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19  이전 다음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믿음 (딤후 1장 9-18절)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사형을 한 해 앞둔 시점에 쓴 글입니다. 

사형을 앞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디모데에게 권한 권면의 편지에서 눈에 띄는 몇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7절) -무엇을 사망을, 고난을...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8절)


그에게 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 죽어도 괜찮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 자신은 산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확신마져 없습니다. 

진짜 사망이 임박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믿음 안에서 그가 양육하고 가르쳐 왔던 자들은 어떻게 될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괜찮다가도 불안이 엄습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덧씌워지게 되면 

마음은 곤두박질 하게 되고 꺾이게 된다. 

한 번 마음이 꺾이게 되면 그 마음을 추스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연약하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기도와 말씀 속에서 두려워 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것이 그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의 체험이었다.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내 마음에 파도가 일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Key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다. 


그의 소명은 그의 열심을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기 소명의 확신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여러 환경이 그를 흔들 때마다 이 소명의식은 그를 더욱 요동치 않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Basement였고 Foundation이었다. 


그는 이방인을 구원하여 그들의 땅에 교회를 세우는 것, 그것을 위해 당하는 모든 핍박과 환난을 엉원적부터 미리 정해져있었던,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주신 자신의 사명으로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자기를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그의 믿음의 기초였다. 


그는 상황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자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요동치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믿음은 흔들리는 상황을 흔들리지 않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르신 소명을 확신하는 것이다. 


  •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아얘 믿음이 변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부겔로: 그의 이름의 뜻은 망명자였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부겔로는 고난의 때에 세상으로 망명했다. 바울을 바라보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의 삶을 떠났다. 

허모게네: 그 이름의 뜻은 허메에게 난 자, 허메는 바로 헬라의 신이었습니다. 
이전에 루스드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나바는 스쓰로, 바울은 허메로 불리면서 제사를 드리려 했던 바로 그 신이다. 


그들은 고난을 떠나 세상으로, 세상의 신으로 망명했다. 그들과 같이 아시아에 있던 많은 신자들이 바울의 고난을 보며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세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사슬에 메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부터 그를 자주 찾아와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했다.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빌립보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는 열심히 봉사했다. 


오네시보로는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가 아닙니다. 그는 빌레몬의 노예로서 도망나왔다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자이지만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교인으로서 끝까지 바울을 돕고 함께 했던 신실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해 달라고 그들 위해 중보하며 디모데에게도 부탁하고 있다.) 


13-14절은 고난의 때를 살아가는 디모데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바울의 모든 신앙의 간절함이 담긴 유언의 말씀이다. 


[딤후 1:13-딤후 1: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의 삶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의 말을 빌자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가 나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게 주신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크게는 내게 주신 사명이고 작게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cf) 로고스 VS 레마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성도님들께 흔하게 듣는 말. 

이단들도 많고, 욕먹는 교회, 욕먹는 목사들이 하도 많다 보니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참다운 믿음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바른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가장 고전적인 설명을 하자면 

진, 선, 미입니다. 

참다운 것이 곧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으로, 그리고 쉽게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거꾸로 참다운 것이 아닌 것은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불륜의 사랑을 저질르면서 사랑때문에...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거짓된 진리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올바른 관계 안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방법이 옳지 못한데 결과만 좋다고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결과만 좋으면 좋다고 합니다. 

성경은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난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방법과 결과가, 동기와 결과가 함께 선한 것이 참이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과 능력있는 사람을 나눕니다. 

착해도 능력없으면 버림받고, 좀 들 착해도 능력있으면 대접받습니다. 

나쁜 님자 신드롬이라고 거칠고, 좀 나빠도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이 매력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선한 것이 곧 능력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지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가정도, 교회도 진선미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한 신학교에서 대학생 신학생들 수련회 하는데 연세대 신학과 총장 출신인 한 목사님이 와서 목사가 되면 권력과 명예에 물질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설교했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항의를 받은 사실이 기독교 신문에 나왔습니다. 

 오정현이니 전병욱이니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끊임없이 거짓에 거짓을 일삼는 목사들의 교회가 오히려 크게 부흥되는 현실을 봅니다. 

 어쩔 땐 막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성전의 크기도 성도의 수도 아닙니다. 

 정말 바른 신학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에, 감정에 맞춘 신앙이 아닌, 말씀에, 소명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곧 믿는 자의 능력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