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2019  이전 다음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예수가 살게 하는 것"

 

갈라디아 - 나라명이 아닌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다닌 선교지역이 포함되는 넓은 지역을 칭호

 

이 서신서는

  1. 로마서 다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 (이신칭의)가 자세히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2. 다메섹 도성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나서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도자로서 어떻게 활동하게 되었는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열심있는 유대교인으로서 예수 및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였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 가족이나 혹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로 부터 검증을 받고자 하지 않고 호렙산이 있는 아라비아로 가서 삼년을 유하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16, 17절)

 

체험-> 훈련 및 교제를 통해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

 

  • 이 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나 십오일을 만나면서 역시 야고보를 만나 교제하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18, 19, 24절)
  • 그리고 나서 바나바 및 디도와 함께 이방인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14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이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 수장이었던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 등을 만나 자신이 예수를 통해 이방인을 위한 복음 증거자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리고 교제하게 된다. (2장 1-10절까지의 내용)

 

그리고 나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거꾸로 베드로가 바울과 및 바나바가 사역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에피스도를 다루고 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에피소드지만 신앙적인 측면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사건을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게바가 마치 선교지를 방문하듯 바나바와 바울이 사역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에 왔다.

안디옥 교회는 어디입니까?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호칭하던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이다.

1차 전도여행의 Base Camp가 바로 안디옥교회이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고 기대가 되는 모습으로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 교회에 방문한 목적
  1.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 탐방
  2. 구제헌금을 얻기 위해서.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사도행전 11장 -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헌금을 얻기 위해서...

 

[행 11: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본부교회가 선교지 교회를 돕는 것인데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보면 오히려 선교지 교회가 본부 교회를 돕는 역선교...

복음의 전파와 구제 및 선교는 항상 같이 가는 것 -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곳에 구제와 선교가 함께 진행됨.

 

1차적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보내온 헌금을 받고 지금 다시 교회를 방문하여 얻고자 하는 장면

 

  • 식사 만찬에서 일어난 사건

베드로가 방문하여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바울 및 안디옥 교회 사람들과 식사 - 당연히 그 식사 시간에는 안디옥의 성도들인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을 것이다. 아니 그림을 그려보면 아마도 그들 이방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초대되어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식사 중에 다시금 야고보 일행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면서 당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던 자다.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 및 함께 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식사자리를 피한다. 왜?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절에 보니 베드로가 떠난 이유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 중에도 여전히 이방인이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는데 베드로가 그들이 두려워 식사를 하는 도중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베드로 한 명만 슬며시 자리를 피했으면 눈에 띠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13절에 보니까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다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라고 전한다.

 

지도자 한 명이 외식하니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따라 한다.

바울을 이끌고 안디옥 교회를 개척했던 바나바 역시 식사 자리를 슬며시 피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그들의 행위를 "외식"이라 명한다.

 

위선은 헬라어로 "히포크리시스" 가면을 쓰다. 조작하다의 의미다.

이것은 주로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꾸짖을 때에 그들을 지칭한 말이다.

마태복음 23장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한 장 전체를 할예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를 일곱번 반복해서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 그러한 위선자들을 무엇이라 말하는가?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런데 누구보고 지금 위선자라 하는가? 베드로보고, 바나바보고

11절에 보니까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느니라"

 

예수의 수제자. 그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이젠 성령 받고 과거의 연약한 모습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하루에 삼천명씩 세례를 받게 했던 베드로가 이런 위선의 모습을 띄게 된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바울을 인도하여 사도들에게 그의 회심을 보증하며,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이방선교에 앞장 섰던 바나바가 자기 교회 성도와 식사하다가 베드로와 더불어 그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들에게만 이러한 일들이 있는가?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난 얼마나 많은 순간 말씀을 증거하다가, 기도하다가 이러한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에 절망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지 아니한가? 베드로처럼, 바나바처럼 믿는 자로서 이런 부끄러운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는가?

 

예수를 믿는 것.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예수가 지신 십자가를 통해 내 모든 죄와 허물이 사해지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아무리 죄가 사해졌어도 매일 같이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또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천국가기 전까지 비신자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가 구원의 시작이라면 그 구원을 이뤄가는 것은 예수가 지신 십자가에 나도 못 박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닮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 닮고자 해도 우리의 본성은 참 바뀌지 않는다.

성경 읽고 기도해도 나라는 인간은 잘 바뀌어지지 않는다.

베드로처럼 어떤 상황이 오면 우리는 비겁해지고, 가면을 쓰고, 외식하며, 좋지 않는 영향을 끼친다.

 

내가 변해서 예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가 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이다.

 

우리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풍랑이 일면 금방 흐트러진다. 지난 주 말씀처럼 풍랑이 일면 예수가 보이지 않고 우리 영혼은 어둠에 빠지게 된다.

그 때 어떻게 우리를 극복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내 안에 사는 예수가 살게 하도록 주님 바라보는 것이다.

 

  • 내 안에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화가 올라올 때, 참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살면 문제가 발생하니까 나를 십가가에 못박고 내 안에 계신 예수가 살도록 나를 죽이는 것이다.

 

  •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들이 있을 때, 그것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도저히 못하니까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이 내 삶을 살도록 주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 내 안에 탐심이나 음란함이나 죄악된 감정들이 올라올 때 그것과 싸워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께서 나를 살아달라고 기도하여 내어 드리는 것이다.

 

  • 반대로 내 안에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나 혼자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쁜일 내어 드리면 감사하며 기뻐하면 절대로 교만할 수 없고, 주님의 영광을 가로 챌 수 없는 것이다.

 

  • 내가 필요할 때만 나를 죽이고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들려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넘어진다.

화가 올라오고, 잘못된 생각들이 올라오고, 낙심하게 되고, 음란하게 되고, 어떻게 내 안에 이런 모습, 이런 생각이 생길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우리가 주님을 놓치면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살 수 있도록, 주님이 내 삶을 인도하시니 "범사에 감사하면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학생 하나가 나에게 묻기를 "왜 그렇게 기도하시고, 왜 그렇게 성경에 집착하느냐?"

기도하지 않으면 또 외식하는 나, 범죄하는 나가 드러나고 말씀에 붙들려 있지 않으면 늘 우왕좌왕 흔들리는 나이기에 나로 살지 않고 예수로 살기 위해서는 그 분께 기도해야 하고, 나로 살지 않고 그분께서 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분의 뜻과 그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학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양을 하는 것도 아니다.

변할려고 애쓰지 말라. 내 힘으로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 바리새인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은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자다.

왜? 우리 안에는 분명히 예수가, 예수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을 분별하고 맡기기 위해서 말씀으로 기준삼고 기도로서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의 일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삶에 드러날 것이다. 내 한계 안에서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한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한 저와 우리 로고스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린다.

 

십자가의 삶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