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19  이전 다음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아홉명과 한명 그리고 나 (누가복음 17:11-19) 


이번주부터 "감사"에 대해서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등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병고침을 받고도 예수님께 다시 와서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인으로 인해서 감격해 하셨습니다. 동시에 문등병을 고치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다른 아홉명에 대해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17절 - 18절)

그러나 단순한 내용이지만 말씀 한절 한절을 들여다보며 묵상하면 더할 수 없는 신앙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펴 놓고 한절 한절 깊이 이 말씀을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눅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과 같은 곳이고 우리가 궁극적을 가야할 하늘나라의 목적지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마리아는 더럽혀진 땅이고 죄악의 땅이고, 성도들이 상종치 않는 땅입니다. 세상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자라신 곳입니다. 제자들의 출신지입니다. 복음의 근거지 입니다. 지금 세상과 믿음의 장소 사이를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길이 이렇습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인생길이지만 그 중간의 길은 항상 믿음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를 우리는 지나갑니다. 예수님도 지금 우리가 사는 믿음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 바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눅 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 나병환자: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상처입고 소외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긍휼하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문등병자들이 사는 곳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부정하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어쩌다가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거나 혹은 지나갈 때에는 스스로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문등병자들의 아픔은 몸의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 속에는 짖눌린 소외감에 있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변두리에 사는 것이 바로 문등병자들의 삶이었습니다. 
  • 예수를 만나: 그렇게 소외되어 아무 낙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더군다나 누구나 회피하고 따로 고립되어 살 수밖에 없었던 문둥병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만남이 최고의 행운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고 걸림돌이 제거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기껏해야 수산회사 사장 정도로 머물렀을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세리장이 되었을 것이며, 여전히 죄의식 속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은 교회 오래 다녔다고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경공부했다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만난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사방이 나를 힘들게 해도 나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 분이 날 홀로 남겨두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가 되십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데도 여전히 괴롭고, 두렵고, 힘들다면 다시 예수 만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다가 지금 이 시간 다시 힘들어 지셨다면 예수님 다시 만나셔야 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멀리서서: 멀리 서서)은 당시 문둥병자들의 생활 환경의 일면을 보여 준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적어도 50야드(백보)는 떨어져 있어야 했다(W.Barclay). 그들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기다리던 예수가 내 앞에서 지나가는데도 가까이 나가지 못하고 멀리서서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죄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가까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감히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멀리감치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 서서 예수를 바라보더라도 예수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가까이 나아오지 않더라도 우리를 멀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태나 우리의 우리됨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눅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 기회란 누구에게나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최대로 활용해야 후회하지 않게 된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로부터 멀리 떨어진 까닭에 자신들의 존재를 인식시키고자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 것이다.  
  •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성경에 보면 부르짖는 기도가 수없이 나옵니다. 같은 기도라 할지라도 부르짖는 기도는 강렬한 기도입니다. 좋은 기회는 인생에서 아주 많이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기회가 찾아올 때 우리가 할 일은 간절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회는 대부분 위기와 함께 옵니다. 고난과 함께 옵니다. 기회를 포장한 보자기가 바로 고난이고 시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영적인 사람은 고난이나 시련 중에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고난이나 시련이 오면 절망하고 원망하고 넘어집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 3)”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특별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시편에는 그가 얼마나 자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환란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 6)”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30 : 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시 142: 1-2)”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  5:12-16에는 예수님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문둥병자에게 손을 갖다대시며 권위있는 치료의 말씀으로 고치신 사례가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는 그가 그 열 사람의 문둥병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각자 그들이 온 마을이나 촌으로 가서 정결법 준수 여부를 감독하는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단순히 명령만 하신다. 문둥병자가 그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가 고침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이제 그는 다시 일반 사회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물러갔다는 것은 예수께 대한 신뢰를 표시하는 것이다.

가다가: 가는 도중. 자기도 모르게.... 말씀을 믿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얻은 깨달음.

즉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믿었다. 위대한 역사는 믿음을 통해서 일어난다. 주를 믿는 자는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역사가 일어난다.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주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된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알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믿음의 부재이다. 

14절에서 예수도 멀리 떨어진 채로 '나았다'는 선언도 없이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한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문둥병자의 치유를 확인하고 선언하는 지위에 있었으므로(레14:2), 이 행위는 문둥병 치유의 법적인 절차인 셈이다. 여기서 나았다는 말 한마디나 어떤 다른 행위도 없이 그냥 제사장들에게 가서 확인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Liefeld).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그들의 믿음의 순종의 결과를 보여 주며, 이것은 17:5-10의 믿음과 연결된다. 

17:5: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17:6: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17: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라. 

-> 믿음은 무엇이냐? 주께 받은 명령을 마땅히 다 행하는것. 주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그래서 결과를 가르쳐 주지 않고 그들의 순종을 보려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명령하심. 


