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19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  
 

에돔의 죄 (오바댜 1:10-14, 17)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 딱 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바댜는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남왕국 유다가 우상숭배와 부정부패한 정치 지도자들, 거짓 종교지도자들의 난립으로 바벨론으로부터 멸망을 당할 때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자, 유다의 선지자로서 유다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우상숭배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면 선지자의 설교의 대상자는 당연히 누구이어야 하겠습니까? 유다민족을 향해서 회개와 심판을 외치는 것이 당연한 것일진대 오바댜는 유다민족의 멸망의 때의 선지자이면서도 유다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외친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에돔 족속을 향한 심판을 외칩니다. 


왜 오바댜선지자는 하필이면 유다민족에게 회개를 외치지 않고 에돔 족속에게 심판을 외치고 있을까요? 

우리는 시편 137:7절의 말씀을 통해 그 힌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시 137: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난 후 지은 애가 입니다. 

그런데 그 애가 중에 에돔에 대한 탄원과 심판을 간구하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날, 에돔이 유다 족속을 두고 "아주 헐어버리라"하면서 그들의 멸망을 즐거워하며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오바댜에서도 보면 에돔의 죄악을 기록했는데 첫째는 그들이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에돔은 세일산이라는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에 살았습니다.  그곳은 자연적 동굴이 있는 곳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특히, 에돔의 수도 ‘페트라"는 지금도 유명한 유적지로 남아있으며 약3km에 걸쳐 좁은 암반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리 많은 군사가 올지라도 적은수의 군사력으로 방어할수 있었습니다. 에돔은 이런 기가 막힌 곳에 살면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으며 그리고 땅의 풍부한 자원과 무역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조건이 도리어 에돔을 교만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3절)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둘째는 그들이 형제인 야곱백성,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포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의 나라입니다. 


유다가 멸망할 때에도 에돔은 유다와 서로 연맹을 맺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위기에 처하자 에돔은 방관했습니다. 그들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방관하는 모습 속에는 더한 포악한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즐거워하며 바벨론이 휩쓸고 간 지역에 들어와 남아있는 성전의 유물을 뺴앗아 달아났으며 도망치거나 남아있는 유다 민족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왜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즐거워했을까요? 

본래부터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시기와 분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에돔족속은 누구의 자손이냐하면 이삭의 장남 에서의 후손입니다. 

이삭의 장자이기에 아버지로부터의 축복을 법적으로 물려받아야 했던 것이 바로 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야곱이 에서이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그것도 정당한 방법에 의해서 빼앗은 것도 아니라 자기가 아버지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사냥을 하러 간 사이 어머니와 짜고 자기가 누려야 할 권리와 축복을 빼앗아 간 것 입니다. 

자기 민족의 시작이 이럴진데 그 야곱의 자녀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과 사이가 좋을리 없습니다. 

거기엔 빼앗긴 축복에 대한 한이 서려 있는 것이고, 그동안 받았던 설움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돔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을 살갑게 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들어가려 할 때 에돔 족속이 길을 비켜 주지 않아서 돌아가야만 했고 사울 왕때는 블레셋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을 가장 괴롭힌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주셔서 에돔 족속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신23:7)


비록 장자의 축복권을 야곱이 차지 했지만 이삭의 아들로서 한 형제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돔 족속을 위해서도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애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가 멸망하려 하는데 에돔이 그것을 바라보며 방관할 뿐만 아니라 즐기며 좋아하며 오히려 패망한 그들의 처소에 들어와서 약탈하며 포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적에게 이런 것을 당하는 것도 참기 힘든 일인데 형제라고 여겼던 이들에게 당하는 배반은 견디기 힘든 수모 입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바댜 선지자를 비롯한 유다의 사람들이 "하나님, 저 에돔 족속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심판 해 주십시오" 하면서 탄원하며 또한 하나님도 그런 에돔을 심판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어디에서부터 일어났습니까? 

원수끼리 죽고 죽인 것이 아니라 다름아닌 가인과 아벨, 형제끼리의 시기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사랑은 무엇입니까? 

(요 15: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 때의 친구가 다름아닌 형제의 의미입니다. 

내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도 다름아닌 네 옆에 있는 자,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가장 큰 불행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함에서 나왔고 가장 큰 사랑은 다름아닌 형제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저보다 낫다고 하는 생각이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의 형의 모습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동생은 그야말로 탕자였습니다. 

아버지의 재물을 진탕쓰며 허랑방탕하다가 집에 기어들어왔는데, 들에서 일하다가 들어온 형은 그런 동생에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여러분, 집나간 아들도 탕자이지만 집에 있는 또 다른 탕자가 있으니 바로 큰아들입니다. 그가 가인이고 다름아닌 에돔이요, 바라새인들이고 또한 서기관들입니다. 

