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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4절, 주 안에서 찾은 기쁨.  


빌립보서는 감옥 속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감옥이라는 외적 환경과 기쁨이라는 빌립보서의 주제는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입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두 단어, 감옥이라는 환경과 기쁨이라는 감정을 잇는 것,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기뻐하라고 쓴 한국말의 영어식 표기는 "rejoice"입니다. 

단순히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기뻐하는 것, 혹은  rejoice, 다시 참여하는 것, 즉 회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회복 하는 것도 어디에서 가능한가? 바로 "주 안에서"입니다. 


요즘 자동차에는 실외온도 표시기가 있습니다. 차 안에서 달리면서도 바깥 온도를 가리켜 줍니다. 

바깥 온도는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시간에 따라, 기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그런데 또 자동차에는 실내온도 표시기도 있습니다. 일정한 온도를 맞추어 놓으면 그보다 더울 땐 에어콘이 나와서 온도를 내려주고 그보다 추울 땐 히터가 나와서 온도를 올려줍니다. 

우리가 운전하기 알맞은 온도로 맞추어 줍니다. 


바깥 온도가 더우면 더울 수록 에어콘은 강하게 나오고 바깥 온도가 추우면 추울 수록 히터도 강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자동차 안의 온도는 창문을 열지 않고 실내온도기만 잘 설정해 놓으면 우리 몸에 적당한 것입니다. 

아주 더울 때 덥다고 창문을 열면 에어콘도 작동되지 않고 그저 더 덥기만 합니다. 더울땐 창문을 닫고 실내온도기를 작동시켜야 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이와 같습니다. 

내 인생이 힘들고 어렵고 춥고나 덥거나 하면 자꾸 바깥 환경에 맞대지 말고 주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창문을 닫고 골방으로, 산으로, 성전으로 나와 주 안에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의 시작은 "끝으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글을 정리하고 결론지을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끝으로라는 말은 혹, "종말로" 라는 말로 다른 구절에서 번역되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결론적으로....요약하면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네게는 안전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이 말은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하지 않고 또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도 무더위가 찾아옵니다. 혹독한 추위가 찾아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재산을 날릴 수도 있고, 심지어 욥처럼 내외적 모든 고통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믿는 자라고 다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 영혼의 온도가 무너질 때 다시 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 다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즐거움을, 기쁨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믿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덜었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늘 외적 환경 가운데서, 세상 속에서 맞대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온도가 내려가는지, 혹은 올라가고 있는지, 영적으로 무감각하면 그것을 감각하지 못하고 속수 무책으로 외부 환경에 억눌려 지낸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니까, 예배 드렸는데, 기도 했는데,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왜 그러한 영적인 고통, 염려,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주 안에 있으면 기쁘다고 했는데...난 항상 주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또 기쁨이 사라지고, 염려하고 있고, 근심하고 있고....넘어져 있는 나를 바라 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애굽에서, 세상의 노예에서 벗어나 광야가운데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민족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나타내는 만나가 40년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아침마다 공급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적도,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떠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쁨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만나의 기쁨도 잠시 매일 똑같은 만나가 지겨워지기 시작합니다. 

매추라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것 같습니다. 

바위 속에서 나오는 물이 달지 않습니다. 


외적인 환경이 보이고, 그 환경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매일 똑같게만 여겨질 때에 어김없이 나오는 것은 불평이고, 원망이고, 그래서 자꾸만 과거 속으로, 옛날에 더 좋았고, 애굽이 더 좋았고, 자꾸만 자꾸만 옛날로만 돌아가려 합니다.  환경이 믿음을 압도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주 안에서가 아니라 감옥 안의 삶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자꾸만 주 안의 삶이 감옥 안의 삶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일까요? 


  • 그 원인을 바울은 2절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바울은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지금 세가자의 일을 삼가하라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들어올 때마다 우리가 주 안의 삶이 아닌 감옥 안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세가지가 무엇입니까?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를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가지이지만 결국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형식주의적인, 자기 의를 주장하는 교만한 신앙인을 말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1. 개들을 삼가하라

"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천대받는 짐승이었습니다. 지금은 개가 대우받는 시대라고 하기는 해도 여전히 우리나라에도 욕을 할 때에 이 동물의 명칭을 사용해서 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도 사람을 가장 비하해서 비유하는 동물이 바로 개였습니다. 세계 민족 중에서 개를 경멸의 의미로 사용하는 민족은 아마도 이스라엘과 우리나라 뿐이지 않나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개들을 그토록 경멸하고 하대했을까요? 지금은 개들도 순종, 잡종을 나누어서 교배를 시키기도 하지만 옛날이야 그런데 어디있겠습니까? 사람은 은밀한 곳에서 남들이 보지 않는 가운데 사랑을 하지만 개들이 교배 할 때를 보면 남의 눈치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그것도 종류에 상관없이, 발정기가 되면 아무하고나 붙어 가지고 끙끙거립니다. 


순혈주의, 혈통과 피를 강조했던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에 있어서 개들은 피를 더럽히는, 그야말로 아무하고나 뒹그는 그런 잡종, 이방인, 혼혈주의를 가리키기 때문에 특별히 이방인들, 혼혈인들을 개에 빗대어 경멸하고 하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모욕하는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진짜 모욕을 받아야 할 개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하신 것입니다. 

ex) 수로보니게 여인-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심이 마땅치 아니하다. 

-> 그녀의 믿음을 보이시기 위한 주님의 말씀. 누구에게 보이고자? 제자들에게...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의 믿음이 얼마나 순수한가? 

주님이 사역 초창기- 주님을 보러 나온 바리새인들...

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아니하다....하며 예수와 제자들을 비아냥거리고 믿음에서 떨어짐...


