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19  이전 다음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주일예배 설교 (14-2-2) 


엔게디 광야에서의 두 사람 (사무엘상 24:1-7)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겸손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백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자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서 예언도 하고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임명하여 그것에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누구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세례를 주어 그 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한 자에게 모든 권세와 함께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름부음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모든 전쟁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삼상 14:47-48)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그런데 승리하게 되면서 사울이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힘으로 승리한 줄 알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하지 않고 선지자의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전쟁에서 얻은 것들을 취하고 마음대로 자기가 재단을 쌓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교만하여져서 타락하게 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승리를 하게 해 주시는데 승리를 거듭하면서 사울은 순종을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 다윗입니다. 새롭게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받자 마자 새 마음이 부어지고 능력이 임하게 되는데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바로 왕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의 궁에 들어가 그를 섬기게 합니다. 사울에게 임한 악령을 떠나가도록 찬양을 부르게 합니다. 

사울이 불순종하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는데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물리치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섬기는 자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이렇게 자기를 섬기면서 찬양을 불러주면 사울에게 다윗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를 기억하고 아껴야 하는데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나타날 때 다윗이 등장해서 그를 무찌르자 사울이 아니 네가 찬양하던 그 소년이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본 소년인 것 처럼 네가 누구의 자녀인가?하면서 그를 대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가까이에서 사울을 섬기며 수종들었지만 사울에게 다윗은 기억조차 안된는 사소한 존재였다는 것이지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기 주위의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다 자기를 위해 수종드는 자이지 그가 귀하거나 아끼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자 비로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여 그를 군대장관으로 삼는데 거기서부터 기나 긴 갈등이 시작됩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사들을 무찌르자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는 소리를 듣고 그 때부터 다윗은 자기를 위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위협하는 자로 시기와 질투심이 폭발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위해야 하는데 자기보다 더 칭찬을 받으니까 왕이건 뭐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제 사울의 삶의 모든 것이 다윗을 죽이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무엇을 느끼는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났고 다윗과 함께 함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라면 자신에게 기름부어 주시고 능력주시고 함께 해 주시던 하나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자기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해야 지요. 회개하고 "하나님 성령을 거두지 마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세요."해야 하는게 마땅한 일인데 현실에서 그런일이 일어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쟤 때문에 내가 버림을 받았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다시 사랑받을텐데"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실패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지요. 누가 그랬습니까? 가인에서 부터 시작된 시기의 역사, 살인의 역사입니다. 아니 아담에게 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부르실 때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나와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렇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 했음면 내가 그 앞에 나와서 무릎꿇고 회개하는 것이지 핑계되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놀아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왕의 직분을 다 내려놓고 오직 사울은 다윗을 주이는 것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기름부어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삶의 목적이 다윗을 없애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내 마음에 그런 것이 들어오면 당장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의 깊은 굴 속에 숨어들었습니다. 

엔게디라는 이름은 '염소새끼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어린 염소새끼를 먹이는 물, 은혜, 피난처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10명만 데리고 와서 나를 위협한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지금 3000명을 데리고 와서 다윗의 목숨을 위협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순간입니까? 

그런데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은혜의 처소, 깊은 굴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있어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누군가 나를 위협하면 은혜의 굴,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이 주시는 샘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안전합니다. 

그곳엔 3000명의 군사라도 다윗을 칠 수가 없습니다. 


은혜 안에 들어오니까 다윗은 사울을 볼 수 있는데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목숨이지만 은혜 안에 들어오니까 어떤 위협도 침범칠 못합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방황하는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아주 특별한 유혹을 받습니다. 

은혜 아래 거하면서 나를 위협하는 자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무기력한지를 발견했을 때에 내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를죽이려 하는 자를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두고 망설이게 됩니다. 

마음 속 한 편에서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시험입니다. 이건 내게 준 기회이니까 내 마음대로 행해보자. "네 생각에 좋은대로..." 

"내 생각에 좋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이것은 사사기서에 나오는 구절들 아닙니까? 그 때에 왕이 없었더니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어떤 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합니까? 왕이 없는자,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자가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다윗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삼상 24:15)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결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어서 치리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장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누구도 대들지 못하는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어서 블레셋 군사들을 무찔렀던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쫓으며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사울을 앞에두고 결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대언자, 대리자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불손종해서 악령이 지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셔서 지금 다윗에게 새로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능히 "당신이 하나님을 떠났음으로 내가 기름부음을 받고 당신을 주의 이름으로 칩니다"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많은 정치적인 반란이 이렇게 일어났지요. 


그런데 다윗은 끝까지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칠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신을 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다윗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면 누군가는 다윗을 욕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왕이 되기 위해 선왕을 살인한 자라는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후에 사울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 그가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지 않은 일 때문에 정치의 평화가 왔고 전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다윗이 그의 적에게 베푼 선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가 복을 받고 모든 백성은 그를 청종하지 않았습니까!


(삼상 24:13)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악한 방법을 통하여 선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지만 악은 악인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선인에게서 악한 행동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서 사울은 울며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어찌보면 사울의 마지막 성령의 임재가 이 때 이루어 집니다. 

성령의 예언들이 사울의 입술을 통해서 펼쳐 집니다. 


비록 사울은 이후에도 또 다시 다윗을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자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24장의 마지막 구절은 엔게디 광야의 굴 속에서의 두 사람의 갈림길을 보여 줍니다. 

사울은 기름부은 자였지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기만의 처소, 자기길,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기름부은 자로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하며 요새로 돌아갑니다. 요새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견고한 성입니다. 그의 신앙과 삶과 환경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다보면 한 사람의 왕의 인격과 신앙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국가이지만 그것을 이끌고 있는 한 사람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 국가의 흥망성쇄를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얼마나 약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면서도 현실의 문제에 매일같이 넘어지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모세의 온유함과 신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니뭐니해도 교회는 우선 목사가 바로서야 합니다. 

가정은 부모가 바로서야 합니다. 가장이 바로서야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위에서 누군가가 바로서지 못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입니다. 

왕이 바로서지 못하고 집안의 가장이 바로서지 못하고 때론 교회의 목사가 바로 서지 못할 때에 도대체 그로부터 말미암은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사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보면 많은 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부패되고 잘못된 정치와 권력을 바꾸기 위해서 사람들은 데모를 하고 무력시위를 하며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으려 합니다. 

목사를 쫓아내는 교회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가장이 잘못하면 아내로부터도 자녀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습니다. 

봐주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바꾸고, 뒤집고, 흔들어도 좀처럼 사회가, 교회가, 가정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점점 더 혼탁한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은 보복을 낳습니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가인은, 사울은 시기와 질투로 폭력의 역사를 써 내려갔지만 다윗은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보복과 폭력의 역사를 끊고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요새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반드시 살아계서서 우리의 괴로움을 갚아주시고 보호하시고 선한 일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합시다. 결코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지 말고 그 분께서 일하심을 믿고 의지합시다. 

 

나라에, 교회에, 가정에 리더가 바로서지 못한 곳은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런 현실을 가만히 눈감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폭력으로, 내 소견에 옳은대로 이것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려 그 분께서 일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