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2019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빌립보서 4장 8-13절  자족하는 삶. 


  • 11절)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아"는 당시 그리스 철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였습니다. 자족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또한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평온한 지복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자족입니다. 

당시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두 학파는 이 자족을 위한 두 가지 다른 길을 제시 했습니다. 

하나는 금욕을 강조한 스토아 학파이고 또 하나는 쾌락을 강조한 에피쿠로스 학파였습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하면 자족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상태라고 파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이 욕망을 줄여나가는 것이 행복하기 위한 길이고, 반대로 에피쿠로스 학파는 욕망을 채워나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을 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학파 모두 행복의 기준을 자기 욕망을 채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가장 부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흔히들 남의 것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팔자에 맞게 살라는 말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러우면 지는 거야'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도서라든지, 다른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람은 영적인 존재다.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절대로 물질이나 제한적인 것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한 순간 만족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욕망은 절대로 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깊고, 넓고, 높은 것이 사람의 욕망입니다. 

그럼 반대로 우리가 금욕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줄일 수가 있는 존재일까? 

물론 훈련을 통해서 욕심을 어느정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마음도 이 탐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말고 해탈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독교의 많은 교리도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를 비워라"는 말을 통해 금욕된 삶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여러분, 얼마나 비우고,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십니까? 


  •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아마도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상통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천’뿐 아니라 ‘풍부에도 처할 줄 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배부르거나 배고플 때에도’,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비천하거나 배고프거나 궁핍할 때 뿐 아니라 그 반대로 풍부하고 배부를 때에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는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적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합니다.”(빌4:12, 메시지)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적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앞의 말은 납득이 가는데 뒤에 말은 말장난 같게 느껴집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돼 적은 것을 가진 것처럼 행복하냐?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그것을 지키느라, 잃지 않으랴 얼마나 걱정합니까? 

한 번 더 생각하면 이 말의 의미도 수긍을 할 수 있습니다, .


신앙생활에서도 그 말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울 때에 신앙생활을 참 잘합니다. 열심히 기도생활하고 더욱 힘써서 교회에 나오고 겸손하게 믿음을 세워나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풍부해지고 난 다음에 그 태도가 바뀌는 것을 봅니다. 기도도 잘 안하고, 교회도 자꾸 빠지고, 옛날과는 다르게 아주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은 아는데 풍부에 처할 줄은 모르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풍부할 때에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궁핍하게 된 후에는 믿음을 버리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은 결국 환경에 좌지우지 되는 신앙입니다. 

환경에 따라 믿음이 좋아지기도 하고, 또한 나빠지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용어로, 은혜 받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 신앙이지만 사실 우리 대부분이 이러한 환경에 영향을 받는 믿음 생활을 합니다.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에도, 기도할 때에도 우리는 환경에 영향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거꾸로 그만큼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감히 감옥 속에서도 밖의 있는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감옥 안에서 기뻐하며, 폭풍 속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볼 수 있을까? 


  •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이것이 주 안에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주가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가 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앞 뒤 맥락 없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일들을 행한 성도들의 간증으로 널리 사용된 구절입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는 나폴레옹의 기독교 버전인 듯 사용이 되어왔습니다.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는 욕망을 종종 믿음이란 거룩한 단어로 포장하여 주문을 외우듯이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결코, 예수님과 함께하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 어떠한 환경에서든 내가 수용하고 견디고, 그리고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중심이 '나 자신' '나 자신의 욕망'에 맞추어서 행복을 추구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중심이 '주님', '주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합니다.  

삶의 목적은 내 욕망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나를 이땅에 보내신 목적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려 애쓰는 것입니다. 

내 만족이 아니라 그 분의 기쁨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을 이루는 데 있어 또한 홀로 이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함께 함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 목적을 주님의 도움으로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 우리의 인생길을 가는 동안 걸어가는 모든 환경 속에서 주님의 일을 이루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염려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염려가 생기면 자족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염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한숨 쉬고, 불안해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염려거리가 생기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함께 해 주시고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그런 일이 가능해집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아서’ 그 모든 경우에도 언제나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없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바동거리지 않고 언제나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자족’이라는 말을 ‘부족함이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자족을 맛보던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최고를 맛본 사람입니다.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있었고,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최고 수장이 되었고,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자기가 맛보았던 최고의 것들을 나열하고 난 후에, ‘그러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기에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의 버전으로 바꾸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노라’가 되는 것이지요. <-> 솔로몬: 자기가 누렸던 부귀영화, 쾌락, 지식, 다 열거한 후에 결론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가장 목마른 여인: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 -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도 여전히 목이 말라 아무도 모르게 햇볓이 뜨거운 대낮에 물을 뜨러 나온 여인. ->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실 때에만 내게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그 때에는 궁핍할 때에도 부족함이 없고, 배부를 때에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결은 바울이나 다윗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이 우리들 자신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누리고 있던 자족함의 비결을 우리들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그 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어떻게 해서든 그 분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왜 여전히 목마르고 부족하고, 넘어집니까? 

주 안에 거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욕망'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빌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1. 참된 것 (What is true<->false): 무엇에든지 참된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를 자꾸 생각하면 그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무엇이든지 참된 것을 늘 생각하면 그 사람은 참된 사람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참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갑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세상살다보면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다. 하나님도 이런 것 쯤은 다 이해하실 것이다. 죄짓고 회개하면 된다....거짓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1. 경건한 것 (what is noble): 이 ‘경건’은 ‘존경할 가치가 있는 고상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박하고 값싼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경솔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항상 천박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부러 상처내는 말을 하고 자신을 밉보이게 하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이왕이면 고상하게 경건하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평소에 그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으면, 그런 생각들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경건한 생각들을 자꾸 채워가야 합니다. 외식은 속은 안그런데 겉으로만 그런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경건함이라 표현된 고상함은 정말 귀한 자존감 속에서 겉과 속이 천박하지 않은 좋고 선한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1. 옳으며 (right,<->wrong):  세 번째로는 ‘옳은 것’(whatever is right)입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편한지’, 또는 ‘무엇이 지름길인지’를 앞세우다 보면 어느 틈엔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옳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지만 가면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들은 수단과 방법마저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고지식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항상 옳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정결한 것’(whatever is pure)입니다. 순결하고 더럽히지 않은 것입니다. 팔복의 말씀 중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청결이 아니라 마음의 청결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더러운 생각들, 천하고 낡아빠진 생각들로 충만해 있습니다. 요즘 TV나 매스 미디어를 보면 폭력이나 동성애, 마약중독이 미화되고 권장되는 것을 봅니다. 결혼전에 동거하고, 애가니면 낙태하고 하는 것들을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 외에 연애하고하는 일들...정결하지 못한 일들입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들보다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이 화면을 채웁니다. 그 가운데서 청결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과 생각에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으로 채워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문화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사랑할 만한 것’(whatever is lovely)입니다. 어떤 번역은 ‘매력적인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끄는 것’,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떤 나쁜 점들만, 잘못하는 일들만 캐내기도 합니다. 꼭 미운 것들만 골라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미운 것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할 만한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할 만한 것’에 집중하면 세상은 온통 ‘사랑할 만한 것’이 됩니다. -> 1-5번까지의 것,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한 것-> 생각을 바꾸라. 생각을 채워라. 


  1. 칭찬받을 만한 것-> 내가 먼저 칭찬 받을 일을 생각하며 행하고 남을 볼 때도 흠을 찾지 말고 칭찬거리들을 생각하라. 보아라. 어떤 사람에게도 반드시 칭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잘하는 구석이 한 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을 칭찬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 많은 부모님들이 실수를 범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을 칭찬하는데 참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더 잘하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자꾸 못한다고 야단만 치면 결코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못하는 것에 집중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잘하는 일을 자꾸 칭찬해 주면 그 아이에게 자신감이 생겨나고 나중에는 정말 잘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뿐 아니라 칭찬을 하는 부모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들에 칭찬할 만한 것으로 채워나가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일곱 번째는 ‘덕’(excellent)입니다. 최고가 되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이 덕은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현대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자기에게 이로운 일만 추구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현대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인들 때문에 결국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덕을 세워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덕’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가치들로 우리들의 생각을 채워나가라는 말씀입니다.
  • 사도바울은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합니다(3:8). 우리삶이 그리스도의 체질로 변화되기 위해서 절대적인 복음진리로 삶의 무게중심을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와 동행하는 것이고 주가 기뻐하시는 일이고 주 안에 머물기 위한 우리의 배움입니다. 

이것들을 우리 안에 채울 때에 주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루고, 상황에 얽매이지 않은 참 자족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1.30 16:42

    비밀댓글입니다

  2.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10 12:54 신고

    logosgarden.tistory.com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