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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 (마 21:12-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탄 어찌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메시야이 행차답게 온 이스라엘 백성이 나와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9) 


온 성이 소동하였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을 앞둔 주일이었습니다. 

이 주간 금요일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닷새 전인 주일날의 광경, 왕의 입성과 백성들의 환호는 닷새 후의 군중들의 소란과 주님의 죽음은 묘한 대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원했던 왕과 왕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이 이토록 극명하게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환호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또 얼마나 흥분되었을까요? 

자기들이 모든 것을 헌신하며 함께 했던 나사렛 출신 예수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환해받으며 행차하는것을 뒤 따르며 제자들은 곧 자기들의 성공을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 백성들과 어울리며 잔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주님은 지체치 않고 가장 먼저 성전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최고의 관심은 타락의 온상지인 성전을 깨끗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이 한결같은 관심사는 하나님의 집 성전인 것입니다. 

이 사건을 성전 정화, 혹은 성전 척결이 사건이라 일컫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몰아내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선포하십니다.  

왜 성전에 매매하는 자들이 넘쳐나게 되었는가?

이해할 만한 몇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마다 이스라엘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 때는 반드시 예물을 들고 와야 합니다. 

자신이 환경이나 예배의 목적에 맞게 흠없는 양이나 혹은 비둘기, 혹은 곡식가루에 까지 잘 준비해서 흠없이 들고 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뚜렷한 교통수단도 없고 대부분이 걸어서 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날 때 걸어온 것처럼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오랜 기간 걸어오다 보면 아무리 잘 준비했어도 동물들은 흠이 나고 부정하게 될 여지가 많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올 때 일년에 한 차례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른바 성전세였습니다. 

이 성전세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세겔로만 내게 했습니다. 로마나 타 지방의 화폐는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안에 환전소에서 세겔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매매와 환전의 목적은 예배하는 자들을 돕는 것이 목적이었고 예배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물을 매매하고 환전하는 과정에서 부정과 부패가 끼어들었습니다. 흠없는 물건을 팔지 말아야 하는데 흠없는 물건을 받았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팔아치우기도 했습니다. 환전을 하면서 윗돈을 받았습니다. 독점적으로 판매하다 보니까 부르는 게 값이 되어버렸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대략 60만에서 100만까지 다달았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조금씩만 이득을 취해도 얼마나 큰 이득이 되겠습니까? 장사꾼들은 이들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채웠고 이들을 또한 제사장들이나 성전의 일꾼들에게 뇌물로 바쳤습니다 .누이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관리 감독해야 할 제사장들과 성직자들은 이 일들이 뻔히 잘못된 것인 줄을 알면서도, 뇌물에 눈이 멀어 장사치들의 부정과 부패를 모른 척했습니다. 그렇게 성전 안에서 모두가 자기 이익과 욕망에 혈안이 되면서 성전은 점점 더 타락해 갔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 정화 운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


16세기의 중세 교회는 세속주의, 물질주의, 권력 지상주의라는 말로 대변되었습니다 . 성직자들은 성직을 돈을 받고 매매하거나 자녀들에게 세습을 했습니다. 교황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와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교회 자체가 악취가 나는 거대한 악의 집단이 되어갔습니다. 성전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습니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천국간다는 말도 안되는 말들이 성직자들에 의해, 교회에 의해 나왔습니다. 


교회의 타락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마르틴 루터, 존 칼빈, 쯔빙글리, 존 낙스 등을 세워 교회를 개혁해 가십니다. 이때, 종교개혁자들이 내 세웠던 종교개혁의 3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가 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으로 입니다. 당시 관습으로, 관례로서 행해지던 것들을 꼼꼼히 살펴서 이것이 성경적인가를 살폈습니다. 면죄부 판매,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에게 행해졌던 기도, 교황 무오설과 같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관습들은 단호하게 비성경적이라 거부했습니다. 


둘째는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입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의 절정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죄를 면해 준다는 증서를 돈을 주고 사면, 죄도 용서 받고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죄를 지으면 더 많은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그만이었습니다. 참회할 필요도 없고 돈만 내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겠습니까?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Sola Fide, 오직 믿음 뿐임을 강조하며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를 개혁해 나갔습니다. 


