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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9-30  (세 명의 동역자) 


본문엔 세 명의 주요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직접 거명되진 않지만 이 편지를 받는 대상, 즉 빌립보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주 안의 동역자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어 보려 합니다. 


1. 바울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육신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편한 삶이었지만 그의 관심을 그 자신을 돌보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 있습니다. 힘들면 자신을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먼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생명체가 가진 본능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자신이 어려운 환경이어도 자녀가 위험에 처해 있으면 자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차에 칠 위험이 있다하면 자기가 죽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차에 뛰어드는 것...오직 부모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그런 본성 속에서도 오직 부모에게 만큼은 자기를 버릴 수 있는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해 이런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지금 감옥에 와서 자기를 보살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식사와 마실 물과 옷가지를 챙겨주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교회를 위해 중보하고 성도들의 사정을 알려주는 연락책이었습니다. 바울에게 그들은 도우미요, 동역자요, 세상의 보여주는 창문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다시 빌립보 교회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없으면 바울의 삶은 얼마나 힘들고 불편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빌립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까요? 바로 교회에 대한 부모의 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빌립보서 1장 8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삶에 지치고 곤하여 끊임없이 모세에게 원망하자 탄원하는 모세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 11:4-민 11:6]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그들의 원망은 탐욕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탐욕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느냐? 그들과 함께 거하는 다른 인종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다른 인종들과 어울리며 함께 있다보니 그들이 가진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게 하나님과 교제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들어와 유혹하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마음이 들어온 것처럼 다른 인종들을 통해서 탐욕스런 마음이 들어옵니다. 

한 번 탐욕스런 마음이 들어오니까 그들에게 어떤 생각이 들어옵니까?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먹었다." 


왜곡된 생각, 변질된 생각, 진리가 아닌, 참이 아닌 거짓된 생각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예입니다. 아무리 일해도 삯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고용된 일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주인이 주는 대로 먹습니다. 안주면 못먹습니다. 노예로서 살다가 노예로서 죽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 출애굽 사건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이 들어오니 자기 생각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거짓된 생각이 진리를 가립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내가 이 교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편한고 행복할 수 있을지 아느냐?   세상에서 얼마나 잘 나갔을 줄 아느냐?....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가 너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어오니 따라오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함께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 감사가 없고 만족이 없고 그 은혜 마저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니 에덴 동산에서도 행복이 사라진 것처럼 탐욕이 들어오니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어도 만족이 없고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없는 것을 바라보며 불평이 시작됩니다. 


[민 11:10-민 11:15]

(민 11: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 11: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민 11: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 11: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민 11: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민 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백성이 지금 어디에서 울고 있습니까?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자기 집안에서 불평하며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에서 다윗은 똑같이 웁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가 목동이건, 장수이건, 왕이건 얼마나 엄살을 떨며 우는지 모릅니다. 시편을 읽으면 어쩔 땐 다윗이 참 소심하고, 나약한 자처럼 여겨질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자기 장막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울고 시온에서 울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앞에서 우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을 베푸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성막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장막에 거했습니다.  

그곳에서 울었습니다. 자기 장막에서 우는 결과는 불평입니다. 원망입니다. 


똑같은 울음이지만 어디서 우느냐가 우리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런 백성의 울음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아룁니다. 

"어찌하여 주의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례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여기에서 모세의 영적 상태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리더자였지만 그의 정체성은 언제나 주의 종입니다. 심부름꾼입니다. 

물론 심부름꾼, 종의 영성도 중요하지만 그런데 종은 결코 부모의 마음을 갖질 못합니다. 너무 큰 짐이 지워지면 똑같이 불평이 일어납니다. 

(민 11: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 짐은 부모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으로 넘어가면 가나안땅을 정탐한 이후에 10명의 정탐꾼들이 믿음이 없는 보고를 하자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하면서 모세에게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11절에 보면 

[민 14:11-민 1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만약 종의 심정을 가지고 백성을 대했던 모세라면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이젠 원망하는, 노예 근성에 찌들어 있는 백성대신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모세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민 14:18-민 14:19]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뭐라하는 것입니까? 

부모님 같은 넓은 아량으로 자비로 그들을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마음입니까? 

종의 마음이 아니라, 심부름꾼의 마음이 아닌 부모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장인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듯이 부모에게는 자식에게 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모자란 자녀들도 결국은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교회 안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부모의 마음으로 사랑합니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계명을 남기실 때에 내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성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죄많은, 불평하는, 원망하는...그런 성도를 사랑하는 것...

