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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랑법 (사무엘하 1장 17-27절) 


사무엘상의 마지막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한 사울의 모든 아들들과 사울의 참모들이 블레셋에 의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고 사무엘하는 그 죽은 사울과 요나단을 슬퍼하는 다윗의 시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10년을 도망하며 광야에서 블레셋 땅 시글락으로 피신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울의 죽음으로 그 길고 지긋지긋한 망명생활이 끝이 난 것입니다. 


처음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을 읽었을 때에 그 슬픔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윗도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가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복수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회였던 하길라 산에서 다윗의 참모장수였던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하며 인간적인 복수를 금하면서도 동시에 

"여호와꼐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쟁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9-10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손을 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손대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을 보호하며 끝까지 지켜주었던 요나단의 죽음을 그가 얼마나 슬퍼했을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는 슬픔보다는 악인의 말로를 보는 것 같은 시원함이, 아니면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낄 순 있어도 그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친히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이 불렀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사람들, 즉 전쟁의 가장 앞에서 찬양을 담당했던 찬양대에게 이 찬양을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슬픔에 참여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그 모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사울을 통해 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리고 복을 받았으니 그의 죽음을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친구 요나단의 죽음과 똑같이, 아니 오히려 사울을 앞세워서 큰 용사, 이스라엘의 영광,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자라는 찬사를 보냅니다. 

어차피 죽은 자니까 이제 축복이라도 빌어주자는 소리일까? 

승자의 여유인가? 


그러나 그의 비가에는 사울을 정말로 사랑하고 충성했던 그의 진심이 묻어납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진심을 다해 애도하고 슬퍼하고 또한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울며 금식하며 슬퍼했습니다. (11-12절) 


다윗이 기회가 있는대도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울이 스스로 죽으려 칼위에 엎드려져서 죽으려고 했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아 지나가는 군사에게 자기를 죽여달라고 해서 아말렉 출신의 병사가 사울의 원대로 그를 죽이고 그의 왕관과 장신구를 다윗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도다 하면서 그 병사의 죄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곤경에 빠뜨리고 죄에 빠져 

무당을 찾아다니며 비참한 삶을 마감하지만 그는 사울이 자신에게 행한 것에 얽메이지 않고, 하나님꼐서 사울에게 행하신 은혜에 따라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렇게 비참히 죽음을 당한 것 때문에 옷을 찢었고, 울며 금식하며 애통해했습니다. 


다윗의 이 슬픔을 바라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면서 슬퍼하시며 고통스럽게 우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 11:33-36]

(요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눈물인데 왜 그러냐하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잔다라고 표현을 하셨고 또한 잠시 후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셨고 그를 곧 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있는 나사로를 보고 우셨습니다. 

아니 곧 살리실 사람 앞에서 왜 우셨을까? 우리는 이 울음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구약의 다른 말씀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2-6)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고 슬프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가 사랑하는 자녀, 그의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이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고 맞은 흔적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주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죄악의 세력, 사망의 세력 앞에 무너져 지금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상태를 두고 안타까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자매들과 동네 사람들이 죄의 결과인 한 친구의 사망을 두고 슬픔에 겨워 우는 모습을 보며 비통하여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범죄하여 부패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이 여기며 우신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용사요, 영광이요, 아름답던 사울과 자신의 친구 요나단의 죽음을 맞아 금식을 하며 울고 슬퍼하는 것이고, 이런 슬픔을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길 원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바라보시며 흘리신 슬픔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아담이 선악과를 보며 하나님을 피해 바위에 숨은 것을 바라보시며 "아담아, 아담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구원의 첫 약속으로 이어졌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에 대한 응답이 출애굽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리고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슬퍼하셨던 주님은 믿는 자들을 그 애통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마태복음 5장, 팔복) 

그리스도인의 팔복 중 두가지가 이 슬픔에 관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슬퍼하는 자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의미 입니다. 

윤동주의 시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8번 반복 

저희가 영원히 슬픈 것이요


하고 마칩니다. 팔복의 모든 내용을 슬퍼하는 자로 결론지은 것이지요. 


영성이 있다. 신앙심이 깊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을 깊게 누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삶이 매말라 있으면 사람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문등병이 무서운 병이듯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영적인 질병입니다.  


중세 시대 수도원에서 성경을 잘못 오해해서 예수님꼐서 우시는 장면은 있어도 웃는 장면은 안나와있다고 하면서 웃는 것을 죄악시 여기던, 신앙생활의 해가 된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희극이라고 할 수 있는 웃기는 내용의 서적들을 다 모아서 수도원 창고에 두고 거기서도 모잘라 책장마다 독을 발라 놓아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움베르트 에코라는 학자이자 작가가 <장미의 이름>으로 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리고 초대교회 사람들은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함꼐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웃고 울으며 함께 삶을 나누었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악을 대할 때 마다 울게 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지 못할 때에 울게 하십니다. 


다읫의 시편- 70%가 이른바 비가. 슬픔의 시입니다. 

다윗은 이 슬픔을 가리치고 함께 부르게 했습니다.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찾게 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최악은 슬픔에 빠져서 못 헤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슬픈 상황 속에서 그것을 외면하고 겉돌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상담학에서는 슬픔이나 고통을 부인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중독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일중독, 알콜 중독, 게임 중독, 도박 중독 등 모든 중독의 근원은 심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대안을 찾는데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슬픔이나 죽음, 고통을 대면하지 않고 자꾸 회피하고 피하다보면 그 결과 우울증이 생겨나 다른 방면으로 그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교회에서, 신앙 공동체에서 눈물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은 많은데 눈물을 흘리려는 자는 찾아 보기 힘듭니다. 슬픔에 맞딱드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를 미리 아셨는지 마태복음 11장에서 마지막 때를 경고합니다.  


[마 11:16-17] 

(마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처형이야기---장인어른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장녀로서 장례식에 참가해서...장례식 치루고 어머니 위로하고, 형제들 챙기고 급하게 다시 스위스로 귀국..슬퍼할 겨를도 없이, 부모님, 형제들 앞에서 울 수도 없고...

많은 성도님들이나 지인들이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아버님 좋은 데 갔으니까 울지마, 기뻐해... 웃어..." 

천국갔어도 잠시 헤어져도 슬픈 때는 울게 놔두어야 하는데 맘대로 울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스웨덴 가서는 자녀들 앞에서, 남편 앞에서, 그리고 외국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학교에서도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일에 빠져서 살다가...무표정, 무감각...슬픔을 억눌러서 생긴 병...


다윗은 자기의 10년간의 고통의 이유엿던 사울의 죽음 앞에서 애통했습니다.

옷을 찢으며 슬퍼했읍니다. 

다윗은 실수도 많고, 어쩔때는 엄살도 많고, 어쩔땐 아이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는 슬플 때 참 슬퍼할 수 있고, 기쁠 떄 참 기뻐할 수 있는,  왕이라는 신분이 그의 찬양을 막지 못했고, 원수라는 이유로서 그의 슬픔을 억누르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 내 목회의 이유...

주님께 무조건 순종해서 교회당 크게 짓고, 성공해서 주님을 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 사람이 되고, 참 인격이 되고, 참 생명이 되도록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때 기뻐할 수 있는 풍성한 삶이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표현법입니다. 

교회는 마음 껏 울고 웃을 수 있는 곳입니다. 숨기는 곳이 아니라 어떤 것을 표현해도 용납이 되는 곳입니다. 

저는 울 수 있을 때마다 울 것이고, 웃을 수 있을 때마다 마음 껏 웃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울고,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회개하고, 마음껏 기도하는 우리 로고스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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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9.07 09:22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