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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승리 (삼상 14장 36-46절) 


지난 주 우리는 믹마스 전투에 임하는 사울의 태도를 통해 그의 조급함이 어떻게 믿음 생활에 악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사무엘을 통해 명하신 하나님과 이미 약속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위해 사울이 지켜야 했던 것은 7일이 될때까지,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어 사무엘이 도착하여 하나님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사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모여들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흩어지고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사울은 다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7일째가 되자 마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려다가, 사무엘이 도착하여  "네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마치 자식을 주리라는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하갈을 취하여 자신이 그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급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되는 데서 오는 불신앙이고 그 약속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교만함에서 나옵니다. 

반대로 신앙은, 믿음은 조여오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느긋함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이고 간절한  목마름입니다. 


  • 이제 14장에서는 믹마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울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믹마스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 때때로 우리가 실수하고 불완전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는 결과가 나타날 때에 안도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나의 불완전한 믿음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사울의 삶을 통해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 지금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믹마스라는 지역에 블레셋 군이 주둔해 있고 지금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직 베냐민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군사들은 병거만 삼만이고 군사는 바다의 모래와 같은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삼천명쯤 모였었다가 지금은 그나마도 도망하여 600여명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 그런데 이 상황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처신이 극한 대조를 일으킵니다. 

먼저 사울은 사무엘을 대신하여 아히야를 자기 옆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삼상 14:3) 

그런데 이 아히야는 어떤 자입니까?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 엘리의 증손자...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적에 패하자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다가 이기려고 하다가 언약궤도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이사봇,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가봇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꾸중을 들은 사울이 찾아 제사장으로 세운 자가 바로 이 가문에 속한 이가봇의 형제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 엘리의 증손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제사장을 세운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군사 진영이 혼란스럽게 되자 18절에 보면 아히야에게 시켜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명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짓을 똑같이 저지르게 되지요. 

이것은 무슨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참 제사장이라면 이 법궤 앞에 서는 것 조차 두렵고 떨릴 일이요,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은 지기의 필요에 따라 법궤를 이리 가지고 왔다 저리 가져갔다 합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면 법궤를 가져다가 하나님보고 도와달라 하고 필요없으면 눈앞에서 치워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누가 누구를 부리는 것입니까? 철저히 자기가 주인되어 하나님을 부리는 신앙입니다. 자기가 주인된 신앙입니다. 


  • 이 때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든 자, 즉, 보디가드, 호위무사를 앞세워서 단독으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나타나는 행위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1절) 이요, 자기의 군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면서 블레셋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그들을 향해 진격하여 내려오면 올라가지 말고 도망할 것이요, 만약 블레셋 군사들이 요다단에게 이리로 올라오라 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표징으로 알고 올라가자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행위는 미디안 군사들을 향해 승리했던 큰 용사 기드온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은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대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요, 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표징을 구했던 기드온의 모습과도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단 가운데 역사하시어 블레셋 군사들을 일대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14절, 15절 보십시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자절 갈이 땅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명 가량이라.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여러분 지금 블레셋 군사가 몇명입니까? 셀 수 없이 많은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무기든 자가 죽인 자는 고작 20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여금 블레셋 모든 진영과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땅이 진동하였다고 말합니다. 큰 떨림이 일어났다고 증거합니다. 믿음의 행위는 이런 영향력입니다. 언제 이런 큰 떨림이 일어납니까? "주의 말씀 선포될 때에 땅과 하늘 진동하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에 이런 큰 떨림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는 작은 것이지만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드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그 지역의 모든 자들을 먹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행위 자체는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큰 떨림이 있고 땅과 하늘이 움직이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 다시 사울로 돌아옵니다. 파숫꾼이 보니 블레셋 진영의 무리가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합니다. 점호를 해 보니 요나단과 무기든 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게 합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것처럼 법궤를 가져와서 전쟁을 치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 세워서 전쟁을 승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니까 블레셋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그냥 가만 내버려 두어도 그들 스스로 죽이고 흩어지고 하니까 사울이 뭐라 하냐면 아히야에게 "네 손을 거두라" 무슨 의미냐면 이젠 법궤도 필요없다. 이젠 우리가 이겼다...철저히 자기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법궤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승리로 말미암아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1절) 세상으로 타협하며 나갔더 자들이 다시 신앙 안으로 돌아옵니다. 23절에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은 벧엘의 다른 이름으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을 의미한다면 벧아웬은 우상의 집, 속이는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자기를 구원하여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집"이란 벧엘로 이름붙입니다. 그런데 이 벧엘이 나중에 북왕국이 갈라져 나오면서 북왕국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벧엘에 황금송아지를 세워좋고 거기서 예배드림으로 "벧엘"이란 명칭 대신에 "벧아웬"이라 이름 붙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황금 송아지로 바꾸어 철저히 세상적인, 자기 성공적인 신화를 꿈꾸는 장소로서의 기복신앙, 우상숭배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말이 벧아웬이 된 것입니다. 자기 상황에 따라 블레셋에 붙었다 하나님께 붙었다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단상을 보여주는 말이지요. 사울의 신앙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사울은 한가지 명령을 더 하는데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리"고 합니다. 이전에 이런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전쟁하거나 할 때에 태양을 멈추게 하고 그들을 진멸하기까지 끝까지 싸우게 하신 것을 염두에 두고 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의 큰 오점을 무엇입니까?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사울은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으로 보고 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원수를 갚는 자기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전쟁을 치루면서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점점 더 피곤하여지고 지쳐갔습니다. (26절) 