셋째는 sola gratia, 오직 은혜로 입니다. 면죄부가 가능하다고 여긴 데에는 선한 행위를 통한 구원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상식에서 나왔습니다. 구제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구원의 열매이지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마지 못해 선행을 쌓아야 했습니다 .선행이 강요될 때, 선행을 통해서 악한 마음들, 쓴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만 가득한 신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제시 되었던 것이 만인 제사장설과 직업 소명설 입니다 

모든 믿는 자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다. 성직만이 의로운 직업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들간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종교개혁의 정신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또다른 굳어진 관습, 전통, 관례로서 성경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전에는 목회자와 신학자들 간은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며 때로는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가 잘 못 나가면 신학자들이 뼈있는 소리를 해가면서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학자가 한 마디 하면 신학교에 돈줄을 끊어 버립니다. 보직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잘 못 된 것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몇 몇 대형 교회의 목사의 말 한 마디는 교황의 말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 위력에 권력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교회의 건물을 믿고, 교회의 권력을 믿고, 교회의 물질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타락했던 중세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현대 교회를 대형 버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버스형’이라고 하는 것은 목사 한 사람이 운전하고 성도들은 버스에 탄 사람들처럼 밖을 내다보며 세상을 즐기거나, 세상 모르고 졸고 있는 것과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물론 그 버스는 목표를 향해 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버스에 탄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버스 운전사 같은 목사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되면 그 버스에 탄 성도들은 큰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교회는 담임목사의 능력에 따라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담임목사의 역량에 목회의 전부가 달려 있다. 담임 목사의 능력이 크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교회는 침체될 것이다.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든 구조다.


이런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냐? 목회자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권위를 심어줍니다. 목회자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하고 열정이 넘칠 때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흥하지만 일단 지지고 넘어지면 다른 대안을 찾기가 힘듭니다. 계속 잘못했는데도 주었던 권위를 회수하기 힘들거나 아니면 아얘 권위가 사라져 더 이상 어떤 말도 통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는 목사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전통에 사로잡혀 질식할 것 같은 교회를 운동경기에 비유하면 선수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만 교회라는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성도들은 관중이 되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보는 중에 목회자만 북 치고 장구치고 재주를 넘는 경기를 합니다. 관중들은 다만 선수가 잘하면 박수치고 못하면 얼굴을 찌푸리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교회, 성령님이 이끄시는 교회는 선수가 목회자가 아닌 온 성도들입니다. 집사, 권사, 장로들이 선수들이며 목회자는 이들을 돕고 훈련시키는 코치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경기장이 됩니다. 관객은 성도가 아닌 교회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입니다. 성도들이 목사가 목회하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성도들이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교회 입니다. 


물론 목사는 영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영권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대언하는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 받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 세워줄 수도 없고 억지로 세워서도 안됩니다. 난 로고스 교회의 담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점을 둘 것이고, 받은 소명대로 여러분들을 훈련시킬 것이고, 그리고 사역을 맡길 것이고 동역할 것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권위를 하나님께 구할 것이고 그 부여 받은 권위로서 사역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 외에 다른 관례적인, 관습적인 권위는 피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받은 권위 때문에 내가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장사가 뭐입니까? 기도해서 이윤 남기고, 예배 들어서 적금들고.... 예배와 성공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예배는 온전히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찬양하고 우리의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

그리고 전쟁터인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께 이야기한다는 것이고,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이 되면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이 염려, 우리의 연약함을 고하되 그 분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실패하고 지는 것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사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마 21:14)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맹인들과 저는 자들이 성전으로 나와 예수께 고침을 받습니다. 


(레 21:18)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당시의 성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흠이 있는 자는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예를 들고 있는 부류가 누구입니까?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입니다. 즉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가장 부정한 사람들이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부정한 자들이 성전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무 말없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그들을 고치자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하십니까? 내가 병든 자를 고치러 왔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러 왔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장사치들이 나가자 어떤 사람들이 몰려듭니까? 비로서 구원받을 자,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이고 예배이지 않겠습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는 곳이 교회 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련되고 산뜻해졌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지식은 많아지고 성경공부도 프로그램도 다양한데 더이상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니다. 교회가 치유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현장인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져주신다면 당연히  고침받고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외모로 차별하고 성적으로 차별하고 물질로 차별하고 출신이 어딘가에 따라 차별하지만, 우리 교회는 누구든 올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원하시는 차별 없는 교회, 모든 자가 나와서 치료받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 모두가 합심하여 선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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