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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요나단 (삼상 18장 1-5절) 


공원이나 사람들 많은 장소를 가다보면 집에나 교회에서는 엄마 품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고 낯을 참 많이 가리던 한나가 막 내려 달라고 보채면서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손을 흔들기도 하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서 "어무니"하면서 두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아이가 다가와 손을 흔들면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를 반겨주고 귀여워해줍니다. 

그래서 한나가 밖에 나가면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애교를 떨곤 하는데 한번은 덩치가 좀 큰 흑인 한 명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한나가 그 옆에 가서 손을 흔들고 막 애교를 떠는데 애써 쳐다보지도 않다가 자꾸 자기 앞에서 자꾸 왔다갔다 하면서 자기에게 접근하니까 언짢은 표정을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획 하니 나가 버립니다. 

저도 갑작스런 일에 놀라서 아이를 쳐다보니까 한나 얼굴이 그야말로 멍한 표정입니다. 자기를 귀여워 해줄 줄 알았는데 휙 나가 버리니까 놀란건지 실망한건지 말을 못해서 표현은 못하는데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귀여운 짓을 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고통을 안겨 줍니다. 거기다가 내가 정말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고 공격을 당할 때에 그러한 경험은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혼내기만 할 때, 선생님이 학생을 알아주지 않고 무시하거나 책망할 때,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을 무시하고 전혀 인정하지 않을 때...우리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외면의 경험, 무시의 경험,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적으로 몰려 공격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경험은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속성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도 이 사랑에 기초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또 회복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은 이 사랑과 멀어진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때론  조롱과 비웃음과 중상모략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삶에서 이러한 적대감을 맛보는 경험은 그의 영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때로 무시를 당했으며, 아들로부터도, 친구로부터도,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그러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상처와 곤경의 상황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강력하게 다윗을 미워했던 인물은 바로 사울입니다. 


목동이던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여 악신이 들리자 사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노래를 불러주는 자로 사울의 곁에서 사랑을 받습니다. 

골리앗이라는 큰 장벽이 나타나 사울과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처하자 다윗은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무찔러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다윗은 사울을 위해서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1. 사울 

사무엘상 16장 21절에 보면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드는 자로 삼고.."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영적으로 힘들 때에 찬양을 통해 위로해주고 치유케 해준 다윗을 좋아했습니다.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자 사울은 그를 집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아닌 아얘 궁전에서 자기 옆에서 머무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18장 6절부터 블레셋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며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9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목하였다는 표현은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표현입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후에 선악과를 바라보는 시선이 욕망과 죄악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다윗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 달라진 것입니다. 


사무엘상 18장부터 20장까지의 사건을 쭉 추적해보면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무려 6번씩이나 행하고 있습니다. 

찻번째는 다윗이 사울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창을 다윗을 향해 던졌습니다. 다윗이 처음 사울의 곁에 올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다윗을 사랑했던 이유는 바로 이 악기 연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질투심이 오니까 이제 그 악기연주가 사랑의 이유가 아니라 살인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지는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쟁에서 수훈을 세우고 오면 자신의 딸 메랍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그를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삼상 18:17b) ......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그런데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서둘러 딸 매랍을 므흘랏 사람 아드라엘에게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 다음 자신의 딸 미가가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이용하여 다시 한 번 다윗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블레셋 사람 표피 100개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다윗이 승리하여 블레셋 사람 표피 200개를 가져오자 이번에는 할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합니다. 

또 한 번은 암살단을 보내어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되니까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서 다윗을 추적하려 죽이려 했습니다. 


왜 사울은 이토록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사울은 다윗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이 된 이후 사울에게 하나님은 단지 자신을 위해 필요한 도구였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대했고 필요없을 때는 자신의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다윗을 사랑한 이유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하기 때문이었지 다윗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하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면 집요하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 외의 모든 것은 자신에게 필요하냐 안하냐가 기준이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자 요나단 마저도 죽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우리를 흩어보면서 어떤 이용가치가 있을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지, 우리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숫자로서, 물질로서, 물건으로서 판단하는 사람들 앞에 우리는 늘 조롱당하고, 외면당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시편 7편은 이러한 사울의 부당한 핍박 앞에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하는 시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1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기도하고 하나님이 재판하시고 판결하시기를 거듭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10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1절) 

하면서 억울하고 위급한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랍니다. 


