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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부모가 되자! (창 47:1-10절) 


교회에서 흔히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아이들이 안다니는 아이들보다 훨씬 바르게 자란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예수 믿는 것이 가장 큰 가정 교육이다. 

3대만 예수 믿으면 가족을 통해서 하나님 믿는 자들의 가정이 얼마나 복 받았는지 알게 된다. 


통계를 잘 따져 봐아겠지만 목회를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신실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아이들 문제로 고통받거나 끙끙 앓고 있는 집안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일학교 때까지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든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데 중학교 올라가고 대학교 되면 부모를 떠나듯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저런 일로 비난을 당하고 어려움도 많이 당하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회 안의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보다 더 큰 위기가 없습니다. 


대대로 신앙생활을 했던 가정, 그것도 그냥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대대로 주의 종으로서 신앙생활을 했던 가정, 

어릴적부터 아이들이 성전에서 자라고 교육받다가 자연스럽게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가정.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적인 상식으로는 당연히 복받고 칭찬받아야 할 가정인데도 불구하고 거꾸로 정반대의 경우인 가정이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제가 가정의 달 설교를 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다루는 가정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집안입니다. 


엘리는 40년을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헌신한 존경받는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법궤를 담당했던 그는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문은 아론의 계열로서 이스라엘의 손꼽히는 가문, 대대로 제사장직을 이어오던 가문이었습니다. 엘리는 에브라임에 있는 실로라는 곳에서 제사장으로 사명을 감당했는데 당시 실로는 여호수아 이후로 법궤와 성소가 이곳에 있었기에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였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본 그의 성품 또한 나무람이 없습니다. 

그는 한나가 기도할 때에 그녀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면서 그녀를 위로하고 근심하지 않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녀가 사무엘을 낳아 성전에 바쳐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자 사무엘을 잘 지도했고,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줄을 알고 사무엘로 하여금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도록 하여 사무엘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도록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를 대신하여 사무엘을 택했다고 해도 그는 사울처럼 시기하거나 사무엘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대로 하실 것이니라."하며 대인배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울과 비교하면 얼마나 성품이 훌륭합니까? 


가문좋고 성품좋고,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제사장...무엇하나 빠질 것이 없었던 자,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비극은 바로 그의 두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율법에 따라 아버지인 엘리의 제사장직을 계승해야 할 특별한 사명이 주어진 자들로서, 어릴적부터 성소에서 봉사하며 제사장으로서의 훈련을 받습니다. 대제사장의 아들이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순결함을 지키며 훈련받아야 할 이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성전에서 자라면서도 예배를 경시했고 하나님께 받쳐진 제물에 손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하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범하면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횡령하여 자신들의 사욕을 채웠으며, 심지어 성막에서 수종들던 여인들과 부도덕한 성 관계를 가짐으로 7계명은 물론이거니와 성소마저도 더럽히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어찌 이럴수가 있었을까요? 


사무엘상 2장에 보면 그들의 행실이 자세히 나오는데 12절에 보면 "그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결국 말씀을 읽고 교육받았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알지도 경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17절에 보니까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음이라"하며 그들이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싫어하고 외면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두 아들의 행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악한지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훈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두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콧방귀도 안뀝니다. 

부모가 간곡히 말하는데도 자식이 듣지 않을 때보다 더 속상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이 아무리 걱정이 없어도 자식이 속을 썩이면 다른 복이 복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도 두 아들들로 인하여 애를 태우고 속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근심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엘리로서는 따끔한 두가지를 지적합니다. 

2장 29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기를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여겼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의 잘못을 고치지 못한 것은 엘리가 하나님의 말보다 아들들의 말을 더 들어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엘리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엘리라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식들이 말을 안듣는 것을 어찌 합니까? 난 할 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만일 자녀가 맞은 편에서 차가 달려오는데 공을 주으러 찻길로 뛰어든다면 말 안듣는다고 자녀를 붙잡지 않는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자녀가 차를 못보고 뛰어간다면 못가도록 막아서거나 붙잡아 두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상 5장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게 되고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엘리도 자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됩니다. 


(삼상 4: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나이가 많고 비대했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십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자기 배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영육간에 비대해져서 자기 몸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 문장 안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도 맛보았고, 하나님의 큰 축복도 얻었지만 결국 비대해져서 감당을 못해 뒤로 나자빠지는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의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결국 엘리는 자기의 권위의 상징인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삶을 마감합니다.

사무엘서 3장 1-2절의 말씀은 엘리의 영적인 상태를 짐작할 만한 구절을 제시합니다. 

