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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 나의 성을 무너뜨림. (여호수아 6장 1-5절) 


여호수아, 출애굽기나 모세에 비해 잘 다루지 않는 책. 인물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신앙인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주는 성경. 여호수아 


성경의 첫 다섯권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모세오경 

신앙 생활의 기초 - 출애굽해서 가나안 앞까지...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시내산까지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모압광야, 즉 가데스바네아까지

신명기는 그곳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앞두고 주신 말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미완성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때 와서 비로서 가나안 땅 정복이 시작 

 여호수아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그곳을 점령하고 그 땅을 분배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 

호세아와 어원이 같으며 예수의 이름의 같은 어원이다.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고 예수가 율법을 넘어 은혜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듯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이야기 한다. 

교리적으로는 모세의 삶이 홍해를 건너는 삶으로 대표되는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중생, 거듭남의 사건을 표현한다면 여호수아는 출애굽에서 시작한 여정을 가나안으로 완성하는 완전한 영화,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는 성화의 과정을 표현한다. 


그래서 모세오경에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모세오경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적은 아말렉, 즉 세상, 세상의 가치관, 정욕과 탐심을 가리키지만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요 그 가장 중심에 선 사건이 여리고성 정복이다. 


성경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단 한 번 나오는 일회적 사건이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반복적으로 나온다. 중생의 사건, 세례의 사건은 한 번이지만 성화의 사건, 성령 충만의 사건은 우리 삶에 있어서 거듭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다. 

홍해를 건넌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믿음의 여정의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그곳에서 멈추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불평불만으로 정말로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처럼 신앙생활한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언제나 마음은 애굽에 가 있다. 끊임없이 애굽과 비교하면서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예수 안믿으면 내가 더 맘껏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 탄식한다. 그러나 그 탄식은 자신을 속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생각이다. 


  • 그러나 요단강을 건널 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수 3:5-6]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요단강을 건널 때는 철저히 성결을 강조하고 그 성결은 법궤를 앞세워 거리를 지키고 걸어가게 하신다. 즉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지만 성화는, 성결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통하여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요단강은 성화의 강이다. 홍해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그저 바라보고 믿는 것이라면, 요단강은 법궤를 앞에 두고 건넌다.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순종함에 대해서, 가톨릭은 어떻게 보면 이 순종이 신앙의 목적이 된다. 순종에 따라 예수님을 닮는 정도가 결정된다. 이 순종을 위해 금욕하고, 훈련하고, 자선을 베풀고, 헌신한다. 


그런데 개신교, 특별히 웨슬레의 신학의 영향을 받는 감리교와 우리 성결교는 이 순종함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를 둔다. 성결교의 헌법은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고 정의한다. 아무리 할려고 해도 내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고, 멈추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은혜를 부어 주실 때가 있다. 그 은혜가 임했을 때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순종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 


처음 중생을 경험했을 때처럼 뜨거운 회개와, 뜨거운 은혜가 또 다시 임할 때가 있다. 중생은 인생에 한 번 임하는 것이지만 이 성결의 은혜는 거듭 임할 수 있다. 홍해는 한번의 사건으로 성경에 기록되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여호수아를 거쳐 엘리야, 엘리사로, 나아만 장군으로, 세례요한을 거쳐 예수님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요단을 건너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제 출애굽하여 세상의 노예,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광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하는 삶을 통해 점점 더 성화의 길로,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서 안식하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 여기에도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성령 충만을 경험한 자에게 남은 또 다른 싸움

이제 소속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면 차라리 가나안 이주라고 해야 할 텐데..우리는 가나안 땅에 이주했다거나 정착했다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정복이라고 말을 한다. 

왜 무슨 전쟁이 또 남아 있는 것일까? 

성화의 단계에서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가나안 땅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사건들이 있다. 요단강, 또 우리가 다음 시간에 나눌 여리고성, 아간의 죄...

바로 정복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애굽의, 세상의, 외적인, 사단의 세력에서 우리를 끊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라면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우리의 싸움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성, 여리고는 다름 아닌 꽉 막힌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 굴복되지 않는 내 자아- 그것을 나타내는 것 - 여리고성 


 (민 13: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그 자아는 애굽보다 강하다. 

중생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가 자기를 정복하지 못하면 광야 인생으로 끝난다. 