그런데 이 명령을 누가 어깁니까? 바로 요나단입니다. 

"27절)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그런데 그가 꿀을 먹을 때에 함께 했던 백성 중 한 사람이 왕의 명령을 이야기하니까 뭐라 말합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을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결국 피곤한 군사들이 참지 못하고 탈취한 물건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채 먹게 됩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고 이 피로 말미암아 제사하지 때문에 이스라엘 율법은 동물들을 피 채로 먹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잘못된 명령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백성들이 탈취한 동물들을 잡아 피채로 먹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울이 백성들의 행위를 보고 나서야 "그들이 믿음없이 행하였도라." 원문을 보면 "그들이 신의를 깨뜨렸다. 율법을 어겼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돌을 가져다가 거기서 잡아 먹게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35절) 

 

 요나단의 용기로 말미암은 승리- 사울이 흥분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제 동틀 때까지 쫓아 남기지 말고 전멸하자! (36절)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그래도 제사장이라고 하나님께 묻자고 제안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심(37절) 

 왜? 아니 다 정해좋고 마음대로 행하면서 왜 묻기는 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우리의 기도가 이와 같지 않은가? 

 이 물음은 자기 결정에 확답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므로 제비를 뽑아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지를 가린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누가 뽑힙니까? 요나단이 뽑힙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45절을 통해서 반대하니까 또 죽이지 않음.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끝맺지 못한 전투) 

 

 무언가 신앙의 행위를 하기는 합니다.  

 제사장을 뽑고 법궤를 가져오게 하고, 명령을 하고, 묻기도 하고..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가 먹으니까 이젠 다 먹게 하고, 법궤를 가져오게 했다가 블레셋 군이 스스로 흩어지니까 멈추라고도 하고 요나단을 정녕 죽으리라 했다가 백성이 만류하니까 또 그만두게도 하고... 

 

 그의 삶엔 일관성도 없고, 원칙도 없습니다.  

 블레셋의 전투도 "내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고  요나단을 죽이려는 의도도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릴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한 신앙은 철저히 자기를 위한, 자기를 향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삼상 14:47-48]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해 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통해서도 승리를 주십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십니다. 전쟁을 이김으로 사울이 행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삼상 14:52)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전쟁이 나면 날 수록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앞장섭니다.  

요나단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참지 못해 단신으로 들어가 그들을 대적했는데, 사울의 관심은 늘 자기 자신일 따름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완전할 수 없어서 물론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실수하고 또 넘어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승리하는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한 의도에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과 의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정말 다른 것입니다. 

사울은 신앙의 행위는 이렇게 저렇게 행하였지만 그의 의도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기 보다 자신을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염려하고, 자기의 원수 갚는데 앞장 서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때 주워지는 승리는 축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운 승리입니다. 이런 승리를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사울의 악한 의도는 점점 더 극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때에 차라리 그의 생이 끝났으면 사울은 그래도 업적이 많은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악한 의도는 다음 장에 가서 마침내 폭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여전히 부끄러운 것이 많지만 일단 어려운 삶의 문제가 해결되면 안도하지 않으십니까?

내 신앙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나보다 하고 나태해지지 않습니까?

정작 자신의 본모습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승리하면, 결과가 좋으면 다 괜찮은 듯 넘어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기적인 신앙,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길로 갑니다. 언젠가는 가라섭니다.

그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요나단 처럼, 다윗 처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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