(삼상 3:1)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 3:2)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담당했지만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성전에 있을 지언정 그는 기도 없는 삶, 말씀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말씀 맡은 자가 말씀을 잃어버리니 눈이 어두워 집니다. 분별력을 상실합니다. 그저 눕거나 앉아있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누워 있었고, 자기 권세에 앉아 있다가 결국 뒤로 넘어지고 맙니다. 그는 최고의 가문에서 최고의 환경에서 존경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비참히 그 가문에 모두 죽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나이가 들었지만 눈이 어두워 지지 않았던 또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그는 복잡한 인생을 살았던 잡초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아내를 넷 씩이나 두었고 그 사이에서 열 두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복잡한 삶으로 형제들은 다투기 일쑤였고 급기야 막내아들은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기근으로 식구들을 데리고 잃었던 아들 요셉을 향할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을 사랑했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미안하고 면목이 없겠습니까? 

결국 형들로 부터 자녀를 잘 지키지도 못하였고 이젠 먹을 것이 없어서 신세를 지러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 땅으로 온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비로서 자녀에게 이보다 더 염치없고 부끄러울 때가 어디있겠습니까? 


그와 가족이 애굽의 바로 앞에 오니까 바로가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니이다.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47장 10절에 보면 놓치지 말아야 할 반전이 나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지금 야곱은 곡식이 없어 요셉의 덕분에 겨우 애굽으로 온 형편이고 또한 나이 먹은 늙은이에 불과함에도 누가 누구를 축복하냐면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48장에 가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 48:10)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차자인 에브라임을 왼손으로 장자인 므낫세를 기도해 줍니다. 보고 있던 요셉이 깜짝 놀라 

아버지 손이 바뀌었어요...므낫세가 장자입니다. 하면서 그 손을 옮겨 놓으려고 하니까 야곱이 뭐라 합니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비록 그가 육신의 눈은 약해 져도 영적 분별력은 사라지지 않고 정확히 하나님이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9장에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을 다 불러 놓고 그들을 하나 하나 하나님이 말씀을 예언하고 그 말을 마치고 죽게 됩니다. 


엘리에 비해서 좋은 형편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그야 말로 험한 인생, 모진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육신의 눈은 쇠했을 지언정 영적인 권위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애굽의 왕인 바로를 축복하고 열 두 아들 이스라엘을 축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에브라임을 축복하여 그 땅에서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가 탄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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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요즘 시대의 많은 아버지 상이 엘리와 같은 것 같습니다 .

사회에서 인정받고 좋은 이름을 내서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후덕을 보게 하는 것.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안정되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뒤바라지 해 주는 것. 

그러나 결국 엘리 제사장의 그러한 자녀 사랑은 비극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지금의 역사에서도 역시 또 다른 많은 엘리같은 아버지들의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옛날보다 훨씬 더 풍요하고 안정된 것을 자녀들에게 주어도 오히려 부모의 말은 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오히려 더 달라는 것이 많아지고 존중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영적인 권위입니다. 

자녀를 안수하고 축복기도 해 줄 수 있는 권세가 목사 뿐 만 아니라 부모에게 있습니다. 


제가 속을 썪이거나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 저희 어머님이 하시던 말이 있습니다. 

"너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다시는 널 위해 기도하지 않을 테다..."

한참 반항하던 시기에는 그 말을 듣고선 콧방귀를 뀌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기도 안한다고 내 인생이 뭐 어떻게 되나...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시간이 좀 흐르면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제가 잘못한 것들이 제 자신에게 인정이 됩니다. 

그러면 찾아가서 부모님께 용서를 빕니다. 


이것이 영적인 권위 입니다. 

여러분 돈이 자녀를 효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자연스레 부모의 권위가 서고 효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눙데 제 일부터 4계명 까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계명이라면 제 오계명부터 십계명 까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주어진 계명입니다. '

그런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첫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첫번째로 중요한 것이 부모공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대가 하 수상해서 지금은 부모가 자녀들의 눈치를 보고, 아니면 그냥 각자 알아서 살자하는 가정이 많아진다고들 하지만 신앙인의 가정은 부모공경하고 자녀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권위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영적인 권위를 주십니다. 그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축복하고 또한 훈계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맡긴다고 자녀가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만 드린다고 자녀가 신앙인이 되지 않습니다. 

영적인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축복하고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육신의 눈은 어두워져도 영적인 분별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비대하게 하는 것, 하나님보다 자녀를, 세상을 더 존중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영적인 부모가 됩시다. 

그리고 영적인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그것만이 이 시대에서 자녀가 살고 부모가 사는 길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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