집나간 아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며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데 집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동생을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회심이 집에 머물고 있는 이가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가 집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동생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범적인 아들이 되겠다는 것이 그를 오히려 은혜 없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인정받을 때는 묵묵히 일하지만 그 인정을 안해줄 때는 금방 노하고 분노합니다. 

그에게는 은혜라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순종과 사랑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짐이 됩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탕자가 되어 버린 것이 큰 아들입니다. 

이런 신자가 가장 불행하고 힘든 신자입니다. 동생의 탈선은 눈에 확 띠어서 사람들은 둘쨰 아들만을 탕자로 보는데 탕자의 비유에서 초점은 큰 아들입니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지만 온통 판단과 정죄, 분노와 원망, 원한과 시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둘째 아들을 안아주는 아버지를 보자 내재되어 있던 암흑의 기운이 솟구쳐 올라돕니다. 오만하고 몰인정하고 이기적인 자아가 본색을 드러냅니다. 

바르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있는 은혜 없는 자기 의, 이것이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다름아닌 장자권을 빼앗긴 것을 마음 속 깊이 사무치게 가지고 있다가 이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자 기뻐뛰며 날뛰는 에돔의 모습입니다. 


그 중심엔 교만함이 있습니다. 복수심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 


사람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만물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해석합니다. 항상 주인공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 보다 뛰어난 사람도 자기의 눈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지도자 모세도, 다윗도 그런 사람들의 판단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평범한 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중심적인 모습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도 자기가 판단하고, 예수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외면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우리를 한 순간 가인으로 만들고 다윗을 미워하는 사울로 만들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를 조롱하는 바리새인들로 만듭니다. 


그럼 형제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이나 허영- 남들보다 낫기 위해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빌립보서의 다음 구절은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한계를 아는 마음 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마음입니다. 자기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는 마음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있어야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사촌형입니다. 

예수가 그저 목수일을 하는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세례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사역하기 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헤롯왕도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철저히 예수를 높입니다. "나는 그의 신들매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오직 기도와 말씀 안에서 자기 위치를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하지 않고 자기 위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신학교 때, 한참 교회의 소식들에 눈이 뜨이면서 목회자의 안좋은 모습들이 보입니다. 

제 눈에도 한심한 목회자들이 보입니다. 

가끔씩 주어지는 설교시간마다 그런 분들을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또 그렇게 설교 원고를 쓰는데 "넌 그 목사 보다 더 기도하냐? 넌 그 목사보다 나와 더 가깝냐?" 

지금은 그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그가 해왔던 신앙의 열심이나 깊이가 네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쪽팔리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지금도 가끔 버릇이 나와서 비난할 때가 있지만 그 분들보다 제가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항상 베드로와 팽팽히 맞서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서로 자기가 가장 첫쨰되는 제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넌 꼼짝말고 내 어머니를 맡아라"하는 사명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앞장서서 선교하고 설교하면 수천명씩 회심의 사건이 나타나는데 자신은 마리아 때문에 꼼짝달싹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가 하신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내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는 비로서 형제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주인공에서 섬기는 자가 됩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 뱅이를 고칠 때도 베드로 옆에 있으면서 베드로가 말하도록, 그를 통해 역사하도록 중보합니다. 

절대로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로서 자신이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40년 동안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입구까지 끌고 왔는데 하나님이 "넌 여기까지다. 가나안에 못들어간다"했을 때에 그가 자기 중심적이고 에돔같은 마음, 가인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무슨 일이 발생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며 여호수아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물려줍니다. 주인공에서 은퇴배우로 물러갑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서운했다면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 땅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낙 자손이 있어서 누구도 가지 않는 땅, 헤브론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면서 갈렙은 헤브론 땅을 취합니다. 헤브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압니까? 바로 친구 입니다. 

친구인 여호수아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기가 가장 힘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헤브론 땅에서 다윗은 왕위에 오릅니다. 


예수님이 나실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했지만 적어도 단 한 명만은 예수의 오심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들을 다 죽여서라도 예수의 탄생을 막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주인공의 자리,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마지막 에돔의 후손 헤롯대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예수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을 예수를 주로 영접한 자, 예수를 주인으로 섬긴 자라고 합니다. 

내가 주인공에서 예수가 주인공으로 바뀌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계명은 다름아닌 형제사랑입니다. 

네 형제에게 또 주인공을 양도하라는 것입니다. 


에돔은 형제의 불행을 즐거워하고 오히려 기뻐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형제에게 주인공을 양도하니까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송을 듣습니다. 


신앙은 겸손입니다. 교만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철저한 조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셔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주인공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조연되시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주인공을 넘겨 줄 때에 형제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