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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십니까? (빌립보서 3장 11-16절) 


1. 서론

실수가 많은 제 인생 중에서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실수 중의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목사 안수 받으러 갈 때 잘못된 길을 갔던 기억입니다.  

목사안수를 받으러 가는 길 - 버클리에서 LA로 가는 길 

그 전날 숙제를 하느라 거의 밤을 새고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가는 여행길. 

운전대를 아내에게 맡기고 내비게이션으로 주소를 입력하고 편한 마음으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

그 네비게이션의 설정이 시뮬레이션인줄로 모르고 말입니다. 

시뮬레이션 모드라는 것은 내가 어디로 가든 내 차에 상관없이 처음에 입력한 길에서 목적지까지 정해진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길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한번이라도 딴 눈을 팔다가 길을 놓치면 내 차와 네비게이션이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전 네비게이션에 그런 기능이 있는지도 몰랐기에 운전대를 아내에게 맡겼어도 철떡같이 네비게이션을 믿고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아내가 잠자는 저를 깨워 "여기 이상해...새크라멘토가 나왔어..."

그런데 전 눈을 떠서 주위를 볼 생각도 않고 아는채 하며 "미국은 동네마다 다 똑같은 이름 있으니까 그냥 네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가..." 했습니다. 


아내도 "그렇겠지?" 하면서 또 몇시간을 쭉 갔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맥도널드에 들렸다가 이젠 교대해서 제가 운전을 하려고 다시 네비게이션을 켰는데 LA이 까지 가려면 시간이 9시간 반이 걸린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시동을 껐다 키니까 네비게이션도 재 설정이 된 것입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주위를 잘 둘러보니 르노랍니다. 4시간 반을 완전히 반대길로 온 것입니다. 

그것도 인생에 한 번 있을 목사 안수식에 길을 거꾸로 간 것입니다. 9시간 넘게 LA로 가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뭐 저런 네비게이션이 다 있나!"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기까지 올 때까지 몰랐을까? 아내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도 참, 인생의 이런 순간에 어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는가? 나중에는 하나님께도 원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네비게이션을 시뮬레이션 모드로 설정해 놓은 것도 제가 그랬고, 아내가 이상하다고 했는데도 면박을 주며 그냥 가라 한 것도 나이고, 운전자 옆에서 잠에 빠져 온것도 나 자신인데 원망부터 나옵니다. 

그렇다가 유학와서 공부한답시고 신학교 동기생들보다 몇년은 늦게 목사 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안수식을 위해서 금식도, 기도도 많이 하지 못하고 한 것에 대해서 회개가 나옵니다. 

그렇다 보니까 아,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 순간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 인생을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날 깨닫게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출애굽 해서 가나안 까지 한달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여년의 긴 기간 동안 헤메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인내도 생각이 납니다. 


그 때의 경험은 목사가 된 이후로 제가 기도할 때마다 되짚어 보게 되는 기도의 제목이자 순간마다 제가 분별하고자 하는 중심주제 입니다. 

"내 인생길이 바로 가고 있나?" 

"내 목회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나?" 

"우리교회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나?" 

"우리 성도들이 제대로 가고 있나?" 


아담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인줄 기억나십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엘리야가 이세벨 여왕을 피해 로뎀나무가로 와서 숨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사와 하신 말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2. 사도바울의 회심 

사도바울의 인생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그 이전의 삶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 가장 좋은 가문, 가장 좋은 학벌, 로마의 시민권, 그  당시 사회가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메섹 도성으로 또 다른 삶의 성취를 이루려 가고 있습니다. 


그 삶의 중간에 갑자기 예수가 그의 길을 막아 섭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너는 이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어느날 예수께서 바울의 인생 여정에 오셔서 그의 길을 막아섭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는 사울의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며 그의 인생을 돌이키게 합니다. 


그런데 회심 전과 회심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은 그의 열정적인 성품입니다. 

그는 회심전에도 게으르지 않고 열정있는 삶을 살았고, 회심 이후에도 그의 삶을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경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회심은 무엇을 바꾸었습니까?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전의 삶이 자기의 성공, 남들의 인정, 최고 중의 최고가 되기 위한 삶이었다면 

예수를 만난 이후의 그의 삶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의 영광, 그 분께서 맡기신 사명, 이방인의 사도로 그를 부르신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2. 사명 

주님은 우리의 삶에 방향을 주십니다. 목적을 주십니다. 

바울은 그것을 "내가 예수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가 예수를 잡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의 인생길을 막아서서 그를 붙잡았습니다. 