2. 요나단 

만약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요나단이 없었다면 다윗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사울에 대한 원망과 원한, 복수의 감정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다윗은 사울의 광기어린 살의 가운데서, 바로 그 중심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으로부터 가장 깊은 사랑을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영적인 우정은 기도나 말씀등의 경건생활과 다름없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예배와 경건을 돕기 위한 처소도 되지만 가장 중요한 교회의 목적은 바로 영적인 우정을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사울이 철저히 자기의 필요에 따라 다윗을 옆에 두었을 때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18장 1절)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다윗과 영이 하나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서만 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영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이 같은 것보다 더 큰 소통의 코드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영이 다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믿고 예배드리는 데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를 위하고 물질을 원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 보고 자신에게 좀 맞추어 달라고 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사울왕도 요나단도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신앙은 지금 다윗과 요나단과는 다릅니다. 다른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한 영이고 자기 자리 만을 위하고 자기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는 시기하고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는 자입니다.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상 18:4)


이것은 단순히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로서의 겉옷입니다. 자신이 입고 있었던 품위와 권위의 옷을 다윗에게 벗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군복인 갑옷도 주었습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칼과 활, 그리고 가슴에 매는 띠까지 다윗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윗 네가 나의 모든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라는 왕의 자리를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 후부터 요나단은 철저히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고 또한 사랑합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다윗을 친구로 삼았기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마다 요나단이 그 앞에서 막았습니다. 너는 어찌해서 내 편이 아니고 다윗 편이냐고 아버지가 통탄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단절되게 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을보았기 때문입니다. 습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 이스라엘을 이끌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의 권력까지도 다윗에게 양보했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의 모습 속에서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친구 된 모습을 예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친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당시 요나단과 다윗이 친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나단은 왕자, 다윗은 무명의 목동 ->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교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우정의 시작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교만과 존경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항상 나를 가장 높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를 사귈 수 없다. 객관적인 나의 기준보다 휠씬 높은 사람을 상대 할 때만 그를 존경하며 친해지고 싶은데 그 때는 난 이미 그 사람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 내가 친구가 되긴 더 힘들다. 요나단은 다윗과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의 왕자 된 신분을 낮추었고 동시에 다윗을 왕이 될 사람이라고 높였다. 


(요 15: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이 겸손 - 죄인인 우리를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고 우리를 당신에게까지 높여서 친구가 되게 하심... 우정의 마음..


이것이 바로 친구가 되는 마음이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할 때에 우리는 결코 진실한 친구,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우리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일 때에 우리에게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성경 안에서 영혼의 귀함을 깨달은 자,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지 않고 자신의 인기에 흔들렸다면.

갈렙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바나바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더라면

요한이 베드로의 리더십에 끝까지 저항했더라면...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세례요한-> 예수님을 남기고 간 친구-> 예수 그리스도 – 우리를 친구로 남기고 간 하나님.

  •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 우리 또한 나 보다 더 큰 일을 할 친구하나 두고 싶지 않은가? 혹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사랑해줄 친구하나 있고 싶지 않은가? 그럼 내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면 된다. 내가 나보다 더 나은, 더 큰일을 할 친구를 위해 내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 그 친구, 아니면 또 다른 친구가 날 그렇게 사랑해 줄 것이다. 


세상은 믿는 자들을 적대시한다. 어쩔 땐 교회에서조차 우리는 외면당하고 비난당하고 무시당할때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우리는 다윗이 시편 7편에서 호소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런 세상에 맞선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이시고 재판관이시다. 


물론 교회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거룩하게 이끌어주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이 성화되도록 인도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는 재판정이 아니다. 세상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을 위해 편들어 주고 십자가를 지어주는 곳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서로 편들어 주라는 것이다. 판단하지 말고 자기 몸 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요나단 같은 친구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런데 자기가 요나단 같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높이는 친구는 되기 어려워한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이 황금률이라 불리는 성경의 해답이다. 

좋은 친구를 가지고 싶은가? 그러면 그러한 친구가 되라. 

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해줄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영이 되는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고 기도해주는.....


그런 장소가 교회요, 그런 친구가 바로 크리스찬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