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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1. 끝으로

  • 종말로,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 중요한 말을 쓸 때에... 


빌립보서의 두 큰 주제

"기뻐하라" 

" 주 안에서" 

-> 두 주제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동전의 앞 뒤 면이다. 

하나로 정의하면 "주안에서의 기쁨의 서신"


  • 1, 2 장에서 '주 안에서' '기쁨으로'등의 주제어구를 수시로 사용. 이제 본격적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를 함께 사용. 
  • 세상에서의 기쁨- 조건적, 일시적, 주관적인 기쁨 
  • 주 안에서의 기쁨- 상황이나 조건에 연연하지 않는 기쁨. 불멸의 기쁨, 절대적 기쁨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근심하는 기쁨 -> 주님은 부활을 이미 앎으로 고난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 후의 일을 미리 알려 줌. 주님의 부활은 언제나 현재형, 미래형.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맛보기 시작한 기쁨->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 안에서의 기쁨'
  • 바울: 감옥에서 하루하루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 그런데 말끝마다 기뻐하라. 왜? '감옥 안'이 아니라 '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현실을 굳건히 받치고 있기 때문에... 
  • 실내온도와 실외온도: 실외온도- 환경의 영향, 기후의 영향... 그러나 실내온도는 항상 같은 온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오히려 더운 여름은 더 시원하게, 추운 겨울에는 더 따뜻하게... 

->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 안에 있는가?" "주 밖에 있는가?"하는 것. 주 안에 있는지, 세상 속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 

->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인생의 추위가 올 수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더운 맛을 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재산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좀 이런 절대적인 불멸의 기쁨을 맛보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성경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왜 우리 마음속에 이런 기쁨이 없을까요? 


Why? 인격적인, 관계적인, 상호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일방적인, 형식적인, 무감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 ‘형식’에 익숙해 있기는 한데, 그 속에 ‘내용’, ‘본질’, ‘알맹이’가 빠져있다. 예배드리는 일에 익숙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그냥 빨리 해치우는 것이 되어 버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정말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영적인 감동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끝나고 나서 하나님과 만나고, 서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의사소통하고, 그 의사소통한 내용을 가지고 세상에 파송하기를 워하십니다. 그런데 예배는 드렸는데 무엇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끔씩 사람들 만나서, 혹은 중보기도 하면서 요새 기도제목이 뭐세요? 하고 물으면 딱히 뭐....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무슨 기도를 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제목을 하나하나씩 적어놓고 기도하는 훈련... 

  •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 뿐, 생명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오래하다 보면 여러 가지 직분을 받게 됩니다. 직분 안준다고 시험은 드는데 직분 받고서 그 역할을 안하는데에 있어서는 무감각합니다. 그 직분이 직위나 부담이 될 뿐 그 직분에 걸맞게 봉사하면서 맛보는 기쁨이 없습니다. 형식은 그럴 듯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진짜 있어야 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형식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주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2.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 이 표현 속에서 우리는 아마도 이 편지 말고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다른 편지들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편지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고, 거듭해서 가르치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자꾸 반복해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이야기 했으니까 오늘은 그냥 대충 넘어가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꾸 반복해서 강조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는 매일 새로운 것을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말씀, 새로운 성경공부, 새로운 프로그램, 새로운 형식을 원합니다. 물론 형식은 새롭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위대한 구원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매일 듣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 주일날 설교-> 금요일날 설교의 내용.... 새벽예배때 설교의 내용이 반복될 때가 많다. 처음엔 그것이 부담. 아내에게도 질책->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실까? 중요하니까...아직도 깨닫지 못했으니까... 


  • 여러분이 매일 먹는 음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매일 밥을 먹습니다. 거기에 이런 저런 반찬을 곁들이고 찌개와 국을 곁들이고 하지만, 결국에 그것들은 밥을 잘 먹기 위한 side dish에 불과합니다. 매일같이 밥을 먹는다고 그것에 대해 지겨워하고 짜증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생 같은 밥을 먹어도 맛있다고 합니다. 매일 우리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같은 맹물을 매일 마신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생명의 떡과 생명수가 되는 진리의 말씀을 반복하여 듣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몇 번이고 반복하여 듣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무슨 기발하고 새로운 것을 자꾸 찾는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적인 진리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서 지겹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단 사조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 어떻게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본질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딜레마-> 그러나 우리가 읽는 말씀을 살펴보자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늘 새로운 말씀... 

