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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장 8-16절   악의 가장 중심에서 



아합과 이세벨 여왕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부흥과 함께 영적인 타락이 오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축출되고 그 자리에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음란한 제사를 드리면 예루살렘 성전을 변질시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에 홀연히 일어난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가문도 지파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집안 사람 무명의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그 이전이 모세나 다윗의 집과는 근본 태생이 다른 선지자입니다. 

그가 감히 아합왕 앞에 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열정으로 가득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말대로 그는 열심이 특심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열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열정은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훈련되지 아니한 이 엘리야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17장의 첫 절은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로 시작되지만 마지막 절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그릿 시냇가와 오늘 나눌 사르밧 신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8장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의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950명과 1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엘리야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며 홀로 되는 훈련을 시킵니다. 열정이 가득한 자에게 홀로되는 훈련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홀로되는 훈련, 매일 같이 까마귀로부터 공급받는 만나의 훈련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열정에 훈련이 더해질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헌신된 열정이 있어도 훈련받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이제 그릿시냇가가 말랐다"

사르밧의 훈련은 이제 홀로 하나님과 고립과 기근을 통해 대면하던 그릿 시냇가의 시기가 끝났을 때에 시작됩니다.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 끝이 납니다. 신학교 1학년이 끝이 난 것입니다. 

이제 훈련이 끝났을까? 아니 이제 정말 제대로 된 2학년 생활을 시작합니다. 사르밧의 의미는 "용광로, 제련"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욥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에서 말한 대로 정금이 되기 위해 용광로로 들여보내십니다. 


9절에 등장하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 어디인가? 

(왕상 16: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시돈은 이스라엘에 죄악을 가져다 준 이세벨의 고향이고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세벨을 정복하기 전에 엘리야를 이세벨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해서 그 땅을, 그 땅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의 왕궁에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애굽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요셉을 군대장관의 가정 총리로, 감옥의 총무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시대를 정복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악의 중심지에서 엘리야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 가기 싫은 땅,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그 땅에서 하나님은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그토록 가난한 과부일까?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사르밧 과부의 헌신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읽고 들었습니다. 

없는 중에 하나님께 헌신한 과부의 헌금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곳에 보내셨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눅 4: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예수님께서 고향 땅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 당하자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예를 드신 것이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사르밧땅 과부를 택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 문등병자가 아니라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믿음을 찾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사르밧 과부에게서, 나아만에게서 참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세벨의 고향, 바알의 땅에서 살고 있는 이름 없는 가난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었던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왕상 17: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섬기고 성공을 섬기고 권력을 쫓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선 엘리야의 출사표는 무엇입니까? 

17장 1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2절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대에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심을 믿는 두 명의 믿음의 사람을 만나 동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단지 선지자 엘리야가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나에게 그 음식을 줘라'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렇게 무정하신 하나님이냐? 

아무리 복을 주셔도 그렇지 죽으려는 사람 앞에서 그 음식을 가지고 시험하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이 시험을 통과하겠는가? 하면서 많은 신앙인들에게 부담감과 절망감,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하시고,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만나게 하시는가? 

각자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상황에 얽메이지 않고 믿음 만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는 두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만나 고난의 때를 이기고 훈련 받아 이스라엘과 시돈 땅 사르밧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거나 남편이 없는 여인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할 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과부가 되어 자식과 같이 죽으려 하는가? 

이세벨의 신, 바알을 의지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면서 자원하는 고통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라합처럼 자기 민족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자기 동족의 반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에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녀가 이 사르밧에서 바알을 믿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서 하나님의 만나와 같은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연명함이 있었겠지만 이제 그 은혜마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공급함을 받고, 사르밧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영적 죽음의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좁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이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기가 막히게 대면한 것입니다. 


(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냥 무작정 헌신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보장을 주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순종 할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약속은 씨앗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듣다가 약속을 받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것을 성취하고 열매맺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믿음의 순종으로 추수하는 것입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여러분,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이기면 정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믿음이 됩니다. 

열성만으로, 열심 만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열매맺는,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말만 번드르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말과 삶이 함께 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이 능력이 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 아시지요? 내 마음 아시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넘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은 자기 일 우선하는 사람이 대부분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셔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니까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르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나는 떡이 없고 다만 기름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아주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냥 있는 떡 주는 것도 어려운 것인데 그걸 가지고 요리까지 해서 주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애썼지만 결국 내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내 처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안다. 아니까 두려워 말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라." 

하나님도 그 처지를 아시니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씨앗은 우리의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 믿음의 행위가 있는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기에 두려워말고 믿어라. 순종해라. 하는 것입니다. 


  •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행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절대로 말로 인해서 "믿습니다"한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 없이 보여달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하라 그러면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팽팽히 맞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굽히고, 자기 의지를 꺽고 말씀에 순종하면 은혜를 맛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10절의 "물 조금"과 11절의 "떡 한조각"입니다. 

 대단한 것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 만한 믿음, 그렇지만 정말 나를 죽일 수 있고 헌신 할 수 있는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작은 씨앗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에 얽매인 우리는 그것이 전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사르밧 과부에게 말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입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에게 동역자로 주어진 사람이 사르밧 과부입니다. 그는 이방여인이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이세벨의 고향사람이고 가난하고 율법도 모르는 수준낮은 사람입니다. 길에서 보면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든 때에 그녀와 함께 사르밧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사람,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붙여 주신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과 함께 동역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옆에 붙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마음 들어 결혼했던 사람도 며칠 지나고 몇 년 지나면 마음에 안들지 않습니까? 

하물며 정말 모르는 사람을 교회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가정에서 만나 함께 어우러 사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도록" "사로 맞추어 나가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이 사람 안맞아. 난 이 사람과는 도저히 못하겠어..하는 사람은 결국 난 하나님 하라는 대로는 절대로 못살아. 

난 내맘대로 살거야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맘에 들도록 하십니까? 

"먼저 나를 위해 그 다음 너를 위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 함께 신앙 생활 하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동역자구나 하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은 완전합니다. 선합니다. 나보다 지혜로우십니다. 내게 꼭 필요하니까 그런 사람, 그런 장소, 그런 사건들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에 믿음을 보이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결국 신앙 생활은 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열심만 있던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의 훈련을 통해 이제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고립과 고독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왜 고립하게 하십니까? 사람이 고립되기 전까지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이름 부르지만 결국 자기 의의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용광로와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연단은 우선순위의 훈련입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중 무슨 일을 할래? 

육신의 일과 영적인 일 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너 자신을 위한 일과 하나님을 위한 일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그것을 통해 내 정욕을 끊고, 내 자아의 무거운 성을 무너뜨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특별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특별합니다 보통 사람 엘리야를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을 통해서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