바른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남에 대해서는 너그럽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은 보지 않고 자꾸만 남들의 허물을 바라보고 모욕을 주고 경명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머물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자신은 옳고 남들은 그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데 바빠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는 한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탕자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집에서 하루도 만족함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기는 하는데 그 어느 것도 자기가 누리는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자기가 주인될 날 만을 기다립니다. 결국 자기가 왕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돌아오자 참았던 분노가 폭발합니다. 은혜라는 것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격없는 동생이 와서 잔치를 열고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의롭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은혜로 사랑을 베푸려고 하는데 그는 언제나 내 일한 만큼 보상해 달라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동거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큰 아들의 모습일 때에 결코 기쁨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은 것은 오직 주의 십자가의 은혜임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남들을 개라고 저주하면서, 경멸하면서 우리 스스로 그런 개의 모습이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신실한 자와 바리새인은 한끝 차이입니다. 한 순간에 신실함이 교만한 자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2. 몸을 상해하는 자들을 삼가라  - 손할례당

새번역에 '몸을 상해하는 자들을 삼가라" 이말은 예전 성경에는 손할례당을 삼가라는 말로 번역된 말입니다. 

그 번역이 좀 더 설명하기 쉬운 번역입니다. 

손할례당이 무슨 말입니까? 

손으로 할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때의 "손"은 잘라낼 손, '손해', '훼손'할 때의 의미입니다. 할례라는 것이 잘 알다시피 자기 성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것이기에 그 말 안에 그 의미를 다 표현하고 있는데 굳이 손할례당이라고 표현한 것은 할례의 의미가 아니라 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가 언제 처음 시작됩니까?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때,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이삭을 약속하시면서 명령한 것이 할례입니다. 

그 이전까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지만 그 약속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기 방법대로 그 약속을 이루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이제 내가 나의 방법으로 이를 행하겠다하시면서 명령하신 것이 아브라함과 그 모든 남자 식솔들에게 할례를 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이제 내 방법이 아닌 아버지의 방법대로 살겠습니다하는 약속의 상징이요, 순종의 맹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감격과 믿음은 사라지고, 그저 표피만 잘라내는 형식주의로 남게 된 것입니다. 할례라는 형식은 행하는데, 그 속에 담겨있어야 할 기쁨과 감격과 믿음의 고백은 사라진 것입니다. 나중에는 할례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그 이외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육체에 상처를 내어 붙인 표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미 곳곳에서 이러한 형식주의를 경고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렘6:10)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단순한 육체의 할례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무수히 지적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 형식주의에 목매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제 고집대로 목을 뻣뻣이 곧게 세우면서 살면서도, 단지 육체에 할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당한 것도 바로 이것을 지적한 때문이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방인의 할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 이방인의 할례문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 문제 하나로 회의를 열어 베드로, 야고보등의 정리로 이방인에게는 할례를 안해도 됨을 공표. 


할례라는 것이 이젠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내 방법 버리고 하나님 방법대로 살겠습니다하는 순종의 언약인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난 할례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형식만 남겨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난 예배 드렸으니까, 교회 다니니까.... 여러분, 교회 다닌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려도 받지 아니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결국 ‘개들’이나 ‘행악자들’이나 ‘할례주의자들’은 형식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도 이런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함정은 유대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 안에 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기쁨 또한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형식주의’에 목매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주 안에서"의 참 의미, 혹 참 할례의 의미를 3절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

봉사는 service입니다. 이 service, 봉사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는 자체에 만족하지 않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좀 만나라는 것입니다. 


또한 봉사는 말 그대로 봉사입니다. 예배하는 한 시간이 예배가 아니라 참 예배틑 우리의 삶을 통해 드리는 거룩한 봉사라는 것입니다. 

worship에서 그치는 예배가 아니라 service로 이어지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 서비스는 물론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의 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을 닦아주는, 무릎꿇고 낮은 자세에서 섬기는 그러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우리의 신앙의 열매는 내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을 해서 복받고....

바울은 자기는 죽어도 예수의 이름만 높아지면 그것이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점이 언제나 나한테 있습니다. 

내 자존심 상하면 참을 수 없고, 내 이름이 모욕당하면 성내고 분노합니다. 

신앙은 내 자랑이 아니라 예수 자랑입니다. 예수 높이기 위해서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를 자랑하기 위해서 남을 깎아내렸습니다.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들을 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는 그들이야 말로 그들이 경멸하는 바로 그 개였습니다. 


너도나도 주님만 자랑하면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너도 나도 주님만 자랑하면 서로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내 자랑만 하면 결국 다 죽는 것입니다. 


3.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육체를 믿습니다. 믿음의 결과로 자산의 육체를 살핍니다.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의지하고, 그렇지 못하면 남을 의지하게 되고, 결국은 돈을 의지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머니다 하면서 결국은 돈으로 결론 짓습니다. 


그렇긴 한데, 에이 그래서 실재는....하면서도 신앙과 실재를 언제나 타협하고 하고, 결국은 신앙을 굴복시킵니다. 


외형적 무신론자와 실질적 무신론자. 더 무서운 것은 실질적인 무신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가랴...)

아멘하면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신앙에 어찌 기쁨이 충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감옥 같은 세상에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주 안에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자기 의를 내세우고, 남들보다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고, 형식만 갖추고 본질은 잃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믿는 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를 믿고 남을 믿고 돈을 믿고 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예배는 service입니다. 섬김이고 희생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죄인들의 앞에 수건을 동이고 무릎꿇고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나를 꺾는 것입니다. 

내 방법 버리고 주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rejoice

다시 에덴의 기쁨을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다시 나와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이 기쁨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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