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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성도 자라가는 교회 (에베소서 4:11-16) 


옥한음, 하용조, 이동원 목사님과 함께 복음주의 4인방이라 불렸고 남서울 교회를 목회하시던 홍정길 목사님께서 한 기독교 방송에서 자신의 목회 생활 40년을 되돌아 보면서 '목사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하시며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목회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더 깊이 목사로서의 삶에 대해 정리하며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그러면서 자신을 한국교회의 한 실패한 목사의 단면을 보여 준다며 뉘우치셨습니다. 

몇가지 말씀을 좀 소개할까 합니다. 

“좋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론 나쁜 사람이 많다”며 “특히 기독교인들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가장 많이 속인다. 말을 멋지게 하고 굉장한 글을 쓴다. 그런데 그 삶에 실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언제나 진리는 예배에만, 말에만, 신학 속에만 있지 실제 삶 속에는 없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수치고 또 나의 수치”라고 고백했다. 

삶이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원로가 된 그의 고민, 누구보다 치열하게 목사의 길을 걸어온 그의 자기 성찰이었다. 뭐 여러번 들어서 감흥이 안 올수도 있지만 평생을 목회를 하시면서 한국 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친 원로 목사님의 고백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소리인 것이고 그래도 자기는 최선을 다했고 자기가 이룩한 업적에 의지하는 몇몇 목회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진실한 고백인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기만 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복음화에 매달렸다. 그래서 천만 성도를 달라 했고, 이 나라 5만9천 마을에 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구했다. 보이지도 않았던 서쪽 대륙, 중국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런데 마침내 이것이 이뤄졌다. 마을마다 교회가 섰고 중국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래도 교인들의 삶은, 목회자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고. 그래서 제자훈련을 참 열심히도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의 삶에 엄청난 지식들이 쌓여갔지만 삶은 그대로였다." 


결국 그 목사님이 ‘삶의 변화’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자녀 교육’이었습니다. 그는 "내 자녀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이 후회는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저 세상에 나가 승리할 수 있겠나. 부모밖에 답이 없다. 바른 신앙을 가르쳐 바른 삶을 살게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은 내 가장 가까운 사람, 내 가족, 내 자녀에게만이라도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신앙을 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최소한이면서도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결론 지은 모습에서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몇번 말씀을 나누었지만 우리는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나보다 낫기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자라가면서 많이 듣는 이야기, 많이 하는 이야기가 "넌 나처럼 살면 안돼, 넌 부모 닮지 마라."하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신앙의 교육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나처럼만 해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녀들에게 내 주위의 사람에게 "나처럼 살아봐라."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삶은 바른 삶입니다. 성공한 삶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TV나 인터넷 문화가 발달되면서 우리 삶에 깊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생각에는 어느덧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속의 본질보다 보여지는, 이미지에 더 신경을 쓴 것이지요. TV에 한 번 나오려면 "더 자연스러워" 보이게 하기 위해서 "화장"을 합니다.  

화장을 안 한 얼굴은 카메라를 통해서 보면 초라하고 이상하게까지 보입니다. 

자신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 옷에 자신의 가치를 두기도 하고, 표정이나 말 한 마디 마디, 사람들의 모습에 비춰지는 내 모습에 더 신경을 씁니다. 

대통령 선거라도 할치라면 TV 토론회를 둘러쌓고 얼마나 많은 이미지의 신경전이 펼쳐지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그러한 이미지에 속아 넘어 갑니다. 잘 생긴 사람이면 속도 착할 꺼라 생각하고 TV에 범죄자나 악한 사람으로 등장하면 그렇게 생긴 사람은 똑같이 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TV가 사람들의 가치관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치밀한 결국 상업적인 전략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착한 줄 알았던 자들이 그렇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밝혀지면 또 메스미디어는 떠들어 대고 대중들은 소란스럽게 지껄이지만 어느 덧 또 드라마나 광고를 보면서 똑같은 착각과 기대를 반복하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향력과 이미지의 차이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미지는 인기와 맞물리고, 짧은 시간에 당장에라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향력이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미지에 꽂혀있습니다. 

저와 같이 공부하던 한 목사님이 한 500명쯤 모이는 중형교회로 청빙이 되서 가셨는데 얼마전 페이스 북에 올라온 글에 보니 교회에서 보톡스 주사를 맞고 한달에 몇번 피부관리도 받고 미용 비누를 사용하라고 해서 민망하지만 그렇게 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제 나이 40이 좀 넘은 목사님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그만큼 교회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이야기인것 같지만 우리 대부분도 우리의 이미지에 얼마나 집중하는지 모릅니다. 

이미지 관리 잘해서 참 신앙인, 참 그리스도인 인 것처럼 보여지길 원합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시간에 누구보다 아멘 잘하고 찬양 할 때 뜨겁게 뛰고, 사람들에게 늘 웃음으로 대하고, 헌금도 꼬박 빠지지 않고 하면 이보다 더 멋진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이것이 분명 믿음의 행실로 나타나면 좋지만 진정한 자신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의 중심이 잘 잡혀지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들 조차 그저 사람들의 시선에만 신경을 쓰게 되어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쌓아온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사람들은 죽을 것 같이 아파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중심을 살피며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동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문화는 유교문화입니다. 양반문화입니다. 양반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배고픈 채 하면 안됩니다. 소변이 마려워도 급한 채 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그냥 말하면 체면 문화, 좀 좋게 말하면 품위, 교양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체면문화, 품위 문화는 이미지 관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은혜에 배고프라 하십니다. 나의 죄를 보고 애통하라 하십니다. 체면 따지다 보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이미지로 살아가려했던 자와 영향력으로 살아가려했던 자의 대표적인 예는 사울왕과 다윗왕입니다


