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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6장 1-9절 우연히 당한 것인 줄 (그릇된 회개)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전리품으로 가져온 언약궤로 말미암아 임한 재앙으로 말미암아 결국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한 블레셋의 상황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려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열가지 재앙 중에서도 끊질기게 약속을 어기고 조금만 숨쉴 여유만 되어도 또다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바로의 모습과 함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불신하는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통하여 이 말씀을 알게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상숭배나 미신은 나무나 돌 같은 것을 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름아닌 이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믿고 자기 식대로 열심을 내는 신앙생활이 다름 아닌 이런 미신적인, 우상숭배와 같은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잘못된 회개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 신앙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절)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달이라.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바로 다음 날 다곤 신전에서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세군데의 지방을 옮겨다녔지만 옮겨다닐 때마다 똑같은 재앙이 임했습니다. 

5장 마지막 절에는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6장 사이는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재앙이 임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은 우연의 일치다 하면서 하나님의 법궤 이스라엘로 보내지 않고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고집이 있습니다. 

아무리 눈 앞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이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음을 깨닫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그것을 깨닫는데 자꾸만 머리를 굴리며 이럴수도 있지 그게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이런 생각으로 재앙을 몸으로 맞이합니다.  

바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이방 사람들 뿐만 아닙니다. 

엘리도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끊임없이 경고하시지만, 될대로 되라지, 설마 하면서 사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까? 


성령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데 죄는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머리로는 큰일 났다 생각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을 주어 환날 날에 더욱 깊숙한 늪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불순종한 요나가 선장과 선원들은 태풍으로 난리가 났는데 혼자 골방에서 잠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아둔하면 이런 상태에 빠집니다. 


(2절)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7개월간을 끌고 끌다가 견디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드디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돌려 보내려면 누구와 상의를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궤를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불러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블레셋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그 대책을 논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문제는 누구와 상의 해야 합니까? 신앙의 문제는 기도하면서 성령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에 자신이 없다면 교회 안에서 교역자들이나 재직들과 상의해야 합니다. 

학교 문제는 학교 선생이랑 상의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옳은 것이요, 집 사려면 복덕방 가서 상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자기들이랑 비슷한 사람들이랑 하든가, 아니면 아얘 안다니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면서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서 지키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답을 구하려면 해답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가야지 자기 답이 맞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봐야 언제나 똑같은 실패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사장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은 있는지 블레셋 제사장들이 하는 말이 "그냥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병도 낫고 그 이유도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속건제는 레위기 5장에 잘 설명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물이나 다른 사람의 기물에 해를 입혔을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렇니까 법궤에 해를 입혔다고 여겨 지금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속건제에 드릴 예물은 율법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속건제의 희생제물은 원칙적으로 흠없는 수양을 드려야 했습니다 (레5:6, 16, 18). 

그러나 범과자의 형편에 따라 어린 양 대신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의 새끼 둘을 제물로 드리기도 했고 또 비둘기조차 드릴 형편이 안 될 경우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속건제에 대한 하나님의 율례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제사장들이 속건제물로 드리도록 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4절에 보니까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드려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금으로 만들어 드리게 합니다. 

그러니 이 제사의 모양이 얼마나 우스워 집니까? 

자기들이 당한 재앙의 모양인 독종과 그 독종을 가져다 주는 쥐를 금으로 만들어 재물로 바치니 이 제사는 그야말로 썩은 예물이 될 것입니다. 


그들만 그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역시 그런 말도 안되는 예물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흠없는 양, 비둘기, 혹은 고운 가루...

이것은 순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에 대해 분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 1:7) 너희가 더루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이유도 무엇입니까?

(삼상 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법궤를 더럽혔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제물을 가지고 금 쥐, 금 독종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니 이 얼마나 황당한 제사입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 

(삼상 6: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 1:8-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그러면서 자기들 스스로 바로와 비교하면서 바로처럼 완악하게 행동하지 말고 후하게 드리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7절부터 보면 더 가관이 아닙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삼상 6: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멍에를 메어보지도 아니한 소, 그리고 송아지들을 젖먹이던 소 둘을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릴 제물을 담아 끌게 하고 사람은 지켜 보다가 벧세메스까지 똑바로 가면 이 재앙은 과연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요 집으로 돌아오거나 다른 데로 가면 이 모든 재앙은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흠없는 소도 아니고 젖먹이던 암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송아지는 집으로 가게끔 떼어 놓고, 또 멍에도 한 번도 메어 보지 않은 소를 사람이 이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길을 가게 하도록 하는 것. 


이들이 정말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다곤 신은 그렇게 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 영적인 전쟁을 치룰 적에 그 바알과 앗세라는 아무리 소리질르고 애써 보았자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는 거짓 신임이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들은 재앙이 무서워 하나님의 궤를 돌려 보낸다고 하지만 속셈은 무엇입니까? 

아니야...그럴리가 없어... 하나님이 있긴 어디있냐? 그렇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서 속건제는 왜 보내고 바로와 비교는 왜 합니까? 

이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바로 보다 훨씬 낫다고 여기는 것 아닙니까? 


결과가 어떻게 납니까?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곁에서 몰래 따라가면서 그 소들이 좌우로 치우지지 않고 새끼들을 찾지도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요? 

벧세메스는 아모리인의 성지였지만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하였을 때에 단 지파에게 주어졌지만(여호수아 19장)  단 지파가 블레셋 사람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피했을 때에 유다지파가 이 땅을 점령하여 결국 레위 사람의 영지가 됩니다. (여호수아 21장) 

결국 레위인들이 이것을 보며 기뻐하며 소가 끌고온 수레를 장작으로 삼아 소를 번제물로 불태워 드립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제물들을 받자 블레셋 사람들은 손씻고 자기 지방으로 돌아갑니다. 


자, 이것은 정말 놀라운 광경 아닙니까? 

멍에를 한 번도 메지 않던 암소 두마리가 그것도 자기 새끼도 놓아두고 무거운 법궤와 제물을 들고 흐트러짐 없이 벧세마스로 온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능력에 찬양을 드리고 경배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던 다곤 신상은 그 앞에서 무너지고, 법궤로 말미암아 큰 재앙이 일어나고, 이제 자기들의 속건제를, 잘못된 제물이지만 이 곳까지 완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 

그들이 정말 신을 섬기는 사람들 이라면 참 신, 참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경배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16절에 보면 그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다시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그들은 또 넘어진 다곤을 일으켜 세워서 그것을 섬기는 삶을 살 것입니다. 


늘 하던 대로 똑같이 그렇게 살다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전 처럼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그저 어쩌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일로 여기면서 잊어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보고, 큰 이적을 보아도 죄인은 안믿을려고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표적 표적 달려들면서 보여달라고 하지만 표적을 바라면서 예수를 따른 사람들은 표적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사라졌습니다. 



교회 지하 노래방 화재 사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VS

라합, 마리아 


아직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안믿을려고 작정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말 잘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19-21절 

벧세메스 사람들의 죽음 

왜 죽었는가?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보다가... 

하나님의 궤를 만지거나 들여다 보는 것은 금지.... (민 4:5-6)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


왜 들여다 보았는가? 

금지된 영역에 대한 호기심. 경외감을 잃어버리는 것. 

(삼상 6: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스스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이 - 침묵하던 하나님이 블레셋에게 먼저, 그리고 이제 레위인들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하셨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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