰려와서 도시를 시끄럽게 하고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 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도시를 소란스럽게 하여 할 수 없이 베뢰아 지역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2, 3 개월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세웠는데 바울과 실라가 떠나가고 교회만 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닥친 유대인들은 바울의 일행을 힐란하고 소란을 일으키며 떠나갔습니다. 바울에 대한 안좋은 소식들을 터뜨리고 다닙니다. 

교회를 떠난 바울의 마음이 편할리가 없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 전도를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교회에 보낸 편지가 데살로니가 전후서 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살전 1: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사실 마게도니아 지역의 복음 전도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고, 아테네에서는 복음을 전했지만 철학자들에 의해서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지역에서도 유대인들에 의해 금방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대도 바울이 없어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을 굳게 지켜 그 지역의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어떠했습니까? 

1장 2절에 보니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6절에 보니까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 소망 사랑이 충만한 성도들이었습니다. 

잠깐 이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믿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방지역 헬라지역에서 다른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핍박까지 받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환란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으로 수고했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으로 인내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5장 12절부터의 말씀은 그러한 칭찬받는 교회, 칭찬받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읽은 23절의 내용처럼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고 흠없게 되기를 바라는 사도바울의 간절한 바람이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성도, 흠없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볼까 합니다. 

이 권면은 그들이 못해서 질책으로 하는 권면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도 잘하는 데도 이젠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흠없이 서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가장 성숙한 성도로서의 자세, 성숙한 교회로서의 자세를 잘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2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 서로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인정해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주라는 것입니까?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는 사람, 주님 안에서 서로 권면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수고와 고생을 알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운 바울과 실라는 떠나갔습니다. 외적으로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이들을 공격하고 흠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도들은 굳건하게 교회를 지키고 모범이 됩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권면과 누군가의 통솔력이 없으면 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앞서다 보면 따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하게 됩니다. 

나서는 자들을 싫어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이지만 각 성도들은 지체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이 지체로서의 역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성도들의 모습이 각자가 바라볼 때에는 서로 다르게 됩니다. 맡은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손과 발이 똑같은 모양이라면 얼마나 이상하겠습니까? 배와 등이 똑같이 생겼다면 사람 참 되게 이상하게 생겼을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몸이라는 아름다운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르면 싸웁니다. 다르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판단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판단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성장하지 못하고 그 만큼 늦어집니다. 성숙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합니다.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주님의 역사를 인정할 때에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더 이상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맡기워진 것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자족하고 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서로 인정하면 화목합니다. 인정하지 못하면 불화합니다. 화목은 서로를 귀하게 여길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귀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고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도 소중한 것입니다. 


14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다르다고 무조건적으로 다 인정하고 받아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체로서 부족한 자들을 우리는 또한 세워주고 격려해 주어서 온 몸이 건강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손 발의 기준으로 배를 보면 얼마나 둔하겠습니까? 

그러나 몸을 이해하고 배를 보면 겉으로는 아무것 안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 장이 움직이고 소화기관이 움직여서 손과 발이 마음껏 일하도록 해 주는 것이 배입니다. 

그런데 배가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데도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배로서의 기능을 못하면 왜 그런가 살펴보고 아프면 고쳐야 하고 잠자면 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되 다른 가운데서도 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못할 때에는 때로 권계하고 격려하고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급하게 하면 또 사단이 납니다. 서로 분쟁이 생깁니다. 내 기준으로 권면하면 또 싸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권면할 수 있으려면 몸을 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기준이 아닌 몸의 기준으로 그 지체의 역할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인내가 곧 성숙입니다. 


아브람을 택하실 때에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으로 부르셨고 믿음의 조상으로 그를 여겼지만 서두르지 않습니다. 

야곱을 부르실 때에 이미 이스라엘을 작정하셨지만 야곱이 이스라엘 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인내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가면 몸이 망가집니다. 지체가 상합니다. 

우리는 인내하면서 격려하고 인내하면서 붙들어 주고 인내하면서 세워줘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뭘 기뻐합니까? 

무엇보다도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머리가 성하면 지체는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치료만 되면 됩니다. 

건강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머리이기 때문에 실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길로 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시하십니다. 


비록 현재의 우리 몸이, 현재의 어떤 지체가, 현재의 나의 모습이 마음에 안들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완전해도 

결국 그리스도가 머리이기 때문에 믿음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뻐하지 못하는 삶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 환경, 내 안목, 내 판단 안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안목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꾸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런데 하나님 뜻을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기 위해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모든 환경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고 내 뜻대로 안되어도 기도하면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는 곧 기도하는 자 입니다. 

주위를 둘러 보면 아무도 없는 듯 두 눈을 감고 믿음의 눈을 뜨면 보이는 분 계십니다. 

그 분이 보이면 됩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EX) 버스를 타도 설겆이를 해도...항상 방언으로 기도하시던 모습... 어떨 때는 미친 사람같기도 하고 내 신앙을 가진 후로는 저게 기도인가하는 의문도 많이 가졌다. 

저렇게 기도해도 마음을 집중할 수 있을까.... 

항상 걸어다닐 때도 누구랑 함께 있어도 틈만 나면 기도하셨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기도하니까 내가 못보는 것을 보고 내가 못 듣는 것을 듣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결코 요동함이 없었다. 

우리가 왜 흔들리냐?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보냈을 때 사환 게하시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는데 엘리사가 게하시의 눈을 띄게 해 주니까 아람의 군대를 겹겹히 애워싸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을 보여 줌

보지 못해서 요동한다. 

환경과 감정에 자꾸 지니까 요동한다. 

내 생각에 매이고 내 기준에 매이니까 넘어진다. 

내 생각, 내 기준을 벗어나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만 들어오면 된다. 그것이 기도이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와도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믿기 때문이다. 그 분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결국은 최후의 승리자가 우리가 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꾸만 바르게 서려는 우리를 무너뜨리려 한다. 

성령의 생각을 헛된 생각으로 여기게끔 한다. 

성령의 생각, 은혜의 생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에, 기도를 할 때에, 찬양을 할 때에 처음 들어온 은혜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통해 주어진 약속, 목사님이나 신앙의 동료를 통해 주어진 말씀을 소멸하고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은 선택이다. 다시 내 판단, 내 기준으로 돌아가는냐? 

아니면 예배를 통해, 설교를 통해, 기도와 찬양을 통해 나에게 주신 약속, 나에게 주신 신앙의 길, 비전의 길, 변화의 길로 나아가느냐? 

누구도 그 선택을 쥐어줄 순 없다. 내가 취하는 것이다. 

사탄은 유혹하고 참소하며 하나님은 기다리고 또 말씀하신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21절)  그런 참 지혜가 있어야 한다. 


참 좋은 선택, 바른 선택을 위해서 악을 제하고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결국 원망 불평 금지, 회개와 감사의 생활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원망 불평 금지 회개와 감사의 생활이 결국 온전한 삶, 거룩한 삶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흠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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