오직 부모의 마음이 있을 때에 견딜 수 있는 짐입니다. 


2. 디모데 

디모데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곳이 다름아닌 빌립보였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딤후4:9 이하의 편지를 읽으면 그 때 사도 바울이 디모데의 도움을 얼마나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두 번씩이나 부탁을 했습니다. 자기를 돕는 동역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다른 동역자들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데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누가만 로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에게 해를 많이 보였고 자기 말을 심히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있는 겉옷 외투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또 몇 권의 책도 두고 왔는데 그 책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다 떠나가도 끝까지 함꼐 있을 자식보다 귀한 동역자였습니다. 

세상의 자식도 부모가 힘들 적에 그것을 다 들어주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만큼은 자기가 고통스러운 것 다 이야기 하고 디모데는 또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무엇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자기와 똑같은 마음으로 예수의 심장으로 자기 말을 전하고 성도들의 일을 전해 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 다른 동역자: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1절) 

     디모데의 연단: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2절) 

     -> 오늘 본문에 보면 디모데는 바울과 "뜻이 통하는 동역 자"이며, "오직 주의 일을 구하는 자"였으며,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동역 자"였습니다. 

     

->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살피는 바울. 그 바울에게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하듯 아버지의 심정, 바울의 심정으로 진실하게 성도들의 사정을 살피는 디모데... 


이 아들의 마음을 가진 자가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행복합니다. 디모데와 같은 영적인 아들이 있다면 그 성도는 행복합니다. 그 목사는 백만 성도가 함께 하는 것보다 든든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영이 통하고, 믿을 만하며, 무엇이든 맡길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질 때 그리스도인은 외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 9:36-마 9:37]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교회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일꾼이 종이 아니라 자식과도 같은 일꾼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자식의 마음으로,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고생하며, 함께 연단 받으며, 함께 승리하는 그런 일꾼이 함께 할 때에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외롭지 않고 행복한 것입니다. 


3. 에바브로디도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돌보는 또 다른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바브로디도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요, 나와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 형제란 말은 기독교에서 생긴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형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이 같기 때문에 가문이 같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형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고 질문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이 아나니아를 찾아왔을 때에 아나니아는 사울을 가리켜 "형제 사울아"(행9:17)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에서 형제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기도를 함께 나누고 교제를 함께 나누고 봉사를 함께 나누고 물건을 함께 나누고 생명을 함께 나누는 사입니다. 
  •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였습니다. 교회의 대표로 뽑혀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하여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로마까지 달려왔습니다. 3천 2백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걸어서, 낙타를 타고, 심신이 지치도록 오직 바울의 쓸 것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에바브로디도는 죽을 각오로 바울을 보살폈습니다. 
  •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빌4:18).  편지와 선물을 받은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인생은 편지요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바울의 쓸 것을 도왔습니다.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도와드렸습니다. 마치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가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와드렸던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와드렸습니다. 바울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기쁨을 누렸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담임이었지만 동시에 충실한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는 주인 노릇 하려는 사람보다는 섬기는 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노예의 마음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 그러다가 그만 병이 났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먼 여정이었기에 탈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바울이 갇혀있는 감옥 근처에 머물면서 바울에게 식사와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었는데 죽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 그런데 에바브로디도의 관심은 자신의 지도자 바울이었습니다. 자기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가 근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자신 때문에 "오히려 교회를 근심하게 했다"고 마음 아파하고 심히 근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오직 목회자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사는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건진 그에게 다시 빌립보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겨우 몸을 회복하고 일어섰는데....다시 머나먼 여행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강점은 비록 피곤하고 지쳤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예"하고 다시 힘을 내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바울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였고 예수의 친구였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는데 그는 정말로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참 바울의 친구, 복음의 친구였습니다. 


  • (빌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들 영접하고 (그를 맞이하라. 닮아라.)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이런 자들이 비추이게 하라.) 

교회는 이런 자들을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자기 일을 추구하며 생색내는 자들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도를 사랑하고, 아들의 마음으로 늘 함께 하며 기쁨과 고난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참된 우정의 공동체....그런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요, 행복한 교회입니다. 


각기 자기 장막에 거하면서 자기 일만 추구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 로고스 교회가 그런 부모의 마음을 가진 공동체, 아들의 마음을 가진 공동체, 친구의 마음을 가진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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