     주기도문, 사도신경.... 신경써서 해보면 그것을 통해서 얻는 새로운 은혜...'

     가톨릭의 기도- 정해져 있는 기도....-> 형식주의다!   개신교 - 새롭게 기도해라...-> 과연 새롭게 기도하는가? 

     -> 신앙생활 자체가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도 늘 새롭게 부어지는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 

     -> 세상의 문화: 늘 새로운 것이 나오지만 금방 실증내게 되는 문화. 늘 새로워도 늘 지겨운 문화... 

  • 이것은 신앙생활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새로운 반찬이 있으면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밥이라는 주식입니다.
  •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내용을 담는 형식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 없듯이, 형식이 없이는 어떤 내용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주객이 바뀐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형식에 빠져듭니다. 형식에 목숨 겁니다. 형식에 담겨있는 진리와 정신과 내용을 보려고 하지는 않고, 형식 자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이 빠져있던 형식주의라는 함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삼가라’는 말은 경계하고 조심하고 피하라는 뜻이지요. 그 세 가지는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 또한 ‘몸을 상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빠져있던 형식주의입니다

1. 개들

  •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개’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최하의 짐승을 가리킬 때 ‘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이 바로 ‘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개들’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아무나 보고 짖고, 아무것이나 먹어대고, 서로 물고 싸우고 으르렁거리는 개들처럼,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짖어대고 그런다는 것이지요. 
  • 여러분, 정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너그럽습니다. 그런데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자신은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그르다고 비판합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볼 때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실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느라고 바빠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손가락질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애절하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할례를 받았으니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뻐기는 것이지요. 


2. 몸을 상해하는 일

  • 이전의 개역성경- 몸을 상해하는 일-손할례당
  •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할례’를 자신들이 선민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라고 생각
  • 손- '잘라내다' 손할례당-  할례의 의미에 이미 잘라냄이 포함. 
  •  굳이 이 말을 덧붙여서 사용하는 것은, 육체에 겉모습에 상처를 내고 잘라내는 그런 할례에 목매달고 사는 유대인들의 형식주의를 비꼬아서 하는 일종의 말장난
  • 바울은 할례를 형식주의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 1차 전도여행을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이방인의 할례문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 문제 하나로 회의를 열어 베드로, 야고보등의 정리로 이방인에게는 할례를 안해도 됨을 공표. 
  • 할례가 처음 소개된 것은 창 17장 -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그에게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명령. 

    75세 때 부르심을 받아 이삭을 약속받았지만 24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열매- 99세 때- 이젠 인간적인, 육신적인 기대가 다 사라졌을 때에다시 그에게 나타나서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명함. 

    믿지 못할 상황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포함해서 온 식구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꼭 일 년 후에 아브람은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은 지 팔 일만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기적같이 이루어진 일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들을 볼 때마다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과의 계약 백성이라는 표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감격과 믿음은 사라지고, 그저 표피만 잘라내는 형식주의로 남게 된 것입니다. 할례라는 형식은 행하는데, 그 속에 담겨있어야 할 기쁨과 감격과 믿음의 고백은 사라진 것입니다. 나중에는 할례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그 이외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육체에 상처를 내어 붙인 표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미 곳곳에서 이러한 형식주의를 경고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렘6:10)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단순한 육체의 할례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무수히 지적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 형식주의에 목매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제 고집대로 목을 뻣뻣이 곧게 세우면서 살면서도, 단지 육체에 할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당한 것도 바로 이것을 지적한 때문이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형식주의자들은 형식에 목숨 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용보다 형식이 언제나 더 중요합니다. 형식을 바꾸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가 건들기만 하면 손톱을 세우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할례주의자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 결국 ‘개들’이나 ‘행악자들’이나 ‘할례주의자들’은 형식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도 이런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함정은 유대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 안에 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기쁨 또한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형식주의’에 목매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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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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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11.13 00:41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