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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7장, 아이성, 아간, 아골 골짜기 


여호수아를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와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도 같은 구약의 복음을 나타내는 성경입니다. 

특별히 출애굽기가 성도의 거듭남, 애굽으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 즉 중생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기록한 사건이라면 여호수아는 성도의 성화, 하나님과 연합하고 동거하는 가나안의 정복을 다룬 성경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가나안 정복의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나누어 왔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넙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바라보기만 했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법궤를 앞세워 말씀을 바라보며 순종함으로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성을 치기 전 그들이 행한 것은 할례였습니다. 유월절을 기념하고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 사건도 나옵니다. 

다시금 은혜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순종마져도 하나님의 은혜 없인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없이는 우리 스스로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도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리고성 정복을 나누었습니다. 

성화의 여정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사탄이 아닌 나 자신입니다. 

성화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내 일부분과 그 분의 일부분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 내 왕으로서 주님을 모시고 실재 그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의 매 순간, 내 삶의 전부를 주님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재로는 내 삶의 중심으로, 내 왕으로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그리고 내가 필요한 것만 신앙생활을 통하여 얻으려 합니다 .

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 분의 필요대로 쓰임받으려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것을 못하게 합니까? 내 자아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담 이후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을 대로 살았던 이 자아가 주님을 입으로는 영접했어도 내 마음, 중심, 내 삶 전부를 내어놓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문울 굳게 닫고, 견고하게 자기의 울타리를 치어 놉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우리 영은 반응하고, 변화하게 되어 있는 것이 진리인데 여리고성처럼 견고하게 울타리를 쳐 놓은 심령 때문에 말씀의 은혜가 임하지 못합니다.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말씀이 떨어져도 열매맺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양각 나팔 불고 소리를 내지 말고 성을 돌라는 것은 불평하지 말고 온전히 예배함으로, 찬양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훈련되어 있는 입은 우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내 말이 내 생각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입은 불처럼 분노에 불붙이고, 낙담에 불붙이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은혜 없는 말, 훈련되지 못한 말은 우리를 점점 여리고 성에 갇히게 합니다. 

그 입을 찬양의 입술로 바꾸고, 예배를 통해 마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1. 아이성 (황폐한 산) 

  •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7:1) 

- 여리고성 점령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왕으로 모시는 사건) 

- 그런데 아이성은 나를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 1절에만 두번, 7장 전체를 통하여 "온전히 바친"이란 말이 6번이나 반복 

- 우리의 신앙이 주님을 중심에, 두지 못할 때 우리 삶은 다시 황폐한 산이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이게 된다. 


  • 정탐꾼의 보고 

- 백성이 다 올라가지 말고 2, 3천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3절) 

- 성화의 과정에서 자아와의 싸움은 일회성이 아니다. 중생은 일회성이지만 성화의 과정은 끊임없는 자아와의 싸움이다. 

- 그 싸움은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해야 하는 싸움이다. 

- 정탐꾼의 보고 후에 생략된 과정이 무엇인가? 여리고성을 칠 때는 먼저 정탐하게 한 후에 객관적 사실을 파악한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아이성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단지 정탐만 있다. 너무 쉬워 보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동행이다. 동행은 늘,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하지 못할 때에 실패한다. 아담과 하와가 떨어져 있을 때 뱀이 하와를 꼬셨다. 

- 그들의 피해는 삼십 육명이었다. 함께 했던 군사 3000명, 이스라엘 전체는 약 200만명이다. 그 중의 36명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피해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하지 못하자 그 피해를 보는 시선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아 된지라." (5절) 

- 36명의 사람 때문에 이백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낙망하고 낙심했다. 

-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만 작은 실패에도 내 마음 전체가, 공동체 전체가 절망의 늪으로 빠진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7절) 

- 누구의 한탄인가? 백성의 원망이 아니었다. 여호수아의 원망이다. 모세 앞에서 원망하던 백성들과 똑같은 원망을 한다. 몇명 때문에? 36명 때문에....

- 게다가 무엇이라 원망하는가? 그들이 멸망당한 것처럼 과장한다. 그리고 요단 저쪽. 광야땅을 가리키며 그 땅이 더 좋게 보이는 것이다. 여리고성을 정복한 그들이 36명의 죽음 때문에 광야가 차라리 좋았다고 원망한다.  또 다른 여리고성처럼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다.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리..." (9절) 

- 지금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던 자들이 그들의 이름의 상함을 두고 어찌하냐고 원망한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0절) 

- 7절의 어찌하여는 (Why me?)이다. 10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찌하여는 (what are you doing?)이다. 

- 인간의 한탄은 왜 나한테 이러십니까? 항상 나를 내세우는데 하나님은 너 도대체 무엇하고 있느냐?말씀하신다" 

요나에게 질문하는 선원들의 질문과도 같다. 어찌하여...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느냐? 묻는 것이다. 


2. 아간 (곤란) 

  • 이스라엘이 범죄하여...(11절) 

-지금 범죄한 것은 아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간의 죄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온전히 내 앞에 거룩해야 하는데 (13절) 그 중의 하나가 범죄하여 전체가 거룩을 상실한 것이다. 

  • 제비뽑기 - 지난 주 요나서에 나온 방법 (유다 지파- 세라 족속- 삽디의 가정 - 아간) 

                    -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는다. 끝까지 감춘다. 목회를 하다보면 성도들 모두가 그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데 정작 자신만 인정하지 않고 모른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주님이 주인되지 못해서이다. 

                    주님이 주인되시면 내 연약함을 인정케 하신다.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오늘 하루를 힘겨워 합니다...." 그 찬양의 가사 처럼 우리 본 모습을 알게 됩니다. 

  •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22-23절) 

탐내어 가졌나이다. (21절) 결국 아간을 범죄하게 한것은 탐심이었다. 육체의 정욕, 안목의 자랑이었다. 

은은 속전으로 쓰였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요셉은 은 20에(창 37:28-30), 예수님은 은 30(마 26:14-15)에 팔리셨다.


은은 그 밑에 있다는 것은 탐심으로 인해 구속의 은혜보다 자기가 훔친 외투와 금덩이가 구속의 은혜 위에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주님이 온전히 주인되지 못하시면 항상 물질이, 정욕이 예수의 구원보다 위에 가 있는 것이다. 


3. 아골 골짜기 (근심) 

결국 여리고성 다음의 가장 쉬운 성으로 여겨졌던 아이성은 온전히 바쳐지지 않은 신앙으로 황폐한 산이 되었고, 탐심은 일시적 쾌락 뒤에 더 큰 곤란으로 다가왔고,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근심을 당하게 되었다. 


성도의 성화는 자아와의 싸움이다. 

그것은 끝없이 계속적으로, 날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은혜없이는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다. 

무엇이 이 싸움에 실패하게 하는가? 

내 전부가 아닌, 온전치 못한 삶과 예배와 생각이 우리의 삶은 은혜가 아닌 황폐로 이끈다. 탐심이 하늘의 풍요가 아닌 곤란을 당하게 한다. 결국 주님으로 인해 충만치 못한 삶의 결과가 근심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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