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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을 보고 울다. (눅 19:41-44)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를 제외하고 우셨다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신 장면이고 또 하나는 요한복음 11장 35절에 죽은 나사로를 보고 우신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셨다라는 표현은 단지 눈물을 흘린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소리 내어 크게 울다." "크게 통곡했다"라는 표현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신 장면과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신 장면, 모두 같이 크게 통곡하신 것입니다. 


먼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셨고 그를 곧 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나사로를 보고 우셨습니다. 

아니 곧 살리실 사람 앞에서 왜 우셨을까? 우리는 이 울음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구약의 다른 말씀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2-6)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고 슬프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가 사랑하는 자녀, 그의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이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고 맞은 흔적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세력, 사망의 세력 앞에 무너져 지금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두고 안타까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고 바위 뒤에 숨은 아듬을 찾아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하고 안타까이 부르시듯, 집 나간 탕자를 안타까이 기다리시듯 죄로 말미암아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어두운 상태를 바라보시며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9장에서 나사로를 바라보시면서 우시던 것과는 또 다른 주님의 통곡을 바라보게 됩니다. 

앞의 문맥을 보면 이 울음은 너무나 뜬금없는 울음이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던 것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최고의 명절입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절기를 맞아 민족의 대 이동을 했습니다. 이번 유월절은 다른 유월절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의 명성이 이미 이스라엘 전 지역에 퍼져있었고 그가 곧 메시야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중심이 있다면 하나는 출애굽 사건이요, 또 하나는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 만큼이나 중요한 유대민족의 신앙의 가장 중심이자 초석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의 압제자, 애굽으로부터 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바로와 애굽의 군사들은 모조리 심판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지금의 이스라엘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됩니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가 언제입니까? 

애굽보다 더 강대국이라 여겨지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예수와 함께 하는 유월절은 바로와 애굽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로마를 심판하고 독립을 이룰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그 중심에 있는 성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가장 전성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솔로몬의 시대의 상징입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성과 그 성전이 완전히 불탄 이후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 성전에 하나님이 다시 임하셔서 솔로몬의 영화가 다시금 열리길 고대헤 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지 70년이 지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 2의 성전 스룹바벨 성전을 짓게 되지만 그 성전은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에 크게 미치지 못했었고 그나마 그 성전마져 다시금 불타게 됩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어떤 성전입니까? 

로마로부터 파견 된 헤롯왕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입니다. 

여전히 제사장들에 의해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성전의 진짜 주인, 즉 메시야가 나타나 솔로몬의 영광을 재현해 주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 솔로몬의 영광을 재현시킬 메시야를 향한 갈망이 지금 예수로 말미암아 클라이막스에 올라 있는 상황에서 예수와 12제자들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모든 유대인들의 환영,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는 환영을 받으며 당당히 왕의 입성을 한 것입니다. 

얼마 전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 사람들의 열기를 생각해본다면 이 당시 예루살렘이 얼마나 들썩였을까 하는 것을 조금은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또 얼마나 으쓱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 날이 오면 하나는 주의 왼편에, 하나는 오른 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이 가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모두가 왕의 귀환을 기대하며 기쁨과 흥분에 가득 차 있을 때 갑작스레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고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 정확히 말하면 헤롯의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면서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예수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왕이 아니었나요? 

아니요. 분명 예수님은 왕이요 메시야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는 진리이고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유입니다. 


예수는 메시야요, 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그들을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줄, 솔로몬의 영화를 회복시켜 줄 왕입니다. 그것이 예수께 바라는 최고의 기대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풀었던 것처럼 배고픈 그들을 배부르게 하실 수 있는 메시야

병든 모든 것을 치료해 주실 수 있는 왕

그들의 빚을 다 갚아주고 그들의 설움을 다 씻어주고 원수를 갚아주고 자기를 괴롭히던 자들을 혼내주고 그들에게 본 때를 보여 줄 그런 왕. 

내 인생을 완전히 역전시켜 줄...


그런데 불행히도 예수님은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소동을 피해 조용히 제자들과 식사하면서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내가 선생되어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 주라"고 당부하는 왕.

"내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단 하나의 헌법을 제자들에게 남겨 주며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면서 초라한 왕의 권세를 보여 주셨던 왕. 

빛나는 왕관 대신에 로마 군사들에 의한 가시면류관

높은 왕의 보좌 대신에 십자가에 달이셔야 했던

화려한 왕의 가운 대신에 거의 벌거 벗겨져야 했던 

왕의 장대한 행차 대신에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야 했던 그런 왕.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왕이었습니다. 


왜 예수는 그런 왕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능력이 없는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왕이 아니었던 것은 그가 "참 왕"이 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꿈을 실현 시켜 줄, 그런 이류의 왕을 기대했다면 예수는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원, 영생, 전혀 새로운 세상과 전혀 새로운 삶을 보여줄 참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의 꿈을 실현 시켜 줄 왕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의 한을 풀어 줄 왕, 자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왕,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줄. 자기가 필요한 전지전능한 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하고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롱하며 침뱉기도 하며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로마 군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재로 못박기도 하고

빌라도가 그랬던 것 처럼 난 상관없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울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영생이 아닌 자기 만족

십자가가 아닌 자기 배부름

죄에서부터 구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 또 다른 죄를 짓는 그런 헛된 왕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통곡

그들을 향한 부르짖음

"내가 찔림은 그런 너희들의 허물 때문이고 

내가 상함은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다"(이사야 53:5)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끔 내 기도가 잘못 될 때마다 

내 마음이 소망이 참된 왕이신 주님이 아닌 헛된 세상의 왕을 기대할 때마다 

이 울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제자들은 참 왕이신 주님을 곁에 두고선 자기들의 헛된 욕망으로 인해 주님을 외면했고 떠났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이룩하신 그 나라

서로 발을 닦아 주고 용서해주고 평화를 주는 그 나라를 주님과 함꼐 세워 가게 하십니다. 


참왕, 참 나라, 참 믿음을 소망하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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