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19  이전 다음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제목: 예수님을 만난 사람 2 – 사마리아 여인

본문 : 4: 14-26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묘하게 대조되면서 또한 오랫동안 ㄱ 중요성이 가려져 왔지만 현대 성서 해석학에서 오히려 요한복음 3장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재평가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전혀 무감각함을 보여 줍니다.

 

이에반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땅을 지나가시면서까지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

 

[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정책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혼인정책, 혼혈정책

남왕국 유다-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잡아 들어가 문화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정책

 

유대인의 율법에 있어서 피는 곧 생명- 피가 더러워졌다-> 저주의 상징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l  유대 역사가 바벨론에서 귀환 유대백성의 힘이 아니라 이방 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인해 -성전재건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예배가 하나로 완성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1.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득권 싸움. –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지어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외곽에 거주 예루살렘 성벽이 폐허 상태로 그대로 있음 느혜미야서 -> 은혜를 받았으나 분열로 치닫는 죄악 예수께서 그 오래된 분열의 장벽을 지금 허무시는 장면

 

 

6절에 표현된 제 6는 지금의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막지대에서는 가장 더운 한 낮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한 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그녀.

다섯 번 결혼 했다는 말은 어떤 학자들은 사마리아의 다섯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문자 그대로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진 전력이 있다고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를 살펴 보면 이 이유도 그녀의 부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 다른 남편을 가질 권리는 여인이 아닌 오직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전력은 요즘 시각으로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 번이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처량하고 가혹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에게도 동족인 사마리아 인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민족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전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섯 남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 12시 뙤약볕에, 살기 위해 물을 길어야만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여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언제나 길러 오는 우물가에 먼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계획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먼저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 예수님의 첫 마디  

 

당시 유대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오랜 민족의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딱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을 달라 하신 것이지요. 여인이 놀라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당신은 우리와 상종치 않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회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깨뜨리시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조차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무너져 내려있는 그녀의 자존감을 붙들어 주며 세심한 배려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동네로 보냅니다. 상처 입은 심령을 만나주시기 위해, 그녀의 부끄러운 심령을 다치시게 하지 않기 위해, 예수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자리를 피하게 하고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인이 도착하기 전 미리 그 우물가에 앉아 여인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예수를 발견한 여인은 또 한 번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타 유대인처럼 자기를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그런 시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깨고 생명의 영생수의 공급자이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뜻 밖에도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여러분 느끼십니까? c 왜 이토록 예수님은 여인을 배려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을 왜 예수님은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또 하나의 배경이 되는 장소, “야곱의 우물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특별히 언급된 장소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줍니다.

 

우물-

1)   창세기 2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내는데 우물 곁에서 물을 청해서 그 태도를 보고 리브가를 만남.   

2)   29: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혹은 자기 배우자를 만난 곳-> 우물.

 

예수님이 아무 이름없는 초라한 여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자기 민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온 여인에게 다가오신 곳. -> 우물영원한 우리의 신랑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온 곳-> 바로 우물가.

 

이 말씀은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하필이면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부정하다, 더럽다 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을 돌아 사마리아로 오시고,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고, 그리고 가장 무더운 대낮에 그녀를 기다리시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혹이나 그 마음이 상할까봐 조심하시며 그 자존심이 다칠까봐 염려하시며 정말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그 여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

 

,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에서, (11, 15, 19), 주에서 선지자로 (19),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죄인인 여인을 제자로, 사도로, 그리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 상처가, 초라함이, 억눌림이 없고, 오직 자유함과, 기쁨과, 담대한 증거만이 여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고 상처입고 외로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프로포즈 하십니다. 내가 너의 참 남편이다.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여러분 성전에서 그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주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공동체어떤 죄인도 받아들이는 공동체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까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름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