이 땅에서의 평안이 없다. 안식이 없고 즐거움이 없다. 신앙생활은 늘 짐이고 부담이고 염려이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 분이 날 점령하시면 참 가나안의 은혜가 임한다. 

임마누엘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아가 너무 강하다. 

그 성은 너무 견고하다. 틈이 없다. 그리고 내 속의 공간은 너무 넓다. 수많은 나의 인격들이 그 곳에 거한다. 


(수 6: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왜 문을 닫고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5장 1절의 내용이 그 근거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오면 변한다. 그가 오면 나를 지배한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성을 닫게 한 것이다. 


요나가 왜 니느웨로 가지 않는가? 그들이 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자들이 용서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떨어지면 변한다. 성경은 말씀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사례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제일 많이 듣는 소리 중의 하나는 사람은 참 안변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변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의 교회 현장은, 삶의 현장은 안변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가? 

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고 반응하는가? 

바로 말씀을 가로막는 장벽, 우리 안의 여리고성때문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내가 필요할 때에만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내 부분을 그 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한 부분만 소유코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을 내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맞이하는 것이다. 

내 전부를 그 분 앞에 내어드리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한 부분만을 고치고 싶어한다. 

성형수술 하듯이 내가 맘에 안드는 곳을 주의 은혜로 고치고 채우고 싶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지신 어떤 것, 그분의 힘, 능력, 지혜, 풍요, 평강, 하나님의 극히 일부분 중 자기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 만을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자기를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내 존재의 터전, 그 근원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항한다.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말씀과 죽어도 안변하려는 우리 인격의 격전지가 교회다. 그곳이 바로 여리고성이다! 


2-5절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린 작전 명령

6-7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내린 작전명령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 약속의 확인, 그 땅을 너에게 주었다. 내가 너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는 내 것이다. 


(수 6: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수 6: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예배의 모습이다. 

나팔- 은나팔은 백성들이 진격할 때 (민 10:6) 

         양각나팔은 주로 행사 의식때. 제사 때 

         

여리고성 점령- 내 삶을 예배하는 산 제사로 드려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케 하라 .

                        내 중심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로 채워라

                        

(수 6: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ㅡ 찬양과 말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가장 중요한 예배


챤양은 우리의 감정을 노래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다. 

출애굽의 사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를 사는 내 삶에 임하도록, 체험토록, 노래하는 것이요, 그 사건의 승리가 내 삶의 승리가 되도록 고백하는 것이다. 그 때의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임을 확신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수 6: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한꺼번에 외치는 것과 한꺼번에 조용히 하는 것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 

외치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침묵은 길다. 인내해야 한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 

왜 침묵하라 하는가? 

그들은 불평하여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배로 채워지지 않는 소리는 소음이고 불평이고 실패다. 

찬양이 우리 삶에 끝나면 남는 것이 바로 불평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소리는 절망의 탄식뿐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때 (침묵할 때) - 

여리고성 내의 사람들- 점점 더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고 무시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 진다. 이 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소리치기 시작하면 그 불안함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여리고는 또다시 닫혀지고 은혜는 사라진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다.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 - 아합의 시대 때 여리고성을 지음.      

불순종할 때마다, 우상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을 멀리 할 때 마다 우리 안에는 또 다른 여리고성이 세워진다. 

다시는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같이 여리고성을 쌓는다. 바벨탑을 쌓는다. 


예수의 십자가를 앞에두고 마지막 예루살렘을 향하실 때에 

예수님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자들, 바로 예수의 제자들 


예수를 통하여 서로 높은 곳에 서겠다고 하는 예수를 통하여 자기를 이루겠다는 제자들 

그들을 위해 예수는 그들의 발을 씻기고 그들에게 살과 피의 예식을 치루시는데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향해 

자기의 가장 귀한 그릇을 깨뜨리고 

예수의 발을 씻기고 

예수를 위해 예식을 치루는 한 여인 

참 예배자, 말씀을 사모하는 자 

다 가고 아무도 없는 무덤가를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무덤을 지키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오직 그 그릇을 깨는 자

자기의 여리고를 깨고 

주님 발 앞에 업드리어 주께 예배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온전한 영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마 26: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엣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 26:13)" 

하나님의 영화로 옷입혀진 자 


자기 그릇을 깨뜨리고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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