은혜는 나를 붙잡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했다. 내가 그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온 사건입니다. 


기독교는 이 올라감과 내려옴에 대한 신비를 보여줍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는 이 올라감과 내려옴의 신앙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가 그 마을을 지나가십니다. 삭개오는 여러 장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이 올라감 때문에 그가 예수를 만났다고 얘기합니다. 

모든 다른 종교는 이 올라감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그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예수가 그 마을에 왔기 때문이요,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가 올라가 있던 삭개오의 밑에 서서

"이제 내려와라.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요, 결국 예수가 그를 초대한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이 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붙잡은 주님은 각자에게 부름의 목적, 인생의 사명을 주십니다. 

각자마다 다른 내 인생의 숙제를 주십니다. 


바울에게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가나안땅까지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에게는 부정한 여인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삽에게는 성가대를 지휘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에게는 그 분의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삶의 목적, 푯대,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삶의 동기가 분명합니다. 


3.푯대를 잃은 인생 (꿈과 비전) 

저희 어렸을 때는 꿈에 어른들이 늘 물어보는 질문이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질문들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학에 들어갈 때도, 자기 진로를 정하지 못해서 방황합니다. 

공부를 다 하고 졸업을 한 후에조차도 아직도 지기 앞길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사회적인 큰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적이 무엇이 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돈버는 데에만 가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달란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면 무엇을 해야지에 맞춥니다. 

그러니까 평생 남들 기대만 맞추다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꿈과 비전을 구분합니다. 

꿈은 자기의 소원과 기대를 담은 것이지만 비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시는 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꿈은 비전이지 dream이 아닙니다. 요셉이 꿈꾸었던 것, 다니엘이 꾸었던 것,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것, 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달란트비유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이룰 능력을 각자에게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각자마다 탤런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자는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푯대를 잃어버린 자는 결국 악하고 게으른 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따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렵다고, 바쁘다고 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푯대를 잃어버립니까? 


모든 목적을 자기가 다 정해놓고 주님께는 도와달라고만 하는 인생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가 위급하면, 자기 뜻대로 안되면, 한계가 오면 그때서야 주님께 나와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님이 가지신 어떤 것, 주님의 일부이지 주님이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영적인 결혼으로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은 이 결혼의 이미지를 계속적으로 제공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와 결혼 한다면서 

"난 당신의 몸만 필요해...난 당신의 돈만 필요해..."

이렇다면 과연 그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연합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땅의 결혼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해도 늘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결혼을 통해 완전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고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도 온전히 연합하고자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인생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참 안식과 참 사랑이 없습니다. 


4. 아직 잡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이미 얻었다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 있는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나이는 60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배가 파산을 당하고, 수없이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었고, 그동안 사역의 열매로 보면 누가 보아도 훌륭한 사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노년은 좀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사역을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말하면 ‘나는 아직 불러주신 주님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뒤에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달려간다’는 헬라어로 ‘dioko’인데 의미는 사냥개가 먹잇감을 보고 전심전력하여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신앙인들에게 사명이 남아있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들을 합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없다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숨이 남아있는 이상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주십니다. 감당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나누었던 디모데 후서의 말씀은 빌립보서가 쓰여진 후 10여년 후에 바울의 생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준 편지입니다. 그편지의 말미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부르심의 소명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일을 다 마치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숨이 남아있는 동안 마지막 그의 숙제를 완수합니다. 

디모데를 불러 가죽에 쓴 글을 가지고 오라 하며, 마가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곁을 지켜준 누가와 함께 성경을 기록하고 몸으로 전했던 복음을 죽어서까지 후대에 성경을 남기는 작업을 합니다. 


그 때가 어떤 때입니까? 

육신적으로는 쇠약하고 건강이 다 상하고, 감옥에 갇혀 이젠 처형 날짜만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는 후회없이 자기의 할 일을 마치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담담히 천국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열심은 죽는 순간에 까지 꺾여지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성경을 남기고 자기를 부르신 목적,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하며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며 죽을 수 있다면...

목사가 기도하다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윤목사이야기...)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혹시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주저 앉아 있지는 않으십니까? 

저처럼, 바울처럼, 목적지와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께 붙잡힌 인생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한 삶입니다. 

주께 붙잡히지 않은 인생이 바로 노예의 삶입니다. 

주께서 주신 푯대가 있는 인생은 행복한 인생입니다. 

죽기까지 내가 할 일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살 이유를 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갈길을 아시고 알려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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