[눅 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 그는 주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자기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을 보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응답받았을 때에 나타난 그의 반응은 무엇인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 

주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는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8절)

어디있느냐?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 모습. 어디 있느냐? 다른 사람들은 어디가 있느냐?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  지금 온 자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은 자를 간절히 찾으시는 것이다. 

돌아온 자가: 무엇을 위하여 돌아오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하나님을 찬양하러... 

주님이 그들을 고쳐 주셨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그런데 돌아오지 않은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 그 영광을 자기가 가로 챈 것.


  • 대부분의 관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 예수님 만나서 응답받는 것. 그래서 응답받으면 할렐루야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왜 공생애를 사시면서 십자가를 지셨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우리는 기도 응답 받은 사실만 가지고 할렐루야, 응답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와 직접 감사함으로 영광돌리지 않으면 응답은 나에게 주신 선물이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다. 그저 나에게 주신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채우는 것.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 하나님의 영광릉 가로채는 것. 

주님은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신다. 

  • 자, 지금 열명의 문등병자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중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인은 함께 다니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이 같이 있었다는 것은 문등병때문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인, 신앙적인 차이보다 훨씬 더 불행하고 가혹한 상황때문에 평상시 상종하지 않던 이스라엘 사람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이 치료를 받자 그들은 또다시 분리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분리가 예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도 찾아가서 그들 구원하고 제자 삼지요. 즉 예수님 안에서는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명의 유대인 문등병자들은 고침을 받은 것 때문에 다시 사마리아인과 분리되어 사라졌습니다. 예수께 나아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고침받고 죄인의 길로 다시 들어간 것이지요. 

다시 말해 감사가 없는 생활이란 무엇인가? 은혜를 경험하고도 구원의 길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받아놓고도 멸망의 길로 다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감사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9절) 

일어나 가라: 엎드렸던 것에서 일어나라! 회복하라. 가라: 이제 되었다. 완성되었다. 이루었다. 

주님은 엎드려 있는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고 축복에 참예한다. 

믿음과 봉사는 그 칭찬이 주님에게서 나와야 가치가 있다. 사람의 칭찬이나 평가는 주님의 그것을 대신하지 못한다. 


* 감사하지 않는 자의 마음 

1. 이기적 본성

 아홉 문둥이들이 예수로부터 치유를 받고도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들은 이제 건강하게 된 이상 예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절실했던 필요가 충족되면 그 마음에 전환이 나타난다. 은혜를 베풀어 준 은인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혜'를 입었다는 부담으로부터 속히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은 황폐한 마음과 인간성 상실은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이기적 본성은 타락 이후의 인간의 실상이다.

2. '은혜'의 가치에 대한 무지

 배은망덕한 자들은 흔히 '은혜'의 가치에 대하여 무지하다. 예수의 신유 사역은 영적 능력에 의한 '은혜'이다. 그러나 이런 은혜는 왕왕 무시되기가 쉽다. 고가의 약품이나 최첨단 의료 기술에 의하여 치료되었다면 굉장한 가치를 인정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루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은혜는 거저 얻은 것이므로 경솔히 여기기가 쉽다. 그들은 질병의 치유가 그 영혼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최상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3. 감사의 축복에 대한 몰이해

 그들은 또한 감사하는 삶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감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의 감사 생활은 하늘나라의 삶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이다. 하늘나라는 감사와 찬양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 감사하는 자의 마음 

 1. '감사'는 '감격'이다

  열 문둥이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문둥병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했다. 그 중 사마리아인만이 감격하여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께로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다. 그렇다. '은혜'에 감격하는 자만이 감사를 할 수 있다. 감격이 없는 감사란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기 쉽다. '죽음의 병'에서 고침을 받고도 감격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문둥이들은 감사가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자는 항상 감격 속에 사는 자이고, 항상 감사하며 사는 자이다. 은혜가 끊겼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내려 주신다. 내 눈이, 내 마음이, 내 영이 그 은혜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부터 은혜에서 떨어졌는지 깨닫고 고백하고 다시 은혜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2. '감사'는 '사랑'이다

 감사하기 위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온 그 사람은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해진 것을 인정받는 일보다 감사하는 일을 먼저 했다. 이는 율법보다 사랑을 우선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사랑과 흠모가 있다. '죽은 자의 삶'이었던 '문둥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그분이 누구인가! 어떻게 감사 없이 기쁨만을 먼저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은혜'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감사'를 낳는다.

3. '감사'는 '구원'이다

 고침받은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구원'을 선포하셨다. 구원받은 자가 아니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할 수 없다. 응답의 기쁨은 감사로 승화되어야 하고,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은혜를 받은 자는 감사하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선포된다. 그러므로 감사는 구원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