사울왕은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인기 때문에 다윗왕을 질투해서 평생을 험한 곳에다 낭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을 때마저 사람들의 눈 때문에 사무엘에게 제발 덮어달라고 애걸복걸 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날 어떻게 보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였습니다. 그는 잘못을 해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이미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왕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죄 앞에서 사람들이 알건 말건 간에 철저히 회개합니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든지 왕이면서도 옷이 벗어질라 춤추며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이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찬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보면서 살았지만 사울은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자신의 인격도 잃고 인기도 잃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버림받아, 급기야 스스로도 버림을 받게 되는 종말을 맞게 됩니다. 

그렇지만 영향력은 하나님을 닮아 갈 때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그윽히 흘러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이미지가 아닌 삶으로 부터 흘러나온 영향력은 쉽게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이미지는 한 번의 실수로 무너지지만 삶을 통해 드러나는 영향력은 실수를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윗도, 모세도 때로는 실수를 하고 욕을 얻어 먹지만 그들의 실수가 그들이 살아온 삶의 영향력을 바꾸어 놓친 않습니다.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4장의 본문말씀은 아무리 묵상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교회에 관한 정의, 사명,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역할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세운 제도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 중에서 교회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의 열쇠를 가진 사람을 세우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죄악된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그 구원의 통로는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요.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고, 그러한 사람을 만들어 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신앙이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인간은 그저 크리스찬이 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 까지 자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크리스찬이 어떤 크리스찬인가 하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타난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이룬 크리스찬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 까지 자라는 성도를 만드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왜 주어집니까?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게 하시기 위해서 직분을 통해서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엡 4:11-엡 4:13]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누구나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내가 변하지 않고 예수님만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입니다. 교회의 첫번째 목적만 이룬 신앙입니다. 

예수가 필요해서 예수를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이것이 곧 자라가는 것이고 온전해 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라는 배에 예수님을 태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루종일 고기를 잡다가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실패하며 돌아오고자 할 때에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배에 오르시도록 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종일 일해 지쳐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지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다시 던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몇가지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적으로 이제는 피곤해서 쉬어야 할 시간이었고, 작은 고기배로 가기엔 말두 안돼는 깊은 데로 가라 하시고, 그리고 그물도 다 씻어 정비해 놓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전문 어부이고 예수님은 어부아닌 목수였습니다. 내 삶과는 상관없는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도 신앙과 내 삶과는, 신앙과 내 직장과는 별관계 없다고 여길 때가 많지 않습니까? 


깊은 데로 가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얕은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살고 있다. 깊은 곳에는 조금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왜? 얕은 물이 안전하니까.. 깊은 물의 파도를 두려워 하고 단지 쉽게 피할 수 있는 얕은 물 가에서 산다." 

                   

  • 믿음의 삶: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모험적인 삶, 위험한 삶.. 그래서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길 주저한다. 

-> "만일 내가 주님께 진심으로 헌신하면 그분은 나를 광신도로 만들어 버리실 거야. 그럼 내 가정도 내 삶도 엉망이 되겠지… 친구들도 다 떠날거야. 적당히 믿어야지…" -> 얕은 물 신앙. 너무도 많은 신앙의 비밀들을 놓치고 만다.

  • 하나님의 계획: 좋은 것, 완전한 것,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궁극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한 것
  • 지금도 원하시는 예수님의 요청: 나를 네 배에 태우라. 네가 어디로 가든 너의 사업, 너의 가정, 너의 결혼을 비롯한 네 삶의 모든 영역에 내가 함께 하게 하라. 내가 널 온전케 하리라." 


반응: 신앙적인 조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말씀이지만 그건 내 상황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전 지금 너무 힘들다.
-> 그런 힘듦과 실패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성경은 구체적인 원리를 제공한다. 왜 자꾸 신앙과 일상의 삶을 구분하려 하는가? 어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랐을 때의 결과: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복을 주셨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그 분의 계획에 동참하여, 그 분의 약속에 의지 할 때 항상, 반드시 그런 결과를 약속한다. 내 배 뿐만 아니라 다른 배의 어부들에게 까지 고기를 나누어주게 할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은 축복이 아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예배드리는 신앙 따로, 농사할 때는 바알과 아세라, 그들의 삶의 신앙과 예배의 신앙이 나뉘어져 버린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할 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평일날 일할 때는 세상의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국 우상숭배의 덫에 빠져 불순종의 길로 들어섭니다. 


수영할 때의 나) 잘 못할 때는 안 빠질려고, 바둥바둥 하다가 더 허우적...

                    좋은 물안경을 끼고 나서 물 속에서도 눈을 뜨니까 더 이상 안 빠질려고 애쓰지 않고 물 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들어가 보니 정말 아름다운 세계가 열려 있더라.....

                    말씀은 우리 삶의 물안경이다.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데로 들어가면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한 청년이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습니까? 율법의 제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러분, 어차피 신앙생활 하는 거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래서 정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무엇인지, 내 삶이 온전해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 삶을 내 자녀에게, 내 이웃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번 부흥회는 신앙의 깊은 물을 체험할 수 있는 집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소원하는 자들이 와서 깊은 은혜를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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