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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형편에든지  (빌립보서 4장 11-13절)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도

  • 한 해 동안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지키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적으로 본다면 무엇보다 코로나로 인해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당한 분이 없음에 먼저 감사하게 됩니다. 특히 이귀자 권사님 가정, 이옥희 집사님 등 연로하신 분들도 이 시기를 잘 버티고 마음은 좀 불편할지라도 코로나로부터 지켜 주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 하면서 코로나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집사님들, 코로나로 부터 지켜주심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년의 대부분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며, 어느새 학교 안간다는 즐거움보다는 답답함과 지루함과 많아진 숙제량으로 인해 힘듦에도 잘 견뎌주고 있는 학생부 아이들을 보면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 그러나 그 마음 한 편에는 정말 감사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이라기 보다는 코로나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 어떤 성도는 코로나로 인해 사업의 큰 위기를 맞이하고 어떤 분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거나, 일이 많이 줄은 분들도 있습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서 다시금 코로나 확진이 많아지면서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교회나 성도들도 어두운 그늘을 많이 보게 됩니다. 
  • 특히 장사하시는 분들은 추수감사 때부터 연말까지 선물과 쇼핑으로 인해 한 해의 큰 수익을 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 때에 맞이하는 추수감사절, 아니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때에 감사를 말하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없는 예배, 마음에 없는 감사를 받으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몇 주 전부터 저는 감사를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전하면서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향의 땅을 떠나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막연한 땅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이 긴 항해를 통해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을 잃고 낯선 땅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또 많은 사람들이 추위로, 부적응으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칠면조를 잡아 이웃을 초청하여 드렸던 예배가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마음 먹으면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 정도의 큰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감사는 또한 밭에 감추인 보배를 찾듯이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라고도 나누었고 하박국을 통해서는 한 밤중에 드리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외적인 고난과 아무 것도 없는 내적 공허의 상태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의 비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기도를 통해 오천명이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큰 숙제 앞에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마리라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식사기도 하면서 의탁하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기는 예수의 기도를 나누어보았습니다. 

 

함께 나누었던 설교를 종합해보면 우리에게 남는 한가지 질문이 "우리는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와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왜요? 감사는 자신의 상황을 자족할 수 있는 데서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이 자족이라는 말, 많이 나누었지만 외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복, 곧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고 있는가? 아니, 지금 행복한가?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나? 

 

Well-being이라는 말이 삶의 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정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주위에서 참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코로나로 고생하고 있는 지금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니, 바울의 예를 들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기를 설교하는 것이 성도에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참 적당하고 적절한가? 진실히 이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경험했던 일은 제 마음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시에서 교회 건물에 대한 경고장을 받은 후에 우리는 이제 교회를 옮겨야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주소록에 올라 있는 모든 교회에 이메일을 보내 클로스로드교회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교회 가까이,  좋은 교회에 옮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가질 수 있었지만 직접 만났을 때에는 여러가지 환경으로 불가능하게 됨을 알고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주 줌 미팅을 통해서 Harbor Light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고 50명 정도 들어가는 채플 장소와 사무실 자리까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제 회의를 통해서 확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요일날 문자를 통해 Alameda County에서 모든 대면 예배에 대한 전면 금지명령이 떨어졌다고 통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따라서 교회 렌트에 관한 상황도 지금은 추진하기가 힘들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건물 계약기간은 다가오고, 시청으로부터는 독촉이 날라오고, 이사할 장소는 보이질 않고...정말 하박국이 맞고 있는 상황처럼 답답하고 어두운 밤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감사절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누었던 설교말씀이 정작 나 자신에게조차 잘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침묵상을 녹화하고 예배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좀 막막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려는데 기도가 잘 집중이 되지 않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에 제가 주로 하는 것은 다윗의 시편을 읽는 것입니다. 한편 한편 눈으로 넘겨가며 지금의 나의 심정을 대변할 수있는 구절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몇장을 쭉 넘기다가 시편 57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소리가 다윗의 절규처럼 들려왔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고 싶은 마음, 재앙이라는 말도 눈에 꽂혔습니다. 

제목을 보니 사울을 피해 엔게디 굴에 숨어있을 때 지은 시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 때 나단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목동에서 왕궁으로 하루 아침에 거쳐를 옮긴 다윗. 

골리앗을 무찔러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을 때의 그 기쁨과 환호도 잠시 지금 그는 사울을 피해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루 앞 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 57: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그의 영혼이 지금 사자들 가운데 누웠다고 말합니다. 사자라고 표현된 그 대적은 다름아닌 사람들입니다. 말로 찌르고, 무기로 공격하는 대적들입니다. 그의 영혼이 불사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7절부터 다윗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시 57:7-9]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확정되었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요동치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밝히지 않습니다. 
  • 아마도 그는 기억했을 것입니다. 양들을 칠 때에 사자로부터, 곰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키셨던 하나님. 그리고 골리앗 앞에서 자신을 높여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다시금 붙들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그는 그의 마음을 확정합니까?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무엇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 기도: 내 마음의 소원을 올려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내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주님 앞에 내 삶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불안과 절망에 둘러쌓여있는 자신을 하나님 보좌 앞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 찬양: 그리고 그는 찬양했습니다. 만민 중에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했습니다. 뭇 나라라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여러 환경들 가운데서, 폭풍우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사건 자체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에게 어둠이 임하고 불안과 불만과 부정적인 모든 것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생각은 생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칩니다. 

출애굽을 시키시고 광야 가운에서도 그들을 먹이셨던 하나님이 가나안 앞에서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로잡혀 들어가려 하지 않자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삶을 맡긴다라는 뜻 - 가장 심각한 상황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냥 하나님 뜻이라면 죽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나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때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지 못하면 난 부정적이고 불안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없어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 -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 그 분의 손길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없어지지 않아도 더 이상 그 상황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견딜 수 있고, 맞설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그날 이후로 기도 시간 마다 핸드폰에 있는 노트를 열어놓고 하나 하나 체크를 해갑니다. 

- 난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진짜로 그 분이 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 마음이 아니면 다시 내 인생을 인도하신 그 분을 기억하며 믿음을 구합니다. 

- 난 그 분께 내 삶을 맡기고 있는가? 도와달라고는 하면서 여전히 짐을 지고 가진 않는가? 여전히 내가 짐을 지고 있으면 다시 그 분께 구체적으로 나의 짐을 아뢰고 의탁합니다. 

- 난 지금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 

- 난 지금 행복한가? 내 인생은 지금 행복한가? 

 

상황은 변한 것 없는데 내 인생이 여기서 멈춘다 하더라도 후회하거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버티고, 누리고,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하나님께서 이후로도 영원토록 지키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배워 나가길 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형편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를 보내면서 모두가 언제 옛날처럼 돌아갈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Edward John Stetzer라는 목사님이 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난 교회가 언제 예전처럼 돌아갈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를 지내면서 또 예전처럼 돌아갈 까봐 그것이 걱정이다." 

 

코로나가 하나님의 심판이냐, 인간의 잘못의 결과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세상은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코로나를 통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참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홀로 있어도 참 신자가 될 수 있을까? 난 내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고 굳세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언제 지나가지만을 생각한다면 예전의 삶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 예전의 나를, 예전의 내 신앙을, 예전의 교회를 바꾸지 않고는 앞으로의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교회건물을 넘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새로운 어떤 것을 향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고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성도의 자세는 고난을 통해 배워나가고,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새벽예배 때 나눈 말씀처럼 

  • 모든 고난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떠한 고난보다 크다. 고난이 내가 너에게 만들려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내가 고난을 통해 주려는 것은 네게 받는 고난을 해결하는 것보다 크다. 네가 고난을 극복하지 않으면 올 수 없다. 고난은 부활로 오기 위한 죽음의 길이지만, 그 고난에 압도되지 말고 고난을 통해 너에게 찾아오는 부활을 바라보라. 그 부활의 집을 세우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통해 부활의 소망의 집을 세워 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그래서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행복의 키를 발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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