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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7-21절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우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뿐 아니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추천하니 그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교만한 자세가 아닙니다. 당시는 이단이 성행하였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유혹도 아주 강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빌립보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나처럼 예수의 복음을 귀하게 여기며 확신 있게 살아가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신앙적인 초보단계를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신자가 되고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이 강해도 신앙을 굳게 지키고 인간적인 조건을 자랑하는 당시 풍조에 휘말리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당시 바울 같은 신앙의 본이 있었다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본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본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위인들이 본 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위인들을 본을 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받는다”라는 말을 “본뜬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무명옷을 해 입고 살 때 무명천을 놓고 그 위에 본을 놓고 잘라내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 본을 오늘은 모델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본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본을 멘토라고도 합니다. 본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현재의 본: 연예인, 만화 속 캐릭터... 더 이상 위인전을 보지 않는다. 초등학생때부터 공부에 바쁘다. 과학 서적, 영어 서적, 동화나 에니메이션은 많은데 보니까... 위인전이 없다. 본받을 모델이 없이 산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카톨릭: 성자를 꾸준히 만들어 그들의 삶을 나타낸다. 그들에게 기도하게도 한다. 기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런데 그들의 삶을 나타내게 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다. 모델이 된다. 교회가 전적으로 그 일을 감당한다.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그리고 알리고...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알리려고 하니 너무 겸손한 사람은 가리고 교만한 사람은 과장한다. ....


개신교는 우리가 본 받을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를 닮았느냐하면 오히려 거리만 더 멀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 바울의 신앙의 본 

또 우리 주위에 신앙적인 모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꾸만 흔들리는 시대에 일반 신앙인들이 그 모습을 본떠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대해서 확신과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본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자신감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의 멋이 이 자신감입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자신감 있는 신앙인입니까. 그의 신앙고백의 글들을 보면 하나같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일을 마치고 믿음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이것이 자신감이고 확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살아가는 나를 본받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부목사들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라고 했습니다.ㅣ


어떤 주당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나를 언제나 감동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때로 나로 하여금 용기 있게도 하시고 나로 유쾌하게도 하십니다. 나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여기 주는 술주자(酒)입니다. 주당도 술에게 이런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인이 그렇게 자신감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앙인 여러분, 우리 신앙인의 최대의 자본은 자신감이고 확신입니다. 신앙인이 가장 멋이 있을 때가 언제냐 하면 이렇게 확신 있는 자신의 신앙을 만 천하에 들어내 놓을 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만 천하에 그의 신앙을 아주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복음에 확신 있게 살아가는 나를 본받아 흔들림 없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라” 그 말입니다. 얼마나 자신 있는 태도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이런 신앙의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먼저 믿은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시대에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있고 기준이 될 수 있고 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힘이 세상을 섬기고 헌신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근래에 리더십에 대한 글들이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모든 이론을 폐하고 리더십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힘’일 것입니다. 

 

과거 농경시절의 영향력은 신체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그 힘은 지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영향력은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에게 영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감동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가 지닌 인격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오늘날은 누가 힘이 있다 하더라도 감동받지 않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 하여 특별히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각과 말, 행동이 조화를 이룬 신실한 인격이 구비될 때 주변에선 말없이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바울은 자주 이런 요구를 합니다.

 

바울서신에서 몇 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전 4: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전1: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참 놀라운 요구입니다.

오늘 성직자들 중 과연 몇이나 자기 양떼들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믿음, 나의 경건한 삶, 나의 헌신된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바울이 자신의 양떼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특징이 20-21절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집니다.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시민권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줄잡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노예였고, 나머지 가운데 절반은 자유인이었고 절반만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로마 시민권은 로마 군인으로서 21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주어졌거나, 세금을 많이 내 로마제국에 충성한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가 그 당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로서 특별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특징들을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삶의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그의 뜻을 첫 번째 관심사로 삼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을 끝장내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사모합니다.

이것들이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집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왕을 뵙고 직접 간구하며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할 권세’라고 말합니다.

히10: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경은 그런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몰렸을 때에도 주저함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빌4: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2.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삶

세상에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이 어떤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하는지 주목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자기가 선한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노력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부 십자가의 영광을 훼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삶의 특징이 19절에 나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한마디로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는 삶’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배 곧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인 배에 충성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능과 탐욕과 정욕을 좇아 삽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나옵니다.

가인의 이야기도 나오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끊임없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세상과 세상의 삶입니다.

마음과 관심과 흥미와 생각이 전부 이 땅에 매여 있습니다.

 

며칠 전 세계적인 신약학자인 ‘크렉 불룸버그’ 미 덴버신학교 교수가 방한했습니다.

이분과의 인터뷰 기사가 국민일보에 나왔습니다.(2012년 6월16일)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현재 미국 기독교의 최대 이슈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미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물질주의’이다. 물질적인 부요로부터 영적인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유입되어 잘 살게 된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이 더 살기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 안락한 집,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 승차감 좋은 차, 즐거움........

하늘나라가 좋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인데 그래서 온통 물질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미국교회만의 문제일까요?

어쩌면 이 문제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화란을 향해 날아가던 멧오리들이 수천 리를 날아오느라고 피곤하고 지쳐서 어느 집 지붕에 내려 앉아 잠시 쉬어가려고 하는데 마당을 내려다 보니까 자기들과 비슷한 집오리들이 자기들처럼 고생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주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살이 디룩디룩 쪄서 잘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내려가서 저 오리들이 먹는 먹이를 먹고 편히 쉬다 가자” 하고 내려앉아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루만 쉬다 간다는 것이 이틀이 지나고 삼 일이 지나니까 더욱 날기가 싫어졌습니다. 한 일주일 지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어느 날 굳게 결심하고 지붕 위로 날아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살이 너무 쪄서 더 이상 날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하게도 집오리들과 함께 지내다가 어느 날 잡혀서 요리가 되어 먹히고 말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천국 시민권자로서 끊임없이 영혼의 날개, 믿음의 날개를 치면서 천국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데, 많은 크리스찬들이 안개처럼 잠깐 있다 사라지는 세상 즐거움과 쾌락에 도취되어 그만 세상 사람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을